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less Obilge] 그림으로 소통하고 그림으로 나누는 삶

재불화가 한미키

한국에서 화가로서 산 게 20년, 프랑스에서 그렇게 산 게 20년이다. 앞선 20년이 남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던 시간이라면, 이후 20년은 붓을 들고 세상과 소통하는 ‘진짜’ 화가로 살았던 시간이다. 2006년과 2009년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Grand Palais Le Salon)에서 수상하며 화가로서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낙관(落款)했던 화가 한미키. 그의 삶에 그림만큼이나 강렬한 화두가 있었으니 바로 ‘나눔’이다. 손에 쥐고 갈 것은 없으나 남겨놓고 갈 것은 많아 행복하다는 한미키 화백을 만났다.

예순 중반의 노(老) 화가는 소녀 같은 얼굴로 나타났다. 한눈에도 미용실 ‘전문가’의 손길이 스쳤음을 눈치 챌 수 있는 단정하고 우아한 머리 스타일에 색감 고운 스커트, 그 아래 매치한 앵클부츠. 처음 만나는 이와의 인터뷰에 그가 들인 정성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칭찬보다 더한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은 없는 법. 일단은 수상 축하 인사말부터 전했다.

인터뷰 바로 전날 재불화가 한미키(Han Miky·한국명 한미경) 화백은 보건복지부가 선정한 제1회 행복나눔인 중 한 명으로 선정돼 김태욱·채시라 부부, 최수종, 박경림 등과 함께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화백은 재능 봉사와 함께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동안 고국에서 간간이 마련한 전시회 수익금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아낌없이 기부한 공로를 인정받아 행복나눔인으로 선정됐다.

“머릿속에 그릴 것이 너무 많아 걱정이에요. 나이가 드니까 그게 슬픈 거야. 아직까지 0.01%도 안 나왔거든. 피카소는 시대가 달라 그림으로 사회 봉사를 못했는데, 내 (그림의) 나머지는 국가에서 알아서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어느 책에서 ‘인생의 보물 1호는 국가에 바치는 것이 맞다’고 나와 있더라고. 처음에는 나도 잘 안 받아들여졌는데 점점 그래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쏠리고 있다니까. 하하하.”



운명처럼 미술을 만나기까지

예술가의 작품이야말로 지도에 선(線) 나부랭이로 그어놓은 국가의 영토를 뛰어넘는 진정한 ‘국력’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 안타까운 대목에 이를 때면 어김없이 의자에서 일어서 마치 일인극(一人劇)을 하듯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내며 열변을 토하는 노 화백의 열정이 창문 너머 찬바람을 녹일 듯 뜨겁기만 했다.

한 화백이 프랑스로 적을 옮긴 것은 20여 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반대에 주저앉았던 것이 20년이 되더란다. 창가 가득 햇살이 드는 아틀리에에서 새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작가 한미경의 꿈은 그렇게나 오래, 너무 소중해 한 번도 꺼내 쓰지 않은 외제 물감처럼 시간과 함께 굳어가고 있었단다.

“세 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죠. 유치원 다닐 때 칠판에 노란 분필로 병아리를 그렸는데 그렇게 잘 그렸었대. 학창시절에도 다른 수업은 다 싫어도 미술시간은 몸이 아픈 날도 빠지지 않고 갔었거든. 그렇게 그림을 좋아했지만 고2 때까진 의대를 준비하는 이과생이었다니까.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미대에 간다고 고집을 부리고 경희대 미대를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 그림만 그리고 싶었는데 남녀공학이라 남학생들이 날 가만 놔두지 않더라고.(웃음) 그래서 숙명여대로 편입을 했어요. 그때 톱으로 들어갔는데, 학교 갔더니 또 배울 게 없더라고.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하고 아틀리에를 찾아다녔죠.”

부모님은 그 시절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분들이었고, 자연 둘째 딸인 그에게도 기대가 컸다. 미대를 진학하며 겪었던 한 차례 진통이 잦아들 즈음, 그 딸은 또다시 부모가 원치 않았던 도전을 시도했다. 미술교육교사 자격증을 따 두었던 딸에게 어머니는 미술교사로서의 조용한 삶을 권했지만, 그는 당시 구상화로 유명했던 박득순 화백 아틀리에에서 살다시피 하며 그림과 싸웠다. 설상가상으로 가세까지 기울었던 터였지만, 딸의 고집에 어머니는 결혼 폐물을 하나하나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대화의 시계가 그 시절에서 멈추자 노 화백은 눈물을 보였다.

