[와인 재테크] 와인의 저장

와인은 분실되거나 파손되면 그걸로 생명을 다할 뿐 아니라 온도나 빛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 이동이나 진동에도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사실 투자재로서는 매우 성가신 존재임에 틀림없다.


전통적인 투자재인 주식이나 채권은 안전한 곳에 보관할 수 있다는 전제만 있다면 보관 조건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추운 곳이어도 상관없고, 더운 곳이어도 상관없다. 덥거나 춥거나 상관없이 그 가치가 유지된다.

더운 곳에 보관된 채권이 추운 곳에 보관된 채권보다 가격이 낮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극단적인 예이지만 주식이나 채권 등 유가증권은 분실돼도 좀 까다롭고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긴 하지만 제권판결과 재발행이라는 절차를 통해 그 가치를 원상 복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와인은 분실되거나 파손되면 그걸로 생명을 다할 뿐 아니라 온도나 빛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 이동이나 진동에도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사실 투자재로서는 매우 성가신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특성은 원래 와인의 근본 목적이 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마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받아들여야만 하는 한계다.

고급 와인을 보관하는 저장시설 하면 떠오르는 곳은 프랑스 보르도나 부르고뉴의 와인 생산자들이 직접 만들어놓은 지하 와인셀러다. 어둡고, 습기가 많고, 조용하고, 항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곳 말이다. 이런 와인셀러에 들어갈 때면 어쩌면 경건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다. 요즈음 최고급 와인들의 가격이 점점 오르고 있어 이런 와인셀러는 점점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는 신성한 장소가 돼가고 있는 듯하다.

고급 와인을 저장할 수 있는 지하 와인셀러의 조건은 그 온도가 영상 11~13도가 유지돼야 하고, 화이트 와인은 레드 와인보다 좀 더 서늘하게 보관돼야 하며, 진동이 없어야 하고, 빛이 들어오지 않아야 하며, 어떤 냄새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까다로운 조건들은 와인 자체의 보관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코르크 마개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 같기도 하다.

습도가 높아야 한다는 것은 코르크 마개의 건강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하 와인셀러의 조건은 실은 와인을 오크통에 저장하던 시절의 조건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리병에 담아서 코르크 마개로 밀봉한 와인은 실제로 자연 상태에서 가장 완벽한 밀봉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오크통에 넣어서 보관하는 경우라면 자연적인 증발을 막을 도리가 없다.



프랑스에서 맛보았던 품질, 한국에서 다르다?

와인을 오크통에 보관하는 경우에 와인셀러의 습도는 꽤 높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대개 70% 정도의 습도를 유지하면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떤 전문가는 95%까지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습도가 유지돼야 오크통의 통널이 단단함을 유지할 수 있고, 나무의 기공을 통한 내용물 증발을 억제할 수 있다.

이러한 오크통을 이용한 와인 저장에 대한 상식이 유리병에 담긴 와인의 저장에도 그대로 적용돼 와인셀러의 습도 유지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게다가 유리병의 마감 재료인 코르크 마개도 역시 나무 성분이니 당연히 와인셀러의 조건에 습도 유지는 필수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코르크 마개의 밀봉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뉘어서 보관해 코르크 마개의 한쪽 끝이 젖어있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와인 보관에 있어 피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진동이다. 와인셀러는 조용하고 고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거리의 교통량이 많은 곳에 보관하는 것도 와인 보관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진동은 와인의 숙성 과정을 교란시켜 긴 여행 끝에 나타나는 피로감과 같은 현상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청동방울 속에 와인을 넣고 계속 두드려서 진동을 주는 실험을 해봐도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줄 만한 변화는 관찰하지 못했다. 와인셀러에 에어컨을 설치하면 그 진동 때문에 와인 숙성에 방해가 된다고 조언하던 전문가들도 있었지만 에어컨 가동 정도의 미미한 진동은 와인 보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아 지나치게 온도가 올라가서 와인의 품질이 안 좋아진 예는 심심치 않게 관찰되고 있다.

그렇다면 와인을 이동시키는 경우는 품질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프랑스에서 맛보았던 품질 좋은 와인이 한국에서 다시 맛보면 영 안 좋은 와인으로 변질된 경우는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프랑스에서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가도 역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심지어는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동부 연안으로 와인을 운반해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동 중에 와인이 흔들려서 와인 숙성에 방해가 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동 중 와인의 흔들림이 아니라 온도다.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온도 관리

와인의 품질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온도다. 그것도 온도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고온에 얼마나 오래 노출됐는가 하는 점이다. 와인이 이동 중에 흔들려서 침전물이 뒤섞인 경우에도 2~3주 고요한 상태에서 보관하면 원상태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온에 오래 노출된 경우에는 숙성이 빨리 진행돼 과일 맛과 포도의 풍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와인이 돼버린다. 고온과는 반대로 저온은 와인의 풍미를 잃게 하지는 않는다. 와인의 빙점인 영하 2.8도 이하로 내려가지만 않는다면. 저온의 경우에는 와인의 화학반응을 느리게 만들 뿐이다.

온도가 높아질수록 와인 병에 들어 있는 와인은 빠른 화학반응을 보이게 된다. 물론 이런 점을 이용해 생산된 지 얼마 안 된 와인을 빨리 숙성시키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갓 생산된 와인을 오크통에 담아 범선의 밸러스트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배가 적도를 지나 남반구에 갔다가 되돌아오면 놀랍도록 빨리 숙성되곤 했다.

와인이 숙성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부케를 얻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만큼 신선한 과일 맛과 풍미는 잃게 된다. 오래된 와인에서도 신선한 과일 맛이 난다는 건 그만큼 화학변화를 더디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열의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온도가 오르락내리락 하면 와인 보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와인에 해를 끼치는 것은 온도 변화의 빈도가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고온에 노출됐느냐 하는 것이다.

온도 변화가 고온의 범위에 들었을 때 와인은 열의 영향을 받게 된다. 온도가 높을수록 영향을 미치는 데 필요한 시간도 줄어든다. 와인에 의미 있는 악영향을 주는 온도는 영상 21도부터다. 이 온도부터는 와인의 화학반응이 눈에 띄게 빨라진다.

온도가 와인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와인마다 그 영향이 다르다. 산도가 풍부하고 타닌이 많은 와인일수록 온도에 덜 민감하다.

또 한 가지, 와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빛이다. 빛에너지는 와인 병 안에 들어 있는 분자들을 활성화시키면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소비자들은 와인 병에 들어 있는 와인을 더 잘 식별하기 위해 투명한 와인 병을 선호하지만 그런 병은 빛으로부터 와인을 전혀 보호할 수 없다. 녹색 병과 갈색 병 중에 갈색 병이 더 와인을 잘 보호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갈색 톤이 짙을수록 와인을 보호하는 데 유리하다. 인공조명은 어떨까. 와인보다 빛에 더 민감한 맥주도 인공조명 아래에서는 큰 영향이 없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다. 와인에 영향을 주는 빛은 오로지 햇빛뿐인 것 같다. 인공조명이 와인의 저장에 영향이 없다고는 해도 온도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강한 인공조명은 예외로 해야 할 것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와인의 저장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바로 열의 관리다. 습도도, 진동도, 심지어 빛도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 온도만큼은 와인의 숙성을 빠르게 진행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주의 깊은 통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열에 의해 숙성 과정이 빠르게 진행된 와인이라고 해서 못 마실 와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서늘한 곳에 잘 보관한다면 밸런스가 되살아나서 마시기에 적당한 와인이 된다. 이런 면에서 와인을 살아 있는 식품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김재현 하나금융WM본부 이사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