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건축을 가장 한국적으로 승화시킨 건축가 김중업

건축가 기행

김중업은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가장 한국적인 건축가다. 프랑스 대사관, 옛 한국미술관, 삼일빌딩, 올림픽 평화의 문 등의 작품을 남긴 건축가 김중업. 필화사건과 정치적 탄압에 생을 재촉한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세계를 엿본다.


2011년 6월 한국 현대건축사에 유일하게 건물이 예술품으로 승화돼 미술경매 반열에 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문화재는 건축물, 예술품은 그림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그 사건은 큰 관심을 모았다. 당시 경매 자문을 맡은 서울옥션 측은 “현 소유주는 이 건물을 잘 보존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소유주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 건물이 바로 건축가 김중업이 1967년에 설계한 서울 가회동 옛 한국미술관이다. 김중업의 초기 건축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전통 격자천장이 특징이다. 건축 당시에는 주택이었으나, 이후 이탈리아 대사관, 한국미술관, 그리고 다시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건축가 김중업은 프랑스 대사관을 건축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교수직 박차고 나와 르 코르뷔지에 문하에서 수학

만약에 한국인에게 잘 맞는 옷을 만들어 보라면서 옷감으로 양복지를 제시한다면 옷 디자이너는 어떤 옷을 만들까. 혹자는 한복 모습 그대로 재현할 것이고, 혹자는 개량 한복을 만들 것이고, 혹자는 한국인에게 맞는 양복을 만들 것이다.

김중업은 옷으로 비교하자면 양복지로 개량 한복을 만드는 일류 디자이너였다. 즉, 콘크리트 등 현대건축 재료의 성질을 파악하고 한국 전통 건축을 현대화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김중업은 1922년 3월 9일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결림소학교,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일본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다. 1948년 서울대 건축학과의 조교수가 됐으나, 1952년 당대 최고 유명 건축가인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에게 배우기 위해 출국했다. 1956년 귀국해 서울 관훈동에 건축설계사무소를 개설했다.

건축설계사무소를 개설한 후 1957년 건국대 도서관, 1958년 서강대 본관, 1964년 제주대 본관 등을 차례로 건축했다. 건국대 도서관은 언덕 위에 있는데 그 형태를 따라 평면이 ‘시옷(ㅅ)’자형이다. 중앙에 완만한 원형 경사로와 급경사인 원형 계단으로 오르내리는데, 계단이 어찌나 급경사인지 위험할 정도로 아찔하다. 도서관에서 졸지 말라고 그랬나 싶을 정도다. 지금은 언어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어 외국 유학생들이 한국 건축가의 아찔한 향기를 만끽하고 있다.

서강대 본관은 지금도 본관으로 사용 중인데 정문이 서향이라 석양을 막는 그릴이 디자인 요소로 적용됐다. 반면 제주대 본관은 제주의 이미지를 반영한 듯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던 건물로 작품성이 매우 빼어났지만 건물 확장을 위해 1995년 철거됐다.

김중업이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 설계한 건국대 도서관.

건국대 서관 계단.지금은 언어교육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 수여

1959년 건축된 주한 프랑스 대사관(서울 서대문구 소재)은 김중업 자신이 밝혔듯이 자신의 건축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작품이다. 이 건물에서 백미는 한국적 친화력이 있는 지붕 곡선이다.

콘크리트로 나타낼 수 있는 한국인만의 곡선이며 프랑스 정부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해 김중업은 196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는다.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수학하고 국내로 귀국하려는 무렵 “김중업이 역량을 펼치기엔 한국이 너무 협소하다”고 말했던 스승 르 코르뷔지에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프랑스 대사관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이어 1965년 건축된 건물은 서산부인과 의원(서울 중구 소재)이다. 지금은 사무소 건물로 사용 중인데, 김중업의 해학적 기질이 더해진 건물이다. 각층이 161.9㎡(49평) 정도의 4층 건물인데 산부인과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건물 외벽과 발코니가 하얀 피부의 육감적인 부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려한 곡선을 띤다. 특히 지붕 위에 돌출한 굴뚝은 남성 성기를 연상하게끔 한다.

