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지속 가능한 예술 지원과 후원의 선순환을 꿈꾸며
입력 2012-06-22 15:48:52
수정 2012-06-22 15:48:52
정승우 유중재단 이사장 겸 유중아트센터 대표
서른 중반. 대기업이라는 조직 속에 있었다면 과장급, 시쳇말로 ‘날아다닐’ 연차에 과감히 재단을 설립한 젊은 이사장이 있다. 정승우 유중재단 이사장 겸 유중아트센터 대표가 그 주인공. 지(知)·덕(德)·체(體)를 겸비한 예술 인재 양성을 목표로 예술지원사업의 선순환을 꿈꾼다는 정 이사장의 미래 비전이 의미 있는 메시지로 다가오는 때다.현 유중재단 이사장 겸 유중아트센터 대표
2004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
2012년 고려대 법무대학원 석사
2004년 삼미재단
2005~2008년 대우조선
2008~2010년 삼미그룹 감사실
프로필 한 장이 한 사람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을 갖게 할 때가 있다. 어찌됐던 일면식이 없는 사람을 먼저 만나는 첫 대면이 그 한 장이니, 그것을 받아든 사람은 나름대로 이미지를 그리게 마련이다. 정승우 유중재단 이사장의 프로필을 받았을 때는 일단 의구심부터 들었다. 명문대 법대 출신으로 법조인의 길 대신 대기업에 입사했고, 남들은 은퇴 즈음에 생각한다는 재단을 서른다섯에 설립했기 때문이다.
정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해 11월에 개관했다는 서울 방배동의 유중아트센터를 찾았다. 유중재단의 터전이랄 수 있는 유중아트센터 1층에는 뜻밖에도 ‘카페 드 유중’이라는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때를 놓친 점심의 허기도 달랠 겸 카페로 들어섰다.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 코끝이 시원해지는 카페에서는 웰빙 스타일 샌드위치와 음료가 입을 즐겁게 해줬고, 음료를 즐기는 사이사이에 시선을 옮기는 공간마다 신예작가들의 미술작품을 볼 수 있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라이브 콘서트도 마련한다고 하니 음악과 미술, 건강식의 공존이 매우 이색적이다.
삶의 롤모델 외조부의 뜻을 잇다
카페를 나와 2층 아트홀에 오르자 정 이사장의 모습이 보였다. 준수하고 스마트한 인상의 그는 건물 곳곳에서 코끝을 자극하는 편백나무 피톤치드 성분처럼 프레시하다. 가장 궁금했던 것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법학을 전공하고 법조인의 길 대신 대기업에 입사하셨죠. 한창 잘나갈 연차에 직장을 그만두셨어요.
“사법고시에 세 번 떨어지고 나서 법조인의 길은 포기했습니다.(웃음) 대학 졸업 전이었던 2003년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첫 단추를 끼웠던 곳이 삼미그룹의 삼미재단 사무국이었어요. 희귀 난치병 어린이 돕기, 초·중·고생 자원봉사 활성화를 위한 사회사업 등의 업무를 하면서 재단 운영에 대한 기본을 배웠습니다. 그 다음 직장이 대우조선이었어요. 감사실에서 근무하다가 계약관리실로 발령을 받았죠. 원래 그 자리는 시니어급이 가는 자리인데 당시에 법학 전공에 외국어가 가능한 젊은 피 수혈이 필요할 때라 차출을 당했어요.(웃음) 외국인 선주들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옥포외국인학교 운영을 담당하면서 학교 운영에 대한 경험을 하게 됐죠. 재단 운영과 학교 운영, 이 두 가지 분야에 대한 경험이 이후 유중재단을 설립하는 데 자신감을 갖게 한 배경이랄 수 있어요. 경험의 시너지라고 할까요.”
보통 재단은 퇴직을 앞둔 분들이 고려하는 세컨드 라이프입니다. 서른 중반이면 너무 이른 것 아닌가요.
“솔직히 그 문제 때문에 집안에서 반대도 했어요. 아직 경험도 적은데 재단 운영을 감당할 수 있을지 우려를 많이 하셨죠. 사실 재단이라는 곳이 돈을 벌기보다는 쓰는 곳이잖습니까.(웃음) 하지만 40~50대에 시작하면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서툴지만 차라리 일찍 시작해서 좀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집안을 설득했죠. 다행히 평소에 뜻을 같이하던 지인들이 이사진으로 도움을 줬어요.”
