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식탁 위의 예술 생활도자, 그 황홀함에 인생을 걸다

이윤신 복합문화갤러리 이도 대표


지난해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한 김치 다큐멘터리에 요리만큼 주목받은 게 있는데, 바로 그릇이다. 방송에서 소개된 백자와 청자 등은 20여 년간 생활자기를 만들어온 도예가 이윤신의 작품이다.

하루 24시간을 생활자기만 생각한다는 이윤신 대표를 서울 가회동 이도(YIDO) 갤러리에서 만났다.


지난해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는 한국음식기행 다큐멘터리인 <김치 연대기>(kimchi chronicles)를 방영했다. 총 13부작의 <김치 연대기>는 방송뿐 아니라 공식 서적으로 출간돼 관심을 일으키기도 했다.

방송이 나간 후 한국 음식과 함께 새롭게 조명받은 게 음식을 담아낸 자기였다. 동양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기는 음식의 품격을 높일 뿐 아니라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품격 있는 식탁문화를 보여주며 아트 인 리빙(art in living)의 진가를 전파한 자기가 바로 도예가 이윤신의 작품이다.

1인 공방에서 직원 50여 명 둔 회사로 성장

20여 년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생활도자기를 만들어온 도예가이자 사업가 이윤신 대표를 만난 곳은 가회동 이도갤러리였다. 3년 전 문을 연 이도갤러리는 이 대표가 현대 도예작품을 중심으로 생활 속 미술의 아름다움과 수공예적 가치를 지향하는 다양한 도예 아이템을 소개하고자 마련한 복합문화 공간이다. 이도갤러리는 두 개의 갤러리와 판매 공간, 아카데미로 구성됐다.

이도갤러리를 찾던 날은 마침 아카데미를 수료한 학생들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지하 1층 매장에서 만난 이 대표는 해마다 아카데미 수료생들을 위해 전시회를 마련한다고 했다.

“지금은 갤러리도 문을 열고, 신세계 백화점 등에 4개의 매장을 갖고 있지만 초기에는 참 초라했어요. 1인 공방으로 출발했으니까요. 지금은 홍보담당자도 있고, 디자인실도 따로 있을 정도예요.”

정확히 21년 전 1인 공방으로 시작해 지금은 직원만 50여 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직접 디자인을 하고 샘플을 만든다. 규모가 커졌지만 추구하는 콘셉트는 21년 전에 비해 변한 게 없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그도 생활도자만 고집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처럼 그도 그 시절에는 흙을 비롯해 금속, 패브릭 등으로 다양한 조형작업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작가라면 으레 그런 조형작업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어떤 대학생이 그 시기에 평생의 업을 정할 수 있을까. 그도 그랬다. 20대는 멋모르고, 그저 좋아서 다양한 작업을 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교토시립예술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유학 시절은 그에게 생활도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일본은 작업 환경 등 여러 면에서 한국보다 좋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도예 작품과 도예가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였다. 도예가를 ‘도공’ 정도로 생각하던 한국인과 달리 일본인들에게 도예가는 경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때 생각했죠. 일본의 도예가들처럼 위상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결국 흙으로 조각가들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생활자기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물론 다른 작업으로 승부를 거는 도예가들도 많지만, 제 경우에는 생활자기에 평생을 걸기로 한 거죠.”

전통에 현대적인 기술과 디자인 접목

4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안양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생활자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았다. 유학까지 다녀와서 도공들이나 만드는 생활자기를 하겠다니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그럴수록 그는 생활자기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걸 느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주, 이천 등에 가면 전통을 계승하며 자기를 빚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들만의 역할이 있고,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그 같은 사람의 역할은 또 다를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과는 거리를 뒀다. 기술도 현대적인 기술을 동원했다. 장작 가마와 함께 전기 가마, 가스 가마를 썼고 무엇보다 디자인에서 다른 면을 보여주려 힘썼다.

자신도 있었다. 자신의 감각과 센스라면 충분히 새로운 영역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유럽에는 마이센부터 로열 코펜하겐 등 작품으로 평가받는 생활자기가 적지 않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만든 한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도자의 영역이 없다. 작품, 아니면 요리용 그릇, 이 두 가지로 확연히 나뉜다. 그는 그런 명품 생활도자를 만들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만들면 된다’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안양에 작업실을 연 후 그는 거의 매년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백자 ‘온유’, 옥빛 청자 ‘청연’, 움푹 파인 굴 모양 그릇 등 각양각색의 그릇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겉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청연’은 1992년 첫 전시에 발표한 건데,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20년 넘게 팔리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현재 그가 보유하고 있는 것만 수백 가지에 이른다.

오랫동안 작업을 하다 보니 마니아층도 두텁다. 어머니에서 딸, 며느리로 대물림해서 쓰는 이들도 적지 않다.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기존 것은 주변에 선물하고, 새 그릇을 쓰는 이들도 있다. 최근에는 미국 등 해외에서도 이름을 얻으면서 이도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도 부쩍 늘었다.

“인터뷰 직전에 미국에 있는 친구가 카카오톡을 보내왔어요. 아는 친구가 일본 잡지에 난 기사를 봤다며 한국에 가면 저희 그릇을 꼭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예요. 제가 친구인 줄도 모르고 말이죠. 이런 얘기를 들으면 해외에서도 우리 생활자기가 통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해요.”




일본에서 도예가는 경외의 대상이다. 이를 본 이윤신 대표는 결국 도예로 조각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길은 생활자기뿐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의 로열 코펜하겐을 꿈꾸며

외국에서도 이도의 생활자기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비정형화된 디자인 덕이 크다. 이도의 생활자기는 형태가 딱 떨어지는 게 없다. 초기부터 완성도는 높으나 미완의 형태를 추구해온 이 대표의 디자인 철학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생활도자는 음식을 담아서 식탁에 놓였을 때 제값을 한다고 봐요. 식탁 위에서 빛나는 생활도자가 정말 아름다운 거죠. 상차림이 그래서 중요해요. 개인적으로는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차림을 좋아하는데, 일상적인 식사라도 밥그릇, 국그릇에서 재미를 주는 거죠. 식사를 하면서 그릇 하나 가지고 다양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거든요. 심플한 그릇을 배치하더라도 주 요리는 작품(masterpiece)에 담아 포인트를 주는 거죠.”
“생활도자는 음식을 담아서 식탁에 놓였을 때 제값을 한다고 봐요. 식탁 위에서 빛나는 생활도자가 정말 아름다운 거죠. 상차림이 그래서 중요해요.”

얼마 전 그는 딸 내외에게 공방의 운영을 맡겼다. 이도가 100년, 200년 대물림하는 공방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유럽의 마이센이나 로열 코펜하겐 등은 산업도자기가 일반화된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핸드메이드 제품의 장점이 바로 그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가질 수 없는 일종의 아우라,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 전달되는 인간적인 온기. 점점 산업화되고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따스함을 전할 수 있다는 건 핸드메이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한국에서 생활도자의 저변을 넓혔으니까 이제는 도자의 세계화를 준비해야죠. 세계적인 도자기는 핸드메이드 제품이 돼야 하거든요. 그 총대를 제가 메려고요. 저만큼 생활자기를 고민하고 24시간 목매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있는 거죠.”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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