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노리는 외국 투자, 한국으로 들어올 것”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협상’ 하면 생각나는 한국 사람은? 서희를 제외한다면 아마 이 사람일 것이다. 한국 경제에 큰 변화를 몰고 올 자유무역협정(FTA)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는? 그것도 이 사람일 것이다.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의 이야기다. 지난 1월 12일 외교통상부 별관에서 그를 만났다.

‘검투사’를 만난다. 세계 최고의 협상가들과 정면 승부를 해온 사람과 마주 앉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런데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 검투사,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옆방에서 커피믹스를 빌려와 손수 타주며 “아이고,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앉으세요” 하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백수가 된 소감이 어떠세요.

“이제 고작 열흘 정도 됐네요. 얼마 안 됐는데 다 잊어버렸어요. 미리 보내주신 질문지를 보면서도 내가 이런 걸 했나 싶고.(웃음)”

통상교섭본부장을 4년 5개월 하셨어요.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더라고요. 일 자체는 힘들었죠. 특히 디테일을 많이 챙겨야 했고. 상대편도 다양했죠. 바다 건너 상대편도 있고, 국내에는 국내대로 이해단체가 있고. 힘든 만큼 보람도 있었어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역시 2008년 촛불정국 때인가요.

“절체절명이었죠. 추가 협상을 하러 가서도 서울만 생각하면 가슴이 갑갑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힘들었어요. 미국 측도 어려워하더라고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있는데, 왜곡된 정보로 생긴 일이니까 ‘그건 한국이 국내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미국과 재협상을 하러 갈 때 비행기 안에서는 무슨 생각하셨습니까.

“그때 국내 정국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해도 먹히지가 않는, 임계를 이미 넘어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미국을 좀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과학만 꺼내서 괜찮다고 해봐야 이쪽에서 과학을 못 믿겠다는 데 어쩌겠느냐. 결국 우리 국민이 소비자인데, 한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한국 상황도 이해해라’라고 설득을 많이 했어요.”

“FTA, 일자리 창출·물가 조절 효과 있다”

한·미 FTA가 미국에 유리한 협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요.

“그렇게 보진 않아요. 우리 경제규모가 이미 세계의 주목을 받는 만큼 성장한 이상 개방은 할 수밖에 없고, 해야만 합니다. 같이 개방도를 높이자고 할 때, 미국은 이미 개방도가 높아서 우리가 내려야 할 장벽이 미국에 비해 많죠. 그런 전제조건에서 출발하면 오히려 협상 자체는 오밀조밀하게 했다고 많은 분들이 평가했죠.”

FTA가 양극화를 부채질한다는 논쟁도 있죠.

“그건 교역 차원에서 어떻게 하기보다는, 교역으로는 부가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국내의 분배 정책으로 해결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결국 재정과 세제가 될 텐데, 예산을 그늘진 쪽으로 풀어내고 세금은 많이 번 사람한테 많이 먹이고 그런 식이죠.”

교역으로 파이를 키우고, 국내 정책으로 파이를 나누자는 말씀이신가요.

“그거죠. 분배가 안 된다고 성장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겨우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는데, ‘이거면 성장은 됐고 분배로 가자’는 아니죠.”

FTA가 국내 투자 환경에 도움이 됩니까.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이 재력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투자 증대 효과는 분명히 있을 겁니다. 또 이 나라들이 우리 시장만 보지는 않습니다. 중국도 보고 동아시아 전체를 보죠. 그런데 한국이 계속 개방체제로 가겠다고 하고 FTA를 맺었다면 한국 시장에 안정성이 있다고 느끼고, 그럼 한국을 발판으로 아시아에 진출하려 할 겁니다. 미국과 EU 시장을 노리는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우리 시장과 기업들이 상품 이동은 물론이고 투자 이동에서 역할과 비중이 늘어날 거예요. 또 지금 중국 임금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우리 관세가 낮아지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유리해지게 돼요. 그럼 굳이 투자를 갖고 나갈 필요가 없으니까 중국에 가 있는 우리 기업의 투자가 국내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종훈 전 본부장은 2007년 8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약 4년 5개월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를 이끌며 한·미 FTA 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자리나 물가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투자는 곧 일자리와 연결되죠. FTA가 작동하면 투자 자유화로 인한 효과가 일자리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가는 수입이랑 관계가 있겠죠. 구제역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돈육 쪽에서는 어려워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돼지고기의 물가를 잡아야 했어요. 돈육 관세가 25%인데 그걸 할당관세로 내리면서라도 들여오면 물가를 잡을 수 있죠. 자유화를 통한 물가 조절 장치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한·중 FTA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해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제1교역국이고. 농업이 걱정이라는 건데 저는 기회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국은 식량 자급이 안 되는 나라입니다. 식량을 사서 국민에게 먹여야 해요. 또 소득 5만 달러를 넘는 사람이 5000만 명이 넘어 엄청난 구매력을 가졌는데 이들이 식품의 안전성, 좋은 품질을 찾기 시작했죠. 똑같이 씨 뿌려서 거둔 파란 채소로 경쟁해서는 안 되고 공정을 넣거나, 유기농, 독특한 브랜드를 섞는다면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에게 중국은 기회의 땅이죠.”

