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일본 경제의 교훈]1990년 이후 일본의 자산 시장 변화

한국과 일본의 자산 시장은 여러 분야에서 공통점이 많다. 일본 경제 버블의 정점인 1990년 이후 일본 자산 시장의 추이를 통해 향후 한국인들이 투자에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점을 찾아본다.


관건은 ‘플러스 알파(+α)’다. 일본 자산 시장의 특징은 저성장, 저금리로 요약된다. 자산 운용이 속수무책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 ‘+α’는 일본 가계의 최대 미션이다. 아니면 장수시대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열도 가계가 만만찮은 악재와 고군분투 중이란 의미다. 이런 점에서 곧 유사상황에 봉착할 한국에 일본은 훌륭한 힌트 제공자다.

일본의 지난 20년이 ‘천장→바닥’의 일관된 흐름이란 점도 의미가 있다. 감축성장 시대라면 하락일로는 피할 수 없는 트렌드여서다. 걸어온 길조차 한·일 양국은 판박이다. 경제구조, 인구 변화, 복지 기반, 사회 갈등, 가족주의 등 양국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해 문제해법의 설명력도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다.



버블 붕괴와 함께 재테크 붐도 사라져

먼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자산 시장의 환경 변화를 살펴보자. 주된 관심사인 버블 형성과 붕괴 과정을 금리·경기 변화로 알아보자.

버블의 씨앗은 1985년 플라자합의다. 무역불균형의 해결을 위해 엔·달러 환율이 조정(달러당 360엔→80엔)되자 일본 정부가 경기 부양 차원에서 금리를 낮췄는데 이게 버블의 계기가 됐다. 즉 1986년 5%이던 금리를 2%로 떨어뜨리며 통화 팽창을 유도했다.

이때 풀린 돈이 자산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져 버블이 형성됐다. 이후 지가와 주가는 각각 5배, 3배 폭등했다. 심상찮은 자산 인플레는 금리 인상(2%→6%)을 불렀고 동시에 가격 칼날은 날카롭게 떨어졌다. 상환 압박은 거세졌고 불량 채권은 쏟아졌다. 이때부터 금융은 스톱됐고 일본 경제는 디플레이션으로 진입했다.

재차 선택된 제로금리, 양적완화조차 유동성 함정을 낳을 뿐 별 효과가 없었다. 일본적 예외 사례는 부침은 있었지만 1990년대 이후 20년간 펼쳐졌다. 가계자산을 끌어내고자 ‘저축에서 투자로’의 범정부적인 슬로건마저 제시됐지만 한치 앞이 어두운 불확실성은 일본인의 투자 관행, 선호 자산만 보다 확고히 했다. 위험선호적인 반동 선택이 있었지만 대세 앞에선 일부 예외일 뿐이었다.

이로써 ‘재테크’란 말은 뇌리에서 사라졌다. 주식, 부동산부터 미술품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진 1980년대 말의 재테크 붐은 충격적인 교훈만 남긴 채 꺼져갔다. 거대한 욕망 실현과 화끈한 버블 축제는 사라졌고 남은 건 엄청난 고통 분담의 뒤처리뿐이다. 고령화 악재까지 겹쳐진 최근 20년의 장기·복합 불황이 그 결과다.

그렇다고 일본 가계가 재테크와 결별한 건 아니다. 살아갈 날은 긴데 살아낼 돈은 적다는 딜레마를 풀자면 자산 증식이 필요하다는 압박은 한층 높아졌다. 요컨대 저성장, 고령화로 돈을 불리려는 필요성은 더 커졌다.

물론 포기하는 그룹도 많다. 종자돈이 없고 투자 환경조차 열악해져서다. 상대적 박탈감의 2030세대가 대표적이다. 금융 위기 이후엔 그나마 가까스로 되살아난 운용 욕구조차 없애버렸다. 그래도 당위론만큼은 건재하다. 돈 없는 인생살이의 고단함을 넘기 위해서다. 심화 중인 무연(無緣)사회의 고독사(孤獨死)로부터 벗어날 자신감도 없다. 즉 2012년 일본인의 재테크는 ‘높아진 필요와 줄어든 희망’으로 요약된다.



