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환 아이리버 대표이사 “세상을 바꾸는 제품들 이제부터 보게 될 것”
입력 2012-12-27 11:01:05
수정 2012-12-27 11:01:05
CEO 인터뷰
지난해 9월 아이리버에 합류한 박일환 대표는 삼보컴퓨터에서 20여 년간 근무한 전문경영인이다. 2005년 6월 법정관리를 신청한 회사의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돼 삼보컴퓨터의 회생을 주도한 인물로 유명하다. 위기에 강한 박 대표는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를 개발하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최근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아이리버의 반전을 준비해왔다. 그리고 1년 만에 ‘세상에는 없던 제품’을 마침내 내놨다.지난 11월 13일 오후 5시경 서울 방배동 아이리버하우스의 음질 테스트실. 진공관 앰프와 30년 된 탄노이 스피커를 통해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1번’이 흐르기 시작했다. 첼로 현을 활로 켜며 나오는 저음이 첼로 통에서 공명하며 맑고 경쾌하게 퍼져 나온다.
첼로의 음색뿐 아니라 현에 활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현을 긁는 소리, 그리고 연주자의 호흡소리까지도 느낄 수 있다. 눈을 감으면 여기는 웅장한 콘서트홀이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음악의 힘을 극대화시킨다.
이를 가능케 한 플레이어는 성냥갑 크기의 아이리버 신제품 ‘아스텔앤컨(Astell&Kern)’이다. 세계 최초로 MP3 플레이어를 개발했던 아이리버가 ‘휴대용 하이파이 오디오’란 신개념 제품을 들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즉, 고급 헤드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초고음질의 음악 감상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아이리버는 한때 ‘한국의 애플’로 불리는 혁신 기업이었지만 스마트폰이라는 휴대용 통합기기의 패러다임에 밀려 경쟁력을 잃어갔다. 그러다 지난해 9월 삼보컴퓨터의 신화 박일환 대표를 구원투수로 영입하고 재기를 준비해왔다.
마침내 지난 10월 아스텔앤컨을 통해 아이리버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의 재도약을 시작했다. 최근 만나는 사람마다 아스텔앤컨이 주는 짜릿한 감동을 체험케 하고 있다는 박 대표를 만나 아스텔앤컨의 개발 스토리, 아이리버의 혁신과 경영 전략, 그리고 철학을 들어봤다.
아스텔앤컨이 기대 이상의 ‘물건’입니다. 전율을 느낄 만한 음질을 구사하네요.
“비디오 쪽에서는 풀HD, 4K 등 고화질이 중요한 요소가 됐습니다. 하지만 오디오에서는 시대를 역행했죠. CD 음질 이후 MP3가 일반화되면서 음질이 떨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같은 역행이 있었습니다. LP 음질보다 못한 테이프가 편리함 때문에 대중화됐었죠. 음질의 역행을 두 번 겪다 보니 음악산업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지난해 9월 아이리버에 합류한 후 개발팀과 모여 앉아 뭘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선택지는 몇 가지 없었죠. 싸게 만들든지, 아니면 차별화를 통해 아주 제한된 소수를 위한 틈새를 공략하는 것이었죠. 우리는 차별화를 택했어요.
아이리버는 MP3 플레이어의 신화를 갖고 있는 만큼 최고의 음악 플레이어를 만들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최고의 음질을 지향하는 것이었죠. 개발 초기에는 타깃 소비층을 고음질을 추구하는 소수 애호가로 잡았어요.
하지만 실제 제품을 출시하고 보니 의외로 고음질을 추구하는 수요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대중적으로 많은 소비자들이 고음질을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헤드폰과 이어폰 기술이 아주 좋아진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명품 헤드폰 성능을 지원하는 휴대용 고음질 플레이어가 없었어요.”
출시 이후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시장 반응이 뜨겁습니다.
“저희도 의외입니다. 지난 10월 10일 한국, 27일 일본에서 아스텔앤컨을 출시했습니다. 일본에서는 헤드폰박람회를 소개하는 팸플릿 표지에 울트라소니, 제나이저 등 쟁쟁한 명품 브랜드와 함께 아스텔앤컨이 그려졌습니다.
