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共과 DJ, 노무현 정권, 그리고 박근혜…국내 유일 비례대표 4선 의원 김종인의 셀프 마케팅 비결은?

김종인 전 청와대 수석은 경제학 교수 출신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이자 비례대표 4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현재는 차기 대권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는 박근혜 캠프의 좌장을 맡고 있다. 색깔이 전혀 다른 정권에서도 계속 중용되는 그의 셀프 마케팅은 정치뿐 아니라 경영과 인간관계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근혜 대선캠프가 출범했다.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7월 5일 발표한 대선 경선 캠프 조직도와 면면을 보면 5년 전과 확연히 비교된다. 2007년 캠프가 조직·직능 중심의 경선용이라면 2012년 캠프는 정책 중심의 본선용이라는 분석이다.

“정책부문에 무게중심을 두어 정책과 비전 중심의 캠페인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했다”는 것이 캠프 측의 설명이다. 경선보다는 대선 본선에 대비해 정책의 틀을 마련하는 작업이 이뤄질 전망이다. 캠프 내부 조직 중 정책 파트(15명)는 전체(31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만큼 크게 강화됐다.

정책 자체도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와는 전혀 다른 색깔이다. 5년 전 박근혜 후보가 내걸었던 슬로건은 ‘줄푸세’였다. 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는 의미다. 이 중 ‘줄푸’는 시장경제론자들의 대표적인 슬로건이다. 반면, 지난 4월 총선 때부터 박 후보 측 슬로건의 방점은 ‘경제민주화’로 옮겨졌다.

박 전 위원장의 이 같은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현재 박근혜 캠프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자 캠프 내 강화된 정책 파트를 책임질 정책위원장. 무엇보다 박 전 위원장의 핵심 정책인 ‘경제민주화’라는 브랜드 자체를 소유한 사람.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김 전 수석은 비례대표만으로 4선을 한 국회의원 출신이다. 1985년 11대 국회를 시작으로 12대, 14대,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1대·12대에는 민정당, 14대에는 민자당, 17대에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다. 4번 모두 비례대표라는 것은 역대 거의 모든 정권에서 그를 영입했다는 소리다. 이제는 박근혜 캠프의 좌장 역할을 맡았다. 그가 가진 경쟁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김 전 수석은 선점과 독점에 능하다. 병법으로 치자면 선발제인(先發制人)이다.

先發制人

정치권에 오래 몸담았던 한 기업인의 말을 빌리자면 김 전 수석은 ‘셀프 마케팅’에 탁월한 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의도적인 것인지,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흐름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고 영향력을 넓히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선점과 독점에 능하다. 병법으로 치자면 선발제인(先發制人)이다.

선점과 독점으로 이어지는 전략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가깝게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사용했던 경영 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잡스가 선점하고 독점했던 것이 정보기술(IT) 트렌드라면 김 전 수석이 선점한 것은 정치 이슈,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상대방의 공격 포인트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잠시 시간을 되돌려보자. 2010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 진보 진영은 ‘무상급식’ 공약을 내걸었고 이를 계기로 정치권에서 ‘보편적 복지’가 최대 이슈로 등장했다. 주도권은 당연히 복지 어젠다(agenda)를 제기한 진보 진영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19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김 전 수석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맡으면서 자신이 주창해온 경제민주화를 어젠다로 내세웠고, 슬그머니 ‘복지’가 아닌 ‘경제민주화’를 정치권 논의의 대세로 만들었다. 그동안 정책 이슈 싸움에서 뒤처지기만 했던 보수 진영 입장에서는 실로 간만에 ‘내 이슈’를 만든 셈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 전 수석은 선점된 이슈를 독점한다. 대부분의 이슈가 생성된 후에는 ‘모두의 것’이 되는 반면, 그는 경제민주화를 ‘김종인이 만들고, 김종인이 추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재벌 개혁은 누구라도 외칠 수 있겠지만,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려면 김종인을 찾아가야 한다. 대중에게는 ‘경제민주화=김종인’이라는 인식이 심어졌다. 그는 1987년 개헌 당시 헌법 제119조 2항,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신설했다는 ‘인증 샷’도 갖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랜드를 시대의 입맛에 맞춰 내놓고 이슈로 만든다. 선점한 이슈는 원래 자기 것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독점한다. 간단하지만 실제로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대중의 니즈를 읽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특히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룹 심리에 빠지기 쉬운 원로 정치인에게는 청담동에 앉아 동대문의 패션을 읽는 것과 같다. 그것을 해내는 김 전 수석은 한마디로 ‘노련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의 노련함은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행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이슈나 테마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여론의 눈과 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붙잡아 둔다. 반면 그외의 이슈에는 철저한 무대응으로 조명이 그쪽으로 가는 것을 차단한다.