한·중 FTA 협상이 한·미 FTA보다 수월할까요.

“템플릿(template)이란 것이 있습니다. 각 나라가 생각하는 일종의 FTA 모델인데요. 미국과는 다르게 중국이 다른 나라하고 해온걸 보면 개방도나 깊이가 그렇게 높지 않다고 평가되더라고요. 개방도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우리가 협상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노력, 담력이 협상의 자질

여러 나라와 협상을 해보셨는데, 어느 나라가 가장 까다롭던가요.

“미국이죠.”

협상을 자주 하다 보면 상대의 행동이 허세인지 진심인지 보이십니까.

“라운드가 많이 지나가면 알 수 있어요.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이렇게 했을 때 내 반응, 상대 반응, 내 반응에 대한 상대 반응, 상대 반응에 대한 내 반응을 종합해서 보고 ‘이건 안 되겠다’, 또는 ‘이거는 여지가 있겠다’는 감을 잡죠.”

협상에 전략도 많이 들어가죠.

“처음에 기(氣) 싸움을 하다가 어느 정도 커먼 라운드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예스, 노, 노력해보자’라는 카테고리가 생겨요. 이 판단이 중요하죠.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준비가 많이 돼 있어야 해요. 내 입장과 상대편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생각해서 ‘로직 포인트’를 1번부터 쭉 적어놓죠. 그 카드가 많을수록 좋아요. 상대 얘기를 듣고 카드를 하나씩 꺼내는데, 누구 카드가 먼저 떨어지느냐의 시합이죠.”

처음 기 싸움은 어떤 식으로 하나요.

“허허실실같이 상대가 예상치 못한 쪽을 찔러서 당황하게 한다거나, 다섯 개만 챙기면 되는데 열 개를 내놓으라고 한다든지. 사실은 이쪽이 필요한데 짐짓 모른 척 하고 상대편이 절대 양보 못하는 저쪽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게 너무 과하면 신뢰를 잃어요. 상대도 ‘이 친구 괜히 그런다’는 거 다 알고요. 신뢰가 중요하죠. 상대편에게 신뢰를 잃으면 말을 풀어가기가 정말 힘들어요. 물론 전략상 전술을 쓸 수는 있지만, 거기에 무슨 술수가 들어가거나 속임수가 들어가거나 하면 곤란해져요.”
“FTA로 투자증대 효과는 분명히 있습니다. 동아시아를 노리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한국을 발판으로 진출하려 할 것입니다.”

협상가로서 중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

“노력과 담력이요. 이슈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상대편도 연구하는 사전준비에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아주 급한 판단을 해야 할 경우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생각해야 돼요. 상대의 공세에 섣불리 대답하면 패착이 되죠. 그냥 ‘잠깐 생각하게 브레이크하자’고 말할 수 있는데 막상 현장에선 그게 쉽진 않거든요. 너무 자주해도 권투할 때 클린치만 하는 셈이 되니 안 좋지만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합니다.”

2008년 4월 미국과 소고기 협상 도중 “귀국하겠다”며 협상장을 나오셨어요. 속으로 조마조마하진 않던가요.

“그런 말할 정도가 되면 갈 데까지 간 거예요. 조마조마하다고 생각하면 그 짓 못합니다. 그건 진짜 결단하고 해야죠.”

정부 훈령이나 가이드라인 때문에 협상이 힘들진 않습니까.

“정부에서 초기에는 큰 라인만 줍니다. 그러다가 쟁점이 좁아지면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협상하는 사람이 현장에서 판단할 수 있는 재량이 있어야 진전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훈령은 여유 있게 주는 편입니다.”

지난해 말 의회가 통상조약 절차에 권한을 갖는 통상절차법이 통과됐는데요.

“사실 통상협정에 절차법을 갖고 있는 나라는 미국 외에는 거의 없어요. 미국은 독립시기 영국 식민정부의 간섭을 줄이기 위한 역사적 배경으로 만든 거고요. 우리와는 많이 달라요. 현장에서는 협상 전략 노출이 가장 큰 부담이죠. 국회에 보고를 하려면 많은 정보를 담아야 해요. 그 정보가 공개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국회에서 아는 것은 좋지만 취득한 비밀에 대해서는 엄수해 달라는 게 꼭 있어야 해요. 실제로 논의 과정에서 국회가 그 부분을 많이 수용했습니다.”