아스텔앤컨을 경험한 이들은 ‘수천만 원에 육박하는 하이파이 오디오의 품질이다’, ‘휴대용 플레이어에서 이런 음질을 기대한 적이 없다’, ‘흥분시킨다’ 등의 평을 내놨어요.
그리고 이후 아스텔앤컨의 소개 자료는 한국어, 일본어밖에 없었음에도 영문으로 번역돼 빠르게 서구 매체에 소개됐습니다. 해외에서 반응이 빨라 연말까지 싱가포르, 홍콩, 유럽, 미국에서 출시할 계획입니다.”
초기 물량이 모두 소진됐고 해외에서 선주문이 몰리고 있다는데, 판매량이 현재 어떻습니까.
“아스텔앤컨의 알루미늄 보디는 선반이라는 기계로 회로 넣을 공간을 깎아냅니다. 중국 공장이 아닌 경기도 군포에 있는 공장에서 일일이 수공으로 제작돼요. 그래서 많은 물량을 제작하지 못하고 있죠. 현재 만드는 만큼 팔리고 있습니다. 물량을 늘리고 있지만 주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해외에서 순차적으로 출시하는 이유가 공급 제한 때문이에요.”
아스텔앤컨의 개발 스토리를 들려주십시오.
“고품질의 플레이어를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당시 아이리버를 좋아하는 외부 인물들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전문 오디오를 만드는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음질 테스트용 하이파이 오디오를 뭘로 구비해야 할지부터 조언해줬죠.
하이파이 오디오에는 덱(DAC)이 있어 디지털 시그널을 원음에 가깝게 튜닝해 아날로그로 바꾸죠. 하지만 시그널이 아날로그로 바뀌는 순간 노이즈에 취약해집니다. 녹음 당시의 원음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아날로그 음을 잘 다룰 수 있는 경험과 기술이 요구됐어요.
그때 오디오 전문가들이 기술적인 사양만으로 고음질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그래서 고품질 오디오 시스템이 만드는 소리와 아스텔앤컨의 소리를 수없이 비교하고 수정하며 음질을 개선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스텔앤컨은 기존과 달리 프리미엄급 시장을 겨냥했습니다. 앞으로 아이리버의 경영 전략이 이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까.
“아스텔앤컨은 새로운 비즈니스 카테고리를 생성하는 제품입니다. 69만 원의 가격은 MP3 플레이어로는 비싸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정도 사양의 전문회사 오디오 가격에 비해서는 싼 편이죠. 아스텔앤컨을 시작으로 새로운 카테고리의 제품을 하나씩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랜드 비전 아래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앞으로 재미있게 전개될 것입니다.”
아이리버는 디자인에 공을 많이 들여왔습니다. 아이리버에 있어 ‘디자인’이란 무엇입니까.
“저희에게 디자인의 의미는 일반적인 그것과는 달라요. 디자인은 꿈을 실현할 수 있어야 좋은 디자인입니다. 디자인은 우리의 열정과 열망을 담는 그릇이에요. 디자인을 통해 개발자는 엔드 유저와 감정적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하죠. 디자인에는 기술자의 희생과 헌신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는 ‘디자인(design)회사’와 ‘디바이스(device)회사’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인회사는 세상을 바꾸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반면, 디바이스회사는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더 좋게 잘 만드는 데 전력하죠. 아이리버는 디자인회사가 되고 싶어요.”
지난 상반기 아이리버는 13분기 만에 영업이익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올해 흑자 전환을 이루는 의미 있는 한해가 예상됩니다.
“올해 상반기 흑자는 전자사전, MP3 플레이어로부터의 감소하는 수익을 만회하기 위한 여러 비즈니스로부터 나온 것이고 구조조정 일부가 반영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회사가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건 아니죠. 재정 면에서 아이리버를 견인할 제품으로 준비한 것이 아스텔앤컨이고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2013년 실적부터는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거 애플과 비교될 정도로 혁신 기업이었던 아이리버가 그동안 부진의 늪을 겪었던 총체적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스마트폰이라는 복합기기의 출현이었습니다. 기존 비즈니스를 이렇게 빠른 속도로 잠식시키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더 좋은 MP3 플레이어, 전자사전, 휴대형 멀티미디어 재생기(PMP)를 만들어보려 했으나 스마트폰 앞에선 무용지물이었죠.