비대위 시절 그가 대립각을 세운 것은 야당이 아니라 새누리당 내부였다. 회의를 거부해 가면서 친이(親李)와의 불화를 대놓고 보여주기도 하고, ‘보수 용어 삭제’와 ‘경제민주화’ 문제로 ‘보수의 정체성을 허무는 빨갱이’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당 내부에서 ‘정책적’ 논쟁을 만들었다. 언론의 시선은 시끄러운 쪽으로 끌려가고, 노출이 많아지면 국민은 그쪽이 담론의 중심인 것으로 느끼게 된다.

최근 박근혜 캠프 내에서 벌어진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의 설전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캠프 출범 당일부터 김 전 수석은 라디오에 출연해 “이 원내대표는 재벌 기업에 오래 종사했기 때문에 그쪽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말했고, 이 원내대표 측은 기자들과 만나 “경제민주화란 사회정치학적인 용어지, 정통 경제학자나 영·미 주류 경제학자는 쓰지 않는 용어다. (김 전 비대위원이 말하는) 경제민주화의 내용이 뭔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이 원내대표와 김 전 수석의 논쟁이 노출되면 노출될수록 여론의 눈은 박근혜 캠프에 고정된다. 결국 관심의 초점은 ‘여 vs 야’가 아니라 ‘경제민주화 vs 경제민주화’가 되고 있다.

김 전 수석이 선수를 치고 나가는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공격 포인트, 즉 자신의 약점이다. 김 전 수석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되고 박근혜 캠프에 합류하면서 비판의 소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관계였다. 비대위 참여 직전까지 그는 안 원장의 멘토로 통했다. 안 원장이 출마할 경우 선거 조직의 핵심을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랬던 인물이 박근혜의 최측근이 됐다. 김종인을 공격하는 데 이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는 자신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먼저 공개하는 방식으로 상대의 공격을 차단한다. 안 원장과의 관계를 묻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먼저 “(멘토로서)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해 줘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하고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안 원장이 내 뜻과 맞지 않아 내 발로 떠났고, 박 전 위원장과는 뜻이 맞는다’는 것이다. 공격하기 위해 벼르고 있던 입장에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다.

지난 총선 때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은 강남갑 지역구에 박상일 후보를, 강남을 지역구에 이영조 후보를 전략 공천했었다. 역사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이들의 후보 자격에 관해 논란이 일자, 3월 14일 두 후보의 공천을 취소했다. 아예 상대방의 공격 포인트 자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태도다.

빠지는 타이밍도 절묘하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거나, 더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을 보이면 공격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그가 비대위를 사퇴하고 독일로 떠난 시점만 보더라도 비난받을 타이밍을 주지 않으니 상대방은 애간장이 탈 법도 하다. 그는 비대위 해체 전 독일로 떠났고, 비대위가 해체한 날 오히려 박 전 위원장으로부터 먼저 대선캠프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인 전 수석의 ‘뻣뻣함’은 조직과 융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사진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서명한 김종인 비대위원 해임요구서.

“내 말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떠나리”

좌우를 떠나 역대 정권이 김 전 수석을 찾는 데는 그에게서 특정 집단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특징도 한몫한다. 경제 정책에 대한 소신에 철저할 뿐 이념 다툼과는 거리를 둔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개각 때마다 총리, 부총리 후보로 거론돼 왔을 정도로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다. 개혁 이미지를 가진 김 전 수석의 정치 스타일도 쇄신이 필요한 시기에 적합하다는 평가다.

때로는 소신에 대한 고집과 자존심이 그를 영입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김 전 수석은 타협보다는 원칙을 우선한다. 이 부분이 조직과 융화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 그는 “내 생각을 펼 수 있도록 전권을 달라”고 요구하는데,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미련 없이 떠난다. 그에게 “당신은 누구 편이냐” 묻는다면 “내 말 듣는 사람 편”이 답이 될 것이다.