“안된다고 반대하시던 어머니가 처음엔 반지, 그 다음엔 목걸이, 줄줄이 팔아 아틀리에 수업료를 대셨는데, 어려웠어도 프랑스제 물감만 사주셨어요. 어머니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박득순 교수께 구상의 기본을 탄탄히 배운 후에는 정말로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또 말리시는 거예요. 밑에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학교 보내야 한다면서. 어쩔 수 없었죠. 유학 대신 미술학원을 열었는데, 강남에서 할 때는 50명 정원에 늘 대기자가 있을 정도로 잘 됐어요. 오전에는 가난한 가정 아이들한테 무료로 그림을 가르치고 오후엔 학원에서 수강생들을 가르쳤죠.”



조용한 아침의 나라 출신 작가의 프랑스 입성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통장 잔고는 늘어갔지만,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허해져 가기만 했다. 부잣집 아이들을 가르칠수록 가난한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요즘처럼 재능 기부 시스템이 자리를 잡지 못했던 시절 그는 산동네를 가가호호 방문하며 “그림 배울 아이 없냐”고 물어보고 다녔다. 무턱대고 문을 두드리는 그에게 어떤 이는 “학원 광고하러 왔냐”며 문전박대를 하기도 했다. 한 화백이 지금도 끈을 놓을 수 없는 것 한 가지. 저소득층 아이들, 장애우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프랑스로 가기 전 3년 반 동안은 작정하고 유학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는지 학원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아예 학원 전기세고 뭐고 다 못 내서 감옥에나 가면 그림 하나는 실컷 그리겠다 싶었는데, 그것도 내 마음대로 되진 않더라고요.(웃음)”

꾹꾹 참았던 꿈의 날개를 펼치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미룰 것도 없었던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프랑스로 날아가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미술전문학교 수업을 청강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이 44세. 한 교수 밑에서 졸업장 하나 따는 데 목숨 걸기보다는 각 대학에서 듣고 싶은 수업을 청강하며 다양한 화풍과 교수를 접했다. 특히 데생의 기본기를 익히는 데 집중했다. 미국, 독일, 인도, 멕시코까지 원정을 다니며 1년에 100개 이상의 전시회를 섭렵하며 세계 미술 시장을 읽었다. 프랑스 미술계의 심장, 파리로 입성하기 전 3년 반을 재야(?)에서 꼬박 보내고 났더니 비로소 반응이 왔다.

“그즈음 프랑스 화가 친구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술대전이 있다는 얘기를 하기에 접수하러 갔어요. 40호짜리 그림 4개를 출품하라는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죠. 안하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살짝 약을 올리는 거예요. 괜한 국가적 자존심이 발동하더라고. 집에 와서 있는 물건들 모아놓고 급하게 그리는 바람에 물감도 다 마르지 않은 상태로 출품을 했어요. 반추상 정물화였는데 그 작품이 도지사상을 수상했죠. 프랑스 닐에 살 때였는데 그 일을 계기로 프랑스 각 시에서 초청이 물밀 듯이 들어왔어요. 나를 찾아온 신문기자들이 파리로 가라고 하기에 파리로 옮겨가게 됐죠.”

프랑스로 적을 옮긴 후 쇄도하는 전시회 요청과 언론 인터뷰에 그는 어느새 프랑스 미술계의 기린아로 떠올랐고, 사람들은 그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세계 최고의 작가’로 불렀다. 보수적인 프랑스 미술계가 그를 흔쾌히 반겼던 것은 한 화백의 탄탄한 기본기 때문. 그는 지금도 프랑스 미술계에서 데시나트리스(dessinatrice·데생 전문가)로 불린다.

