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기행] 새로운 길을 찾아 문화인으로 살다간 김수근

건축가 기행 ①

김수근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왕당으로 불리며 후배 건축가들에게 모범이 됐던 카리스마 있는 건축가이자 문화인 김수근. 건축가 기행을 시작하며 그를 첫 자리에 놓는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지식과 경험, 인품 등 여러 면에서 어떤 건축가보다 훌륭했던 건축가 김수근. 그 덕에 많은 후배들이 ‘왕당’으로 부르며 그를 따랐다.

1980년 초 창덕궁(비원) 돈화문 옆에는 두 왕이 있었다. 한 왕은 현대건설 정주영 ‘왕회장(王會長)’이고, 또 다른 왕은 공간건축 김수근 ‘왕당(王堂)’이다. 왕당은 비원 옆에 비원과 잘 어울리는 아담한 검정 벽돌집에서 건축설계를 하고 있었고, 왕회장은 현대건설 사옥으로 큼직하고 둥글둥글한 창문이 수십 개인 큰 빌딩을 지었다.

왕당은 멋있게 지을 것을 요청하고 왕회장은 남의 일에 걱정하지 마라 우기다가, 결국 왕당이 통행하는 길 쪽 담장만은 그대로 두기로 하고 싸움은 멈췄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현대건설 사옥 쪽은 육중한 화강석이지만 반대 쪽은 허름한 시멘트 모르타르 담장이 옛 모습으로 남아 있어서 옛날 두 왕의 싸움을 회고하게 한다.

나는 김수근에게서 카리스마를 느낀다. 카리스마는 어디에서 오는가. 커다란 몸, 굵은 목소리, 준수한 얼굴에서 오는가. 아니면 컴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상대에게서 느끼는 것일 뿐인가. 김수근은 지식, 경험, 인품이 당시 어떤 건축가보다 훌륭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후배들로부터 ‘왕당’으로 불리게 됐다.

건축 또는 문화예술인 사이에서 김수근은 선생님으로 불린다. 건축설계는 본디 도제(徒弟)를 통해 지식이 전달되기 때문에 훌륭한 분 아래에서 공부하기를 원했고, 비록 보수는 매우 적었지만 훌륭한 건축가 밑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자부심이었고, 또 장차 성공의 보증수표였다.




김수근은 붉은 벽돌, 검정 벽돌 외에도 기존 건물에서 철거한 낡은 벽돌, 찌그러진 벽돌 등을 다양하게 사용한 선구자였다.

새로운 길을 가다

김수근은 1931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 서울 교동소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쳐 1950년 서울대 건축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54년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했다.

도쿄대 석사 과정 중인 1959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 설계에 참여해 당선하자 1960년 박춘명, 강병기와 함께 국회의사당 설계사무소를 개소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으로 국회의사당 설계가 중단돼 3인 팀은 해체되고 김수근은 김수근건축연구소를 개소한다.

김수근 건축연구소의 대표작은 서울역 앞 대우빌딩이다. 대우아케이드 실내 벽면 마감은 헐값인 잘못 구워진 벽돌만 골라서 쌓되 줄눈을 깊게 파 넣어 질감을 특별하게 했다. 김수근은 잘 구워진 빨간 벽돌은 정갈해 인간적인 맛을 느끼기엔 부족하다고 여겨 불가마의 온도가 맞지 않아 갈라지거나 검게 변해 폐품처럼 여기는 빨간 벽돌을 과감하고 멋있게 사용한 것이다. 김수근은 기존 건물에서 철거한 낡은 벽돌, 깨진 벽돌 등 과거에 사용하지 않던 벽돌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선구자였다.

워커힐호텔 언덕 위에 있는 힐탑바는 역피라미드 형태의 노출콘크리트 건물(콘크리트 자체가 마감재인 건물)이다. 당시 노출콘크리트는 서양과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인데, 힐탑바는 노출콘크리트 건물로는 우리나라에 처음 건설됐다. 10여 년 전 힐탑바에는 초록색 도 피자가 특별했었는데 지금도 그 메뉴가 있는지 궁금하다.

1962년 아시아반공연맹 임시총회에서 자유센터를 건립하기로 결의했는데, 건축설계는 일본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알게 된 김종필과 관계가 좋았던 김수근에게 의뢰된다. 자유센터는 당시 한국 처음으로 콘크리트만으로 건축된 건물이며 건물의 모양은 개다리소반 모양에서 차용된 것이다. 건물의 기능을 최우선으로 하던 시절에 필요 이상으로 멋있게 설계된 자유센터는 경이적이긴 했지만, 비경제적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타워호텔은 방패연의 실타래 모양에서 외관을 차용해 디자인한 것이다.

김수근은 외관을 먼저 정하고 그 속에서 용도에 맞게 방을 나눠 배치하는 조형주의 방식으로 설계했는데, 이는 당시 여타 건축가가 편리한 기능을 우선하고 이에 맞춰 외관을 정하던 기능주의와 반대되는 방식이었다. 기능주의 관점에서 조형주의를 보면 낭비처럼 보인다. 요즘도 상업성을 위주로 하는 건물은 기능주의를 택하고, 예술성을 위주로 하는 건물은 조형주의 방식을 택하지만, 사실 둘 다 완벽히 성취한다면 천재 건축가로 불릴 것이다.




미켈란젤로처럼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하는데 담당관이 코가 높으니 낮추라고 하자, 미켈란젤로는 몰래 대리석가루를 준비해 다비드상의 코를 깎는 척하며 대리석가루를 뿌렸다. 이윽고 담당관이 만족해하자 코 깎는 쇼를 멈췄다는 일화가 있다.