노태우 정권 때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들어갈 당시에는 노 전 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분야에 대해서는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 그것을 받아줄 수 없으면 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경제수석이 됐고, 이후 부동산 값이 폭등하자 재벌들에게 비업무용 토지를 매각케 하고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하는 등 재계의 반발을 헤치고 개혁 드라이브를 걸기도 했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같은 이유로 멀어지기도 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사람이 하면 나라가 좀 바뀔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경선 후 몇 마디 충고를 했더니 얼굴이 굳어지더라”며 “그 뒤 몇 번 더 실망하고는 기대를 접었다”고 밝힌 바 있다. 안 원장과 멀어진 계기도 이와 비슷하다. 이와 관련해 그는 “안 원장에게 ‘우선 국회에 들어가 민주주의 의사결정을 배우라’는 조언을 했으나 듣지 않아 (안 원장을 지지하는) 모임에서 나와 버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줄곧 ‘이렇게 해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만두면 된다’는 식의 행보지만, 그것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박차고 나온 것인지, 내쳐진 뒤의 자기 합리화인지는 솔직히 확인할 수 없다. 여하튼 이런 ‘뻣뻣함’은 권력자에게는 불편한 것이다. 자신에게 확실한 힘을 실어줄 때만 움직인다는 평가 때문에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선뜻 사용하기 힘든 카드이기도 하다.

김 전 수석의 다음 목표는 ‘킹메이커’임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은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이 강하다는 것을 언론 인터뷰에서 자주 언급했고, 그만큼 자기 소신을 펴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빠른 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왕재(王才)를 찾아다녔다. 정운찬 전 총리가 있었고, 안철수 원장과도 인연이 있었다. 정 전 총리는 실패했고, 안 원장과는 멀어졌다. ‘가지를 가려 앉는 새’인 김 전 수석이 최종으로 선택한 가지가 그의 꿈을 이뤄줄지는 연말이 돼봐야 알 것이다.



김종인의 말, 말, 말

김종인 전 수석은 거침없는 발언으로 유명하다. 직설적이고, 감추는 것이 없다. 올해 언론에 공개된 ‘김종인 어록’을 모았다.

“암탉 목 비틀지 말고 우리에 가둬 키우면 돼.” - 7월 7일 재벌 해체에 대한 질문에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그런(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성장과 분배가 이뤄지는)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 7월 3일 시장경제 룰 수정 주장에 대해

“전경련 쓸데없는 소리하면 해체해야.” - 7월 2일 전경련의 경제민주화 헌법 조항 삭제 주장에 대해

“경제민주화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정치민주화를 이해하느냐고 묻고 싶다.” - 7월 2일 이한구 원내대표와 최경환 의원이 ‘경제민주화’를 놓고 자신과 논란을 벌인 데 대해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유신체제에 구체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 3월 15일 ‘박 위원장이 유신체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주장을 두고

“나는 화합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화합하자는 것은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 3월 1일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공천 반대를 주장하면서

“지금은 이념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할 때가 아니다.” - 1월 18일 한나라당 정강·정책에서 ‘보수’ 표현을 삭제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 것과 관련해

“재벌은 탐욕에 항상 차있는 사람들이고 절제를 할 줄 모른다.” - 1월 13일 재벌 개혁 문제에 대해

“자기들이 엉망으로 만든 것을 치유해 달라고 해서 왔는데, 치료를 안 받겠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 - 1월 10일 자신을 둘러싼 당 일각의 사퇴론에 대해



김종인 전 수석은?

김종인(72) 전 수석의 조부는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이다. 어려서부터 조부를 따라다니며 정치를 경험했다. 1964년 한국외대를 졸업, 독일 뮌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다. 서강대 경상대학장으로 있던 이승윤 전 부총리의 소개로 1973년 서강대 교수로 부임했다.

박정희 정권 때 서강대 교수로 있으면서 재무부 조세제도심의위원, 내무부 지방재정제도심의위원, 4~5차 경제개발계획 실무위원을 역임했다.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소속으로 당선됐고, 12대 의원에 재선하면서 민정당 경제 브레인 역할을 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1990년부터 2년간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재임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재벌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해 재벌들과 적대 관계를 형성했다.

이후 14대 때 민자당 소속으로 3선 의원이 됐으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탈당했고, 1993년 동화은행 사건 때는 2억1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기도 했다. 2002년, 대선 전에는 노무현 후보의 조언자로 활동했고, 17대 국회에서는 민주당 의원을 지냈다.

그의 가족 관계도 화려하다. 이진설 전 건설부 장관이 사촌매제, 박봉환 전 동력자원부 장관이 자형이다. 부인은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김미경 씨로, 장인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 장인의 친동생이 바로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글 함승민 기자 sham@hankyung.com 사진 제공 한국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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