이어지는 언론의 극찬 속에 한 화백은 2006년 28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10대 전시회 중 하나인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에서 은상을 거머쥐었다. 이어 2008년에는 ‘살롱 도 톰’에서 최고상(회화), 2009년에는 ‘그랑팔레 르 살롱전’에서 금상(데생)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루브르 박물관 단독 전시회를 연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선 색깔과 동선이 입체파와 인상주의파의 혼합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다. 파랑, 노랑, 빨강이 퍼즐처럼 섞여 있는 작품 속에는 꽃과 누드가 서로 뒤엉켜 있고, 복잡한 사물들이 터져 나온다. 대기의 숨결로 보이는 역동성 있는 주제를 생각한 것이다. 탄탄한 구조, 선의 힘, 색깔과 형태의 풍부함에 시선을 빼앗긴다.” 프랑스 언론 기사에서 발췌

아직도 남은 99.9%의 창작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람의 몸이에요. 이 그림 한 번 보세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내 데생은 반추상이라도 나는 꼭 실제 모델을 불러서 그림을 그려요. 누드인데도 따뜻하죠?”

평면에 그린 그림이지만 입체감이 느껴지는 그림 속에는 남녀의 사랑도 있고, 꿈도 있는 듯했다. 또한 그 속에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인간애가 녹아 있다. 3년마다 주제를 바꾼다는 그는 요즘 사람의 얼굴에 천착해 있다고 했다. 얘기 중에 손가락을 가리키는 쪽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남성의 얼굴을 표현한 강렬한 그림 한 점.

“누군지 아시겠어요. 헝가리 철학자 조르주 루카치예요. 너무 멋지죠. 난 이 사람의 철학이 너무 좋아요. 정말 언젠가는 꼭 만나서 이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요. 함께 전시회를 마련해서 수익금을 기부할 수 있다면 더 좋겠고요. 기자님이 다리 한 번 놔줄 수 없으려나.(웃음)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그릴 작정이에요. 세계적인 인물들의 얼굴을 그리고 싶은데, 반 총장은 만날 수 있을까요. 하하하.”

프랑스 미술계에서의 유명세를 탄 후 그는 지난 2007년 고국 초대전을 마련했었다. 2009년에는 ‘사랑의 열매’와 함께 이웃사랑 기금 마련을 위한 특별 초대전도 열었다. 전시회를 통해 많은 작품이 팔렸고, 지금은 한국에 그를 기다리는 컬렉터들도 꽤 많다. 세계적 불경기 속에 프랑스에서도 유독 그의 작품은 잘 팔렸다. 고국에서의 전시회 수익금을 흔쾌히 내놓는 한 화백은 그럴 수 있어서, 그런 재능이 있어서 그저 행복하다. 최근에는 전시회 준비로 한국에 짬짬이 들어올 때마다 내곡동 다니엘 복지원도 찾는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체력에 한숨도 난다.

“복지원에서 데생을 가르치는데 미술 치료가 참 좋은 것 같아요. 워낙에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요. 아이들 잠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요? 장점을 뽑아내서 칭찬해 주면 두 배, 세 배로 발전한다니까요. 미술 교육을 전공한 덕에 프랑스에 가서도 교수법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더라고. 한국과 프랑스 미술 교육의 좋은 점만 뽑아서 아이들한테 전해주고 싶어요.”

아직도 0.01%밖에 뽑아내지 못했다는 그는 99.9%를 마저 뽑아내야 한다는 숙제 앞에서 자꾸만 조급해진다. 밤을 새고 그림을 그려도 배고픈 줄 몰랐던 때도 있었건만 요즘은 6시간만 논스톱으로 그림을 그려도 피로해지니 말이다. 2시간 반이 넘게 이어진 대화에 지친 기색 하나 없는 노 화백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꿈을 물었다.

“예술가와 예술품은 결국 국가가 관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제가 정부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하는 얘기인데, 예술이야말로 국제화 시대의 국력이잖아요. 나이 들어서 자기 자랑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죽고 나면 누가 얘기해 줄 거야.(웃음) 외국에 알려진 나를 활용하면 그것도 국력이 될 것 아니겠어요. 죽을 때 다 싸갈 것도 아닌데, 나중에 남은 내 그림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주면 좋겠다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나는 공기 좋은 곳 성당 옆 작은 아틀리에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그림이나 실컷 그리겠지. 정말이지 실컷 그림만 그리는 거, 그게 내 남은 소원이에요.”

한 화백은 오는 6~7월 즈음 나눔을 위한 전시회를 위해 다시 서울을 찾을 예정이다. 그림만큼이나 강렬한 그의 향기에 빠져본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미키
숙명여대 미대 졸업
2006년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 은상 수상
2008년 살롱 도 톰 최고상 수상
2009년 그랑팔레 르 살롱전 금상 수상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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