시중금리 제로시대의 재테크

일본 가계의 투자 환경은 절망적이다. 투자 활동의 기준 잣대인 시중금리가 제로 상태니 ‘+α’를 기대하기 힘들다. 시중금리는 0.1%까지 떨어졌다. 즉 예(적)금은 자산 운용 범주를 벗어났다. 자산을 불리려면 고위험·고수익 위험자산의 편입 확대뿐이다. 주식, 펀드 등의 활용이 필요하다.

문제는 투자 성향이다. 일본 가계의 선호자산은 안전성이 최우선이다. 증권·운용사가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은행, 우체국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없는 근본 이유다. 그만큼 기대수익이 낮다. 기대수익 3~4%대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소개한 잡지편집이 일상적일 정도다. 해외 주식·채권을 비롯한 외환 거래 등 위험자산에 대한 관심이 없진 않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수익 증대를 포기한 대신 선택한 활로가 지출 감소다. 웬만해선 ‘+α’가 힘든 데다(자산소득) 일자리조차 악화됐다(근로소득)는 점에서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선 셈이다. 유니클로의 저가 공세나 500엔 동전 한 닢으로 민생고를 해결하는 원코인(one coin) 마케팅이 활황인 배경이다. 긴켄(金券) 등 할인 티켓, 적립카드, 우대권 등으로 생활비를 아끼려는 가계도 많다. 적게는 2~3%에서 많게는 최대 10%의 ‘+α’가 기대되니 인기가 높다.

일본 가계의 자산 운용은 한마디로 안전 지향이다. 2012년 3월 가계 금융자산은 1513조 엔이다. 금융 위기 직후(2009년 3월) 1408조 엔까지 줄었지만 최근 급속히 회복된 수준이다. 이 중 55.2%가 현·예금(835조 엔)에 집중됐다.

위기 이후 특히 늘어난 건 현금과 마찬가지인 유동성 예금이다. 2009년 3월 281조 엔에서 2012년 3월 310조 엔으로 늘었다. 정기성 예금은 거의 변화가 없다. 위기 대응 차원이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보험, 연금(422조 엔)까지 합할 경우 전체 자산의 83.1%(1257조 엔)가 원금 보전 형태로 운용된다는 얘기다.

장기 추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년 소폭 변화가 있지만 최소 절반 이상이 현·예금 등 안전자산으로 편입된다. 금융상품 선택 기준도 1순위는 안전성(44.9%)이다(금융광보중앙위 2009년). 국제 비교에선 보수 성향이 한층 도드라진다. 일본 가계의 현·예금 보유 비중은 56%인 반면 미국(15%)과 유로 지역(35%)은 일부에 불과하다(2011년). 주식, 채권, 펀드 등 이른바 위험자산의 범주에 포함되는 자산은 일본(10%)이 미국(53%)은커녕 유로 지역(31%)보다도 낮다. 극단적인 안정지향적 투자 성향이 국가 경제의 활력을 저해한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것은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이다.



2000년대 초반 일시 펀드 붐 일기도

더 큰 문제는 내수 침체다. 안전지향성 탓에 여유자금이 은행 주변에만 머물면서 선순환의 첫 출발인 내수시장의 소비 의욕을 침체시켜서다. 골칫덩이 유동성 함정이다. 윤활유(돈)가 돌지 않는 기계(경제)란 삐걱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들어낸 고육지책이 ‘저축에서 투자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노후 준비에 있어 자기 책임을 강조하며 서둘러 적극적인 자산 운용에 나설 것을 강조한 정책이다. 2001년 고이즈미(小泉) 정권 때부터 이후 투자 관련 정책 우대가 본격화됐다.

2003년부터 주식·펀드 매각이익과 배당·분배금 세율을 20%에서 10%로 인하하는 증권우대세제를 실시한 반면 예금·적금금리는 20%를 유지했다. 그 덕분에 10.1%(2001년 3월)에 머물던 위험자산 보유율이 17%대(2007년 3말)까지 올랐다.

특히 펀드로의 급속한 자금 유입은 2000년대 중반 일본 가계의 작은 붐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금융 위기 이후 위험자산 보유율이 10%대 밑으로 회귀했고 폭락 과정에서 손실을 본 가계도 늘어났다. 정부 정책에 대한 위화감이 지배적인 배경이다.