오래전부터 재단 설립을 지인들과 함께 계획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재단 형태는 아니었고요, 평소 좋은 일 해보자고 뭉쳤던 지인 다섯 명이 있어요. 지난해 1월 1일에 제가 그분들을 저희 집으로 불러 모았죠. 1월 1일에 저희 집으로 오라고 하니까 다들 신년회하자고 오라는 줄 알았겠죠.(웃음) 밤새 손으로 쓴 계획을 설명해 주고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다들 흔쾌히 수락을 해줬어요. 그중에는 금전적인 지원을 해준 분도 계시고요.”
현재 유중재단 이사장이면서 유중개발 감사라는 타이틀도 갖고 계신데요. ‘유중’이 패밀리 비즈니스와 연관됐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유중’은 원래 외할아버지의 호입니다. 형제들이 각자 사업을 하고 있는데, 유중개발은 형이 대표로 돼 있는 회사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유중재단을 설립하려는, 필요에 의해 만든 회사라고 할 수 있죠. 굳이 따지자면 유중개발은 유중재단의 모기업이랄 수 있죠. 유중재단은 일반적으로 기업에 딸린 재단이 아니라 비영리공익재단법인 특별법에 의거해 설립한 재단으로 투명한 운영을 원칙으로 합니다. 원칙적으로는 유중개발과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운영자금을 유중개발에서 후원받고 있어요.”
서른 중반에 시작한 ‘내 일’이 유중재단이었던 진짜 이유는 뭔가요.
“아버님이 굉장히 엄하신 편이셨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저는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를 많이 따랐어요. 할아버지도 물론 무서운 분이었지만 제가 막내라 그런지 많이 예뻐하셨죠. 가족들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가시는 게 싫어서 할아버지 신발이나 지팡이를 숨겨놓았을 정도였다고 해요. 중2 때 작고하셨는데, 할아버지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가족이 저였어요. 할아버지는 비무장지대인 장단 출신이신데 한국전쟁 때 피난처에서 텐트 치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워하셨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공부만 잘하는 인재보다는 지·덕·체를 조화롭게 갖춘 인재 양성에 관심이 많으셨죠. 유중재단이 지향하는 지·덕·체 삼위일체의 인재상 역시 할아버지의 뜻이기도 합니다.”
유중아트센터까지 운영하고 계신데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회사 다니면서 모았던 돈과 물려받은 부동산 등을 모두 처분해 5억 원을 마련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창업자금이었을 자산을 투자한 유중아트센터는 어떤 공간인가요.
“재단은 지난해 3월 말에 설립 허가를 받았고 유중아트센터는 지난 11월에 개관했습니다. 미술과 음악, 커피가 공존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세계 최초로 인공 삼림욕 시스템을 도입해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죠. 1층 카페 드 유중은 커피와 가벼운 음료, 웰빙 샌드위치를 즐기면서 미술작품과 라이브 음악까지 감상할 수 있는 도시인의 쉼터라고 할 수 있어요. 2층 아트홀은 독주회나 챔버 오케스트라 공연이 가능한 100석 규모의 연주 홀과 음악인들의 연습 공간이랄 수 있는 8개의 뮤직 스튜디오를 마련했습니다. 3층은 70여 평 규모의 갤러리와 작가 작업실이랄 수 있는 창작 스튜디오 6개로 구성돼 있어요.”
음악과 미술이 공존하는 공간, 흔치 않은 콘셉트인데요.
“요즘은 융합이 트렌드예요. 그러한 차원에서 미술과 음악이 공존하도록 구상했고, 음악의 경우도 2층에 마련된 8개의 크고 작은 연습실을 통해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100석 규모의 아트홀을 마련했습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죠. 3층에 마련된 6개의 창작 스튜디오 작업실에서 작가들이 1년간 준비한 결실들을 일반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231.4㎡ 규모의 갤러리입니다. 1층 카페에도 벽면을 신진 작가들에게 전시 공간으로 내어주고 있는데, 카페에 오는 손님들이 미술작품에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지속 가능한 예술 후원의 선순환을 꿈꾸다
방배동 유중아트센터는 예술의전당과 비교적 근접한 거리에 있으면서 주택가, 오피스들과도 접해 있다. 자연 1층 카페 드 유중 손님 가운데는 동네 주민, 직장인 등이 많다. 문화생활에 할애할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들에게는 점심시간 후 차 한 잔 하러 들른 편안한 카페가 갤러리 혹은 콘서트홀이 되기도 한다. 정 이사장은 카페를 통해 문화예술에 대해 일반인들이 느끼는 높은 문턱을 낮추고자 했다.