예상보다 스마트폰이 빠른 속도로 보급됐고 패러다임의 변화 속도를 아이리버는 잘 읽지 못했습니다.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가 아니라면 대성공을 거둘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디자인회사’가 바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회사입니다.”
지난 몇 년간 영업적자가 늘어갔지만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어느 회사든 일정한 재원을 갖추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죠. 과거 성공적인 비즈니스 덕분에 그동안 손실이 있었음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여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팀이 무엇보다 중요한 힘이죠. 개발팀, 영업팀, 운영팀이 견고하게 있었기 때문에 아이리버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아이리버에 제가 왔을 때 많은 이들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리버가 살아날 수 있겠냐고. 그들은 나에게 해답을 요구했고 확신에 찬 전략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경영을 해본 결과 말이나 서류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믿음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아이리버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구성원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이제 조금씩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재우 전 대표는 경영에 계속 참여합니까. 해외 사업 등을 전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과 다릅니다. 경영에 대한 책임과 권한은 나눌 수 없습니다. 이 전 대표는 이사회 이사로서만 활동하고 있습니다.”
혁신에 대한 기대와 시대적 요구가 강한데 개인적으로 영감이 필요할 때 주로 어디서 얻습니까.
“결국 혁신에 대한 영감은 지식과 경험의 산물이에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뭔가 배울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배우려는 마음이죠. 지난 2005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EMBA(Executive MBA)에서 공부했던 것이 많은 영감을 줬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디자인스쿨에 참여해 ‘생각하는 디자인’을 배우고 있어요. 그리고 좋은 경험과 지식이 있는 분이 있다면 쫓아가서라도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또한 저와 지식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어요.”
세계 정보기술(IT) 시장에 나타날 다음 혁신 기기는 무엇이 될까요.
“IT기기는 나가는 길이 뻔합니다. PC와 휴대전화 등의 융합(convergence)은 과거 예상했던 대로 거의 모두 이뤄졌습니다. 융합의 패러다임이 지속된다면 글로벌 제조사가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브랜드 파워와 자본력을 가진 자가 절대 강자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리버는 융합 과정이 지나면 다시 분할(divergence)이 시작될 것으로 봅니다. 아스텔앤컨이 그 기류의 시작입니다.
비즈니스의 역사는 반복돼 왔습니다. 1980년대 IBM 컴퓨터 아래 수직적으로 중앙처리장치(CPU)는 인텔, 본체 조립은 컴팩과 델, 소프트웨어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융합됐죠. 그리고 별도의 노선을 걷는 애플은 비즈니스 모델이 뒤졌다고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애플의 노선이 찬사를 받는 시대가 왔어요. 앞으로 일어날 일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런 변화 가운데 어떤 것에 집중할지가 아이리버가 가진 고민입니다.”
여가 시간에 주로 무엇을 하면서 지냅니까.
“최근 교회 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요. 합창 지휘를 맡게 됐는데 색다른 경험을 했어요. 회사 경영이 합창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합창 단원들이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보를 잘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죠. 한 달 반 동안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어요.
마찬가지로 기업을 경영할 때도 구성원 모두가 완전히 필요한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니에요. 합창을 만드는 거나 제품을 만드는 데는 늘 부족함이 있죠. 하지만 강조했던 것은 단 하나입니다. 내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 소리를 듣는 것이었어요. 이것이 가능할 때 화음이 이뤄지는 것이었죠.
바로 지난주에 ‘약할 때 강함 되시네’란 곡을 합창했는데 모두 너무 열심히 했고 내가 봐도 너무 잘했습니다.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CEO로서의 책임을 더욱 무겁게 느낍니다.”
5년 후 아이리버와 박 대표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까.
“제 바람이겠지만 5년 후 아이리버가 과거 세계 시장에서 성공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이리버 팀과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러한 성공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있다는 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오늘보다 내일에 조금 더 경험과 지식을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글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