1970년 오사카박람회 한국관은 검정과 붉은색의 원통 기둥과 철골트러스로 돼 있었다. 정부관계자들이 주변 다른 국가의 건물은 흰색이어서 밝은데 우리나라는 검정이라 칙칙하고 미완성 같아 보인다고 불평하자 철골트러스에 슬쩍 오색 풍선을 달아 잔칫집 분위기로 바꿨다. 자존심인 건물은 그대로 두고 며칠 있으면 떼어버릴 풍선으로 불평을 잠재운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은 항아리 모양을 연상하게 하는데 문제는 성화대가 그라운드 옆에 낮게 촛대 모양으로 돼 있어서 경기 관람 시에 시야를 가리니 성화대를 지붕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성화대는 주경기장 관람석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어야 하고 모두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지붕 곡선을 해치기 싫었던 김수근은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의 의견을 따라 움직이는 성화대로 변화시켰다. 이번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그라운드에 성화대를 설치했다가 완전히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하니, 성화대 이동의 원류가 우리나라인가 보다.
일본 가지마출판사가 ‘세계 101인 건축가’로 선정한 건축가 김수근. 그가 남긴 건축물은 모두 특별한 의미가 있다.

김수근이 갑자기 유명해지자 시기성 짙은 라이벌도 많아졌다. 마침 부여박물관이 건립됐는데 지붕선이 일본의 도리이 같다는 비판이 신문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때 김수근은 도리이는 그 근원이 백제라고 위트 있게 넘겨, 반대 의견도 무시하지 않고 박물관의 자존심도 지켰다. 싸울 수도 있었겠지만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알았으리라.

전통 건축에서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차이점을 서양인은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기본 재료로 보면 나무 기둥에 곡선 기와지붕이 모두 같으니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요즈음은 전 세계적으로 외벽을 유리창과 패널로 덮으니 그저 비슷비슷하다. 한국사람 눈에 보기 좋으면 그게 한국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고, 왠지 어색한 건 외국적인 것이 돼버렸다. 그런데 부여박물관의 지붕선은 일본의 도리이는 아니지만 왠지 어색하다.



문화에 투자하다

무슨 연유인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66년 김종필로부터 200만 원(당시 1원이면 사탕 5개·현재 20억 원)의 격려금을 받자, 문화예술 종합잡지 ‘공간’을 창간했다. 부동산 투자나 사무실 확장비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적자가 예상되는 문화예술 사업에 투자한 것인데, 지금이야 수많은 문화예술 잡지가 있지만, 당시 ‘공간’은 최고의 잡지로 멋 내려 들고 다닐 만 했었다. 지속되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사명감을 안고 지금까지 지령 500여 호를 발행하고 있다.

1977년 창덕궁 옆에 공간 사옥을 짓고, 지하엔 소극장을 두고 숨겨진 문화를 발견, 육성했다. 서양 예술문화가 판치고 산업근대화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아무도 하지 않는 전통문화를 발굴해 공연장을 제공했는데, 사물놀이 김덕수, 병신 춤 공옥진, 진도 씻김굿 등은 여기에서 빛을 보게 된다.



남긴 별미의 작품

1985년 일본 가지마출판사는 ‘세계 101인 건축가’로 우리나라에서는 김수근과 제자 김원을 선정했다. 김수근의 여러 작품은 모두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 경동성당과 공간 사옥 두 작품을 소개한다. 일본 건축가들도 서울에 오면 반드시 이 두 건물을 관람한다고 한다.

마산 양덕성당, 서울 경동교회, 불광동성당은 모두 기도하는 두 손 모양이다. 내부는 노출콘크리트이어서 카타콤(기독교 초기 토굴교회) 같은 음침한 분위기다. 그중 경동교회를 나는 좋아한다. 정문은 길 쪽에 있지 않고 골목을 휘돌아 뒤에 있다. 실내는 음향 반사가 너무 잘돼 마이크가 없어도 돼 성악가가 좋아한다.

벽과 지붕이 벽돌로 돼 있으니 아무리 방수를 잘해도 하자가 생기면 고칠 수가 없다. 여름이면 빗물이 새지만 강원룡 목사는 유명하면 불편한 거라며 꾹꾹 잘 참아주다 소천하셨다. 지붕 벽돌에 방수재를 도포하라고 권했더니, 작품 훼손 안 되도록 무색·무광·무변 제품을 추천해 달라는데 그런 제품은 아직 없는 것 같으니, 여름엔 계속 빗물이 떨어질 게다. 건물관리 집사는 관람객을 맞는 게 일상이 돼 웃으며 문을 잘 열어준다.

1977년 건립된 공간 사옥은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건물이다. 입구는 좁고, 복도와 계단은 골목이다. 방은 복도 옆에, 끝에, 뒤에 제멋대로 붙어 있어서 한두 번 경험해서는 들어갔다 되돌아 나올 수가 없다. 처음 방문하면 안내인이 앞장서서 가니 칙사 대접을 받는 꼴이다. 그런데 나오고 나면 건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지 않고 어느 시골 골목을 지나온 것 같은 아늑함이 있다.

김수근은 혜성처럼 나타나 문화예술계에 지대한 공적을 쌓고 55세에 암으로 별세한다. 그가 그린 자화상을 보니 실제보다 입이 작고 귀는 크게 그려져 있다. 입이 작으면 사업에서 돈 모으기 어렵고, 귀가 크면 덕이 많다는 관상가의 말처럼 그렇게 살았다.



강희달 건축사·전 서울건축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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