강화도 전등사 대웅보전을 건축한 도편수는 변심한 여인의 조각을 만들어 지붕 아래 네 귀퉁이에 세워 지붕을 받치게 해놓았다는데 그 해학적인 도편수의 전통까지도 김중업이 이어받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69년 김중업은 삼일빌딩을 건축했다. 31층으로 설계된 시커먼 건물 삼일빌딩이 청계로(관철동)에 솟아오를 때 종로에는 서서 층수를 세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고 한다. 삼일빌딩에는 필자만의 작은 에피소드가 서려 있다.

1971년 12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을 지방에서 흑백 TV로 보고 서울에 왔는데 시커먼 건물이 있기에 속으로(당시 대부분 건물은 밝은 색 아니면 빨간색 벽돌이었기에) ‘저게 대연각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이듬해인 1972년 대학 건축과에 입학해 과제로 삼일빌딩을 조사하면서 대연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김중업은 서강대 본관과 프랑스 대사관, 옛 한국미술관, 올림픽 평화의 문 등 다양한 작품을 남긴 후 1988년 지병인 당뇨로 생을 마감했다.

필화사건과 정치적 구설수에 이은 별세

1969년 삼일빌딩으로 한국인에게 서구적 고층 건물의 미학을 선보이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도약의 상징을 건축했던 김중업. 그러나 그는 서울 동빙고동 호화 주택촌 사건, 무너진 와우아파트 부실 공사, 청계천 주민의 성남시 이전 파동 등 정부가 벌인 졸속 건축행정과 부도덕함을 매섭게 질타한 것이 화근이 돼 1971년부터 8년여 프랑스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김중업은 1979년 10·26사건 이후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존심과 자긍심과 겸손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존심은 냉수 먹고 이 쑤시는 것이고, 자긍심은 고기 먹고 이 쑤시는 것이고, 겸손은 고기 먹고 배고픈 척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김중업은 그의 천부적 능력과 곧은 성격 때문에 겸손보다 자존심을 앞세워 배고픈 시절을 겪어야 했다.

1985년 9월 실시된 올림픽 평화의 문 설계 공모에서 김중업 작품이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그런데 10월 서울시는 갑자기 86조형물(조각가 김세중 작) 건립 계획을 취소하고 88조형물(김중업 작)은 모양을 바꾸도록 결정한 후 두 작가의 합작을 종용했다.

그러나 김중업과 김세중은 “각자의 철학이 다르고 분야도 다르기 때문에 합작이 불가능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김중업은 “합작은 절대 안하겠다. 공개 작품전을 열어 국민의 심판을 받고 당국의 부당성을 설명하겠다”고 강경한 뜻을 천성처럼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가 설계한 평화의 문은 절 입구의 일주문과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의 지붕선을 살린 대문 모양이었다. 지붕은 높이 24m, 너비 70m의 철골트러스 및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그런데 심사 결과가 대통령에게 보고되기도 전에 언론에 크게 보도되는 바람에 서울시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더구나 “당선작이 규모가 작어 상징성이 약하다”, “기념비적인 성격이 뚜렷하지 않다” 등의 비판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기념물은 중앙이 솟은 첨탑형인 데 비해 평화의 문은 두 날개가 있기에 외관상 생소하고 내구성이나 관리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김중업은 “국보 1호인 남대문의 세 배 규모가 작은 거냐”고 반박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두 달여가 지난 12월 말 원래 작품을 수정해 당초보다 약 세 배 큰 규모인 높이 91m, 너비 91m로 만든 작품이 채택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무 커 안전성에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있어서 다시 높이 32m, 너비 45m로 축소해 공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1년 가까이 공사가 진행됐을 때 다시 처음 설계대로 높이를 24m로 낮추라는 주문이 왔다. 이에 김중업은 크게 반발하고 공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의 문이 준공되기 몇 달 전인 1988년 5월 11일 지병인 당뇨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변의 지인들은 올림픽 평화의 문이 그의 생명을 크게 단축시켰다고 아쉬워했다.



강희달 건축사·전 서울건축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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