주목할 건 인구그룹별로 구분되는 차별성이다. 정리하면 ‘풍족한 노인, 가난한 청년’이다. 인플레 시대를 살아온 고령세대가 자산 과실을 독점한 반면 청년그룹은 디플레 탓에 자산잔치의 설거지 꾼 신세로 전락했다. 실제 젊은 비정규직의 통장 잔고는 암울하다.

워킹푸어, 니트족, 프리터 등 2030세대 취업난민 대부분은 ‘취업 실패→절망 증대→의욕 상실’의 악순환에 빠졌다. 그래도 4060세대는 낫다. 채용 당시 고용 환경이 2030세대보다 좋고 8090세대의 부자 부모로부터 상속 수혜도 기대돼서다.

20~30세 몫은 금융자산의 6.2%뿐이다. 40대(12.1%)까지 넣어도 18.3%에 불과하다. 절대다수(81.7%)는 50대 이상의 중·고령자다. 60대(32.4%)와 70대(28.1%)의 보유자산은 천문학적이다. 또 노인세대의 위험자산 선호도도 높다.

원래 연령에 비례해 투자 성향은 보수·안정적이게 마련인데 일본 가계는 얘기가 다르다. 정년 이후(65세 이상) 평균적인 일본 노인은 자산 운용에 적극적이다. 은퇴 이후 수입은 주는데 지출은 늘어나 이를 막기 위한 선제적인 자산관리에 나선 결과다. 위험자산의 상징 상품인 주식, 펀드의 경우 연령이 많을수록 보유 비중이 높다. 주식 보유 비중은 20대(4만 엔), 30대(15만 엔)보다 60대(120만 엔), 70대(121만 엔)가 훨씬 많다(2인 이상 세대).



일본에서 인기 있는 펀드 종류

이 와중에도 인기 자산의 쏠림 현상은 뚜렷하다. 안전지향성 탓에 은행 상품의 인기가 독야청청함에도 불구, 물밑에선 ‘+α’를 노리려는 손바꿈이 비교적 활발하다. 열악해진 투자 환경만큼 운용 필요 욕구가 높기 때문이다. 상황 탓에 한 푼이라도 더 얹어주는 상품에 눈길이 가는 건 당연지사다.

틈새상품의 주도권은 인터넷뱅킹이 쥔 형국이다. 최근 인터넷뱅킹 수요는 증가세다. 인터넷 전업 은행(7개사)의 합계 계좌가 1000만 개를 돌파하는 등 상대적 고금리와 다양한 기간 설정 등으로 가계자금을 흡수 중이다. 이자 수준은 비교적 높다. 정기예금(0.2~0.34%·1년 만기)은 물론 보통예금(0.02~0.05%)까지 금리가 높다.

소니은행의 경우 최대 0.32%의 고금리(?)를 제시했다. 예금 상품은 아니지만 기본 구조가 비슷한 1년 만기의 SBI채권(SBI증권)은 1.6%로 시선 집중에 성공했다(2012년 9월). 각종 수수료가 면제되고 혜택도 많아 인기가 높다.

지방 저축은행의 일부 상품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부 저축은행은 0.025%대의 시중은행보다 무려 20배나 높은 0.5%대 금리를 내놔 고객의 눈길을 끈다. 비용절감분을 돌려주거나 부가 혜택을 얹은 경우다. 복권 당첨 기회나 마일리지, 특산물까지 제공하기도 한다.

위험자산의 선두주자인 주식은 여전히 침체일로다. 고점(3만8916엔) 대비 4분의 1 토막 상태로 비관론이 우세하다. 위험자산의 틈새를 공략 중인 건 펀드다. 전체 비중은 미약해도 상품 라인업이 늘면서 위험과 안전 사이에서 고민 중인 일본 가계의 눈높이를 맞췄다는 평가다.