재단의 설립 취지에 중요한 부분이 젊고 재능 있는 아티스트 발굴이라고 들었습니다.
“부모님 세대만 해도 살기 위해, 또 먹기 위해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요즘엔 자신이 좋아하고 또한 잘하는 일을 찾아서 직업으로 삼고, 프로페셔널이 되는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우리 주변의 젊고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과 음악을 열심히, 또한 즐기면서 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그 분야의 프로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결국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3층 창작 스튜디오를 작가들에게 무상으로 렌트한다고 들었는데, 입주 조건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현재 6명의 작가(김은영·김지혜·노신경·박상희·이경하·최성훈)가 입주해 있는데, 무상으로 렌트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입니다. 현재 여섯 분이 유중창작스튜디오 1기가 되는 셈이죠. 입주 작가 선정은 물론 까다롭습니다. 제 입김은 전혀 작용하지 않았고요.(웃음) 공개 모집과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거쳐 심사는 철저히 외부 평가자와 큐레이터가 했습니다. 아트센터 개관 때 입주 작가 6인의 특별전을 마련하기도 했죠.”
2층 아트홀 뮤직 스튜디오도 음악가들에게 무상 대여가 되는 겁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현재 무상 대여 지원은 미술작가들만 대상으로 하고 기한은 1년이에요. 뮤직 스튜디오는 연습실이 필요할 경우 개인과 챔버 오케스트라까지 유상 대여를 원칙으로 합니다. 방음시설을 갖춘 스튜디오 안에는 그랜드 혹은 업라이트 피아노가 구비돼 있어요. 갤러리나 음악 홀은 명분이 있다면 공간 지원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기획해서 진행한 전시회나 음악회 가운데 관객들 호응이 가장 좋았던 것이 있다면요.
“유중갤러리 상반기 기획전인 ‘내방’전인데, 일상생활을 담은 작품을 통해 삶을 꾸려나가는 다양한 방식과 관점, 삶의 미감을 두루 조망해보려는 취지로 기획했던 것이죠.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소한 사물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유중아트센터가 준비 중인 프로젝트 가운데 2012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유중 라이징스타 오디션과 유중 콩쿠르를 통한 신예 아티스트 발굴과 육성입니다. 상반기 저희 센터에는 자체 콩쿠르가 없어 언론사 등의 콩쿠르를 유치해서 진행하고 있는데, 하반기에는 유중의 자체 콩쿠르를 개최할 예정이에요. 유중 라이징스타 오디션은 참신하고 능력 있는 숨은 보배를 찾기 위한 오디션으로 어린 친구들부터 대학원생까지 참여할 수 있어요. 선발된 사람은 유중아트센터가 데뷔 독주회를 마련해 줄 예정이고요. 현재 지하에 661.2㎡ 규모의 발레 스튜디오를 공사 중인데 하반기에 완공되면 미술과 음악에 이어 발레 등 무용까지 범위를 넓혀 모든 영역의 예술을 아우르는 아트센터로 거듭나려고 합니다. 내년 하반기 즈음에는 500석 규모의 유중그랜드홀을 완공해 서초 강남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더욱 큰 기여를 할 예정입니다.”
유중아트센터의 미래 비전은 무엇인가요.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로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을 직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환경 때문에 적성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성공한다면 그들이 다시 후배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지원과 자립 가능한 후원의 선순환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컬렉팅하는 아이템이나 취미가 있다면요. 음악과 미술 분야도 조예가 깊으실 것 같은데요.
“음악과 미술을 좋아합니다만 조예가 깊진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운 피아노와 색소폰은 독주 정도 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최고경영자 문화예술과정에 다니고 있는데, 명색이 아트센터 이사장인데 연주가들의 고충은 알아야 할 것 같아 최근에 현악기인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노래는 못합니다.(웃음) 개인적으로는 신진 작가 작품들을 주로 컬렉팅합니다. 중견 원로 작가의 작품 한 점 가격이면 신진 작가 10명의 작품을 소장하고,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중견 원로 작가들의 작품은 제가 아니어도 알아봐주고 구입할 분들이 많지만, 신진 작가의 경우는 저부터라도 최대한 발굴하고 작품도 소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중아트센터가 어떤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원하십니까.
“사람들이 보통 문화예술이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껴요. 이는 자주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중아트센터가 일반인들로 하여금 미술과 음악을 자주 접함으로써 부담을 줄여주는 가교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예술의전당 같은 문화공간으로 성장시키고 싶고요.”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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