패러글라이딩 즐기는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

얼마나 오래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어보셨나요.

“보통 하루 종일이죠. 사흘 밤낮 없이 협상한 적도 있고요. 미국이나 EU는 시차가 커서 힘들어요. 우리가 그쪽으로 가든지 그쪽이 오거나 하면, 우리 형편 때문에 낮밤이 바뀌거나 저쪽 형편 때문에 바뀌거든요. 시차를 맞춰서 밤에 한국에 보고하고 나면 상대가 다시 만나자고 하니까요. 식사도 보통 물만 먹거나 대충 때우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워낙 골몰해서 먹을 생각도 별로 없죠.”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주로 등산을 많이 합니다. 스트레스는 패러글라이딩으로 많이 해소하고요. 윈드서핑이나 카이트보딩도 좋아해요. 패러글라이딩은 한 지 10년 넘었어요. 1998년 스위스 제네바 공사 시절에 배웠으니까요.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걷는데 저 사람은 훨훨 날더라고요. ‘저 사람이 하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오래 타서 지금은 앞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2인승 패러글라이딩 자격증도 있어요. 지난 여름에 하고 못 했는데, 이번 주말에 춥지 않으면 가려고요.”

김 전 본부장은 패러글라이딩, 카이트보딩, 오프로드 바이크 라이딩 등을 즐기는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시네요.

“익스트림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에요. 무모한 정도는 아니지만 겁은 별로 없어요. 그저 남들이 하는 걸 보고 좋겠다 싶으면 과감히 도전하는 편이에요. 한 번 시작하면 제 스스로 ‘됐다’ 싶을 정도까지 하고요.”

언론에서는 치밀함과 꼼꼼함이 있다고 하고, 부하 직원들에게는 ‘버럭김’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던데요. 실제 성격은 어떻습니까.

“주위에선 성격이 급하다고 많이 해요. 또 저 혼자 생각해서 맞다 싶으면 가고 남한테 잘 물어보질 않아요. 길 가다가도 길을 잘 안 물어봐요. 혼자 어떻게든 찾으려고 하죠.”

‘검투사’라는 별명은 맘에 드십니까.

“한·미 FTA 협상 때 웬디 커틀러(Wendy Cutler) 미국 측 수석대표한테 제가 ‘우리는 전생에 검투사였을 것’이라고 말해서 생긴 별명이거든요. 사실 협상은 죽기 살기로 하지만 결과는 둘 다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한 건데, 서로 살자는 말은 빠지고 죽기 살기로 한다는 것만 나와서…. 뭐 괜찮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외교통상부에 들어올 때부터 통상 전문가를 생각하셨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경제외교를 생각한 건 아마 1981년 아프리카 근무 때인 것 같아요. 최빈국에 있으면서 그곳 주민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모습을 보고 나라의 부가가치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경제외교를 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다가 10년 뒤에 미국 참사관을 하면서 기회가 온 거죠.”

FTA처럼 유명한 것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협상도 많을 텐데,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셨습니까.

“우리의 교역규모가 커지다 보니 크고 작은 이슈가 매일 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해결되는 게 많죠. 대표적인 게 덤핑과 반덤핑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기업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거든요. 덩치가 큰 건 수백억 원짜리도 있고요. 그래서 문제를 잘 해결하고 나면 기업한테서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렇게 잊지 않고 고마워해주실 때 보람을 많이 느꼈습니다. 퇴임하면서 사무실 정리하다 보니 감사패가 족히 두 박스가 나오더군요.”

은퇴하신 셈인데, 노후 준비는 좀 해두셨습니까.

“없어요. 집 한 채 외에는 별로 벌어 놓은 것도 없고요. 연금 신청했어요. 37년 했으니까 먹고 사는 데야 문제는 없겠죠.”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해 두신 게 있나요.

“관둔 지 이제 열흘 됐으니까. 좀 더 생각해 봐야죠. 제 능력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잖아요.‘매국노’라는 사람도 있고, 큰일을 책임 있게 했다는 평가도 있을 수 있고요. 만약 어떤 분야라도 아직 제 능력을 쓸 데가 있다고 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정치계에서 러브콜이 있었을 법도 한데요.

“뭐, 요새 워낙 당내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그럴 상황도 아닐 테고. 글쎄요. 저같이 ‘순진’한 사람이 정치할 수 있을까요.(웃음)”

“스트레스는 패러글라이딩으로 많이 해소하고, 윈드서핑이나 카이트보딩도 좋아해요. 남들이 하는 걸 보고 좋겠다 싶으면 과감히 도전하는 편이에요. 한 번 시작하면 제 스스로 ‘됐다’싶을 정도까지 하고요.”

글 함승민 기자 hamquixote@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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