위험하지만 분산효과가 높다는 점이 한몫했다. 실제 위험자산 중에선 적지만 유일하게 자금이 몰린다. 2009년 3월 47조 엔이던 보유 비중은 3년 후 61조 엔으로 늘었다. 특히 매월분배금 지급 펀드는 단일 유형으로는 최대 덩치를 자랑한다. 전체 주식형 펀드(44조 엔) 중 76%(33조 엔)를 차지한다.

매월 용돈처럼 안정적인 분배금을 원하는 고령세대가 핵심 고객이다. 인기 확산에 힘입어 지금은 청장년층에서도 가입 수요가 증가세다. 인기 펀드는 통화선택형 펀드와 리츠(REITs), 엔화채권 펀드 등으로 압축된다. 통화선택형은 외국 채권 등에 투자돼 통화 간의 금리 차이와 환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다.

브라질(레알) 등 자원부국의 통화가 관심 대상이다. 리츠(부동산 투자신탁)에 대한 관심도 높다. 평균배당금(5.21%)이 10년 국채(0.95%)는 물론 도쿄1부 평균 배당(2.11%)보다 월등히 높아서다. 유동성이 높아 현물, 부동산보다 매매가 쉽고 저가 경쟁력에 따른 추가 상승 기대감도 충분하다.



안정지향성 덕에 국채 인기 변함없어

그렇다면 안전지향성의 대표 선수인 채권은 어떨까. 정부 채권의 절대다수를 가계예금 수탁기관이 사들이니 채권 인기는 불문가지다. 다만 직접적인 채권 투자는 일부에 그친다. 특히 가계의 국채·재융채 보유 비중은 36조 엔(2008년)에서 28조 엔(2012년 3월)까지 줄었다.

물론 개별 단위의 해외 채권 직접투자는 조금씩 증가세다. 관심을 끄는 채권자산은 개인 대상의 판매 국채다. 일본 정부가 재정 확보 차원에서 라인업을 강화하는 등 투자 환경을 우호적으로 바꾼 게 주효했다. 원래 개인 대상 국채는 최소 5년에 제공 금리도 시중금리보다 크게 높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2010년부터 인터넷 정기 상품보다 약간 낮은 금리(0.12%·1년 만기)의 3년짜리를 매월 발행해 유동자금 피난처로 매력도를 높였다. 만기 3·5·10년의 세 종류에 1만 엔부터 투자할 수 있다. 그 덕분에 국채상환액을 포함한 상당한 자금은 국채에 재투자돼 일본부도설을 무색케 한다.

부동산은 주지하듯 운용자산으로서의 매력이 거의 없어졌다. 거주공간으로서 기능성이 강조되는 추세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자가(自家) 보유 욕구가 낮다. 집을 사는 이유도 시세차익보단 저금리, 저가 메리트, 세제 혜택 등이 먼저 꼽힌다. 디플레도 한몫했다. 보통 최장 35년의 모기지(주택대출)로 집을 사왔는데 대출이자는커녕 집값마저 디플레로 떨어지면 더 이상 매입할 이유가 없어서다.

당연히 매매도 활발하지 않다. 다만 2008년 이후 도심역세권에 위치한 맨션(아파트)을 중심으로 한 매수 수요는 증가세다. 내진 설계, 편리한 관리, 역세권 여부 등이 중시되면서 직주(職住) 환경에 대한 갈망이 늘어난 결과다. 일부 물건은 내놓자마자 매진되는 사례가 잇따른다. 세제 보조와 인구 유입, 물량 감소 등이 맞물린 덕분이다. 복수물건을 매입해 월세 수입을 거두려는 투자자가 적잖다.

한편 보험의 경우 노후 불안에 따라 퇴직연금을 확정급여(DB)형에서 확정기여(DC)형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많다. 개인연금도 활발하다. 최저 보증의 변액연금 판매 정지 등으로 변액연금이 감소하자 정액연금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특이한 건 외환거래(FX)다. 안전자산을 짝사랑하는 일본인과 배치되는 현상으로 여름·겨울 상여시즌이면 FX가 필수자산으로 추천된다. 최근 엔고 상황이 지속되면서 FX 거래의 투자 적기란 인식마저 광범위하다. 저금리인 엔화를 빌려 매도한 뒤 고금리 통화를 사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다만 손실 사례가 많아지면서 경계론도 증가세다.


전영수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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