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 아일랜드 Kangaroo Island
호주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제주도의 1.5배 크기지만 인구는 5000명도 안 된다. 5만 명도 아닌 5000명이 안 되다니. 하긴, 호주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35배지만 인구는 2000만 명이 갓 넘는다. 그러니 이 태곳적 땅은, 어디나 사람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원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철저한 호주 사람들의 환경보호 정책이 더해져 호주의 속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캥거루 아일랜드를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호주의 남쪽 도시 애들레이드(Adelaide). 중부 호주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이 도시는 마침 세 개의 축제가 겹쳐 호텔마다 빈방을 찾기 어려웠다. 멜버른(Melbourne)에서 밤새도록 버스로 달려 새벽같이 떨어져 비몽사몽 상태에서 겨우 호텔방을 구하고 물이라도 사기 위해 동네 가게를 찾았는데, 아무리 축제로 관광객이 붐벼도 휴일이라 문 여는 가게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찾은 한인 가게도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호텔에서 사는 건데, 먹을 것도 좀 사고 동네 구경도 좀 하겠다고 길을 나선 것이 어느새 1시간 가까이 됐다. 남호주의 주도이며 인구도 100만 명이 넘는다는 애들레이드의 휴일 아침은 오가는 사람 하나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다 겨우 문을 연 가게를 발견했는데,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 슈퍼였다. 고국에서도 해외에서도 개미처럼 일한다는 길 건너 한인 가게도 문을 닫았는데 중국 슈퍼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니, 뭔가 상징적인 사건처럼 느껴졌다. 한인 가게는 교회를 가기 위해 문을 닫은 것인지도 모른다. 해외의 한인 사회는 대부분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시드니(Sydney)에서 시작한 호주 여행이 멜버른을 거쳐 이곳 애들레이드까지 이어진 것은 이곳의 축제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애들레이드는 호주의 속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캥거루 아일랜드를 가기 위한 경유지였다. 캥거루를 닮아 ‘캥거루 아일랜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섬. 제주도의 1.5배 면적, 호주에서 세 번째로 큰 캥거루 아일랜드는 애들레이드에서 배로 1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나름 커다란 유람선 갑판에서 신선한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몰아친 바닷바람에 머리 위에 걸쳐 놓았던 선글라스가 날아가 버렸다. 역시 호주는 바람도 원시적(?)이다.
캥거루 아일랜드의 선착장은 작고 고즈넉한 섬마을 분위기가 났다. 제주도보다 훨씬 크지만 인구는 전부 합해야 5000명도 안 된다니, 그럴 수밖에. 마을처럼 아담한 호텔에 짐을 풀고 동네 한 바퀴 구경에 나섰는데, 사람보다 먼저 자그마한 펭귄이 낯선 이방인을 반긴다. 50cm가 될까 말까 한 키에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앙증맞은 이 펭귄들은 동물원이 아니라 이 마을 근처 수풀에서 산단다.
며칠 동안 수백 km를 이동하면서 먹이사냥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쉬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도로에는 ‘펭귄 조심’이라 적힌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다. 지리산에서 ‘곰 조심’ 표지판도 보고, 인도에서 ‘낙타 조심’ 표지판도 봤지만, ‘펭귄 조심’ 표지판은 태어나 처음이다. 사람과 펭귄의 평화로운 공존. 호주 사람들의 유별난 환경보호 정책도 정책이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듯하다.
캥거루와 코알라, 펭귄과 바다표범이 사람과 함께 사는 곳
펭귄과 사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마을의 공기가 맑고 깨끗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니 이곳의 일몰도 아름다울 수밖에. 저녁을 먹고 호텔 앞마당에 나와 그림 같은 일몰을 보고 나니, 가로등 같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북인도의 고원지대인 라다크 이후로 이렇듯 짙은 달 그림자는 처음이다. 정말 바로 머리 위에 가로등이라도 켜진 듯, 내 뒤로 검은색 그림자가 또렷이 드리워졌다. 휘영청 밝은 달빛 탓에 별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믐이면 별들이 쏟아지겠구나’ 상상할 뿐이었다.
본격적인 캥거루 아일랜드 탐험은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됐다. 우선 도착한 곳은 ‘멋진 바위들(Remarkable Rocks)’. 딱, 이름 그대로였다. 어쩜 기암괴석이 이리도 예술적으로 자리 잡고 있을까? 이건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은 설치예술 작품들 같았다. 바다코끼리 같은 바위를 가리키며 “영국 찰스 황태자의 코와 꼭 닮았다”며 웃음짓는 가이드 아저씨의 말에 이곳이 영연방국가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작품’은 다음에 도착한 ‘제독 아치(Admiral Arch)’에서도 이어졌다. 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온 판 모양 바위 중간에 아치 모양의 구멍이 뚫린 것도 예술인데, 그 밑에는 바다사자 수십 마리가 한가롭게 쉬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는 ‘바다사자 전용 화장실’도 있는 모양이다. 옛날 시골 축사에서 나는 소똥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바다사자 구경은 ‘바다사자 해변(Seal Bay)’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수백 마리 바다사자가 바로 눈 앞 해변에서 늘어져 누워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놈들은 무리 지어 다니는 관광객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 가끔 일어나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 또 잔다. 어린 놈 하나는 제 엄마를 못 찾았는지 큰 놈 사이를 우왕좌왕 쫓아 다니고, 어떤 놈은 누워 자는 모습이 꼭 큰 바위 같다. 수백 kg은 족히 나갈 듯. 완전 ‘동물의 왕국’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중간에는 캥거루와 함께 호주의 상징 중 하나지만, 심심치 않게 길가로 튀어나오는 캥거루와는 달리 개체수가 적어 특별 보호를 받고 있는 코알라도 볼 수 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잎만 먹으며 하루 20시간 이상 잠을 잔다는 코알라는, 심지어 나무 하나를 정하면 웬만해서 다른 나무로 잘 옮겨가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언제 사랑을 하고, 언제 아이를 낳겠는가. 야간 버스에 부딪쳐 로드킬 당한 캥거루를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코알라를 보는 날은 운이 좋은 것이다.
캥거루와 코알라, 펭귄과 바다사자가 사람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제주도의 1.5배 되는 섬에 5000명의 사람들이 주인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더불어 주민으로 살아가는 곳. 캥거루 아일랜드의 밤은 다시 한 번 아름답게 깊어만 갔다.
Kangaroo Island info
How to Get There
인천국제공항에서 호주 제2의 도시 멜버른까지 대한항공 직항이 운행 중이다. 멜버른에서 애들레이드까지는 국내선을 이용해 1시간, 애들레이드에서 캥거루 아일랜드까지는 배로 1시간 가까이 걸린다.
Where to Stay
인구가 5000명도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이름난 관광지답게 아담하고 예쁜 호텔들이 여럿 있다. 이 중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호텔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치한 ‘서던 오션 로지(Southern Ocean Lodge)’. 이 밖에도 ‘캥거루 아일랜드 빌더니스 리조트(Kangaroo Island Wilderness Resort)’와 ‘캥거루 아일랜드 시프런트 리조트(Kangaroo Island Seafront Resort)’ 등도 평이 좋다.
Another Site
캥거루 아일랜드로 가는 길에 들를 수밖에 없는 멜버른과 애들레이드도 이름난 관광지다. 시드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호주의 문화 수도’ 멜버른은 도시뿐 아니라 근교의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비롯한 유명 관광지들이 있고, 남호주의 주도 애들레이드는 넓은 공원과 호주 원주민들의 삶과 예술을 볼 수 있는 박물관 등을 자랑한다.
글·사진 구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