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고려인 2세 장학사업에 여생의 꿈을 걸다

김창송 최재형장학회 회장


43년간 무역업으로 지구 40바퀴를 돌았던 노장의 사업가가 우리 역사 속에 숨은 인물 한 명을 발견했다.

그 주인공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배후에서 지원했던 최재형.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들의‘대부’였던 최재형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최재형장학회’를 출범시킨 김창송 성원교역(주) 회장을 만났다.

연해주와 시베리아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에 비하면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최재형’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을 검색했을 때 관련된 서적이 두어 권에 그칠 정도로, 역사 속 숨은 영웅 가운데 한 명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사정이 이러하니 ‘최재형장학회’가 출범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생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장학재단 설립자의 이름이나 호(號)를 붙이는 여느 장학회와 다르다. 왜, 최재형인가.

“최재형 선생은 선대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이 시대 기업인들이 롤모델로 삼아야 할 만큼 애국정신이 투철한 최고경영자(CEO)라고 할 수 있어요. 나라를 위해 금전은 물론 목숨까지 바쳤지요.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금전적으로 지원하신 최 선생이 일본군에 체포돼 총살당했을 때 연해주 고려인 가정에서는 모두 조기를 달 정도였다고 해요. 그분의 정신을 기리고 고려인 2세 인재 양성을 위해 장학회를 만들게 됐지요.”



고려인 기업인 최재형을 롤모델로

김창송 성원교역 회장은 1968년에 화공약품을 수입하던 성원약품상사를 창업한 후 1980년대 초반에는 세계적 진공펌프 제작사인 영국의 에드워스와 합작회사를 설립, 우리나라 반도체 사업의 초창기를 주도했던 기업인 가운데 한 명이다. 사업가 이력 43년에 항공사에 쌓인 마일리지만도 지구 네 바퀴를 돌 정도. 2008년도에는 외국의 첨단기술 도입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는 반도체 관련 사업체인 성원교역과 환경 관련 기업인 성원엔비켐의 회장을 겸하고 있다. 팔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기업 활동을 하는 그가 최재형에 천착한 배경이 궁금했다.

“2010년 추석 즈음 동북아평화연대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권했어요. 그래서 그저 따라갔다가 연해주에 있는 한인들인 고려인들 가정을 방문했는데, 사는 게 너무 어렵더군요. 비참하다고 할 만큼 어려운 가정도 있었어요. 그때 최 선생에 대해서도 알게 됐는데, 그분이랑 저랑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저도 고학생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제때 공부를 못했었거든요. 최 선생은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고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로 고려인들을 위한 학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인 사회에 필요한 것도 인재육성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어른처럼 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받은 것만큼 돌려주고 가야겠다 싶어 장학회를 꾸리게 됐어요.”

최재형장학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은 2011년 6월. 김 회장을 필두로 박춘봉 부원광학 회장, 전상백 한국종합건축사무소 회장, 김수필 동북아평화연대 공동대표 등 80여 명의 회원들이 십시일반 장학회를 돕고 있다. 한 달에 1만 원부터 시작되는 후원금은 차곡차곡 쌓여 2011년 9월에는 연해주를 찾아 고려인 2세 대학생들을 위한 첫 번째 장학금 수여식을 가졌다.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고려인들이야말로 우리가 당장 도와줘야 할 내 민족, 내 형제,‘긴급 1호’인 거지요.”


안녕하세요. 저는 우수리스크 사범대 한국어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부전공은 영어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제가 살던 우정마을로 한국에서 대학생들이 왔습니다.

그때 처음 한국말을 들었고, 그때부터 한국말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2009년 대한민국 강화도 캠프에 참여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한국어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러시아와 한국을 이어주는 외교관으로 두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한국어, 러시아어, 영어 등 3개 국어를 하기 때문에 앞으로 직장을 선택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이것이 저의 미래입니다. 저는 이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강 스타스 올림


“연해주 고려인 2세, 당장 도와야 할 내 형제”

지금까지 최재형장학회의 장학금 혜택을 받은 학생은 6명(1명은 졸업). 이들에게는 한 달에 35만 원의 장학금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주어진다. 장학금은 고려인 대학생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데, ‘열심히 공부한다’, ‘고려인 공동체의 발전과 한-러 간의 교류 협력에 이바지하며,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등의 내용이 담긴 서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연해주 고려인이 3만여 명 정도 됩니다. 한 대학생 가정을 방문했는데, 콩 재배 소작농인 아버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하며 근근이 먹고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녀들이 정말 똑똑했어요. 인간은 배가 고프면 안 되는 겁니다. 최 선생도 밥을 제공하고 공부를 시켰어요. 사실 고려인들은 한민족 우리 핏줄 아닙니까. 요즘은 아프리카같이 너무 먼 나라만 도우려고 하는데,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고려인들이야말로 우리가 당장 도와줘야 할 내 민족, 내 형제, 긴급 1호인 거지요.”

팔순에 시작한 장학회지만 벌써부터 할 일이 많다. 우선은 장학회 후원 회원 수부터 늘리는 것이 제일의 목표이고, 사정이 허락된다면 연해주 장학생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우리나라 대학을 돌며 한국의 현실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김 회장의 바람이다. 선조들은 힘든 삶을 살았으나 지금 남은 고려인들이 가난과 싸워 이기려면 교육밖에 답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연해주 지역이 안정권에 접어들 때면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의 지역으로 확장해나갈 계획도 갖고 있다.

“하하, 남은 소원이요? 장학회 잘 되는 것이지요. 저는 대리자 역할을 할 뿐이지만요. 조그마한 새마을운동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얼마 전 국제조직인 기독실업인회 대만지부 50주년 행사에 갔었는데 아시아인이 380여 명 정도 왔더군요. 축사를 하라기에 서툰 영어로 결국 인간이 유한한데, 절대자 앞에 가서 섰을 때 ‘당신은 지상에서 뭘 하고 왔나’라고 물으면 대답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언제 부름을 받을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그때 말할 이유를 만드느라 장학회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일본과 필리핀 지역 회장 3명이 각자 4000달러씩, 하루 저녁에 1만2000달러를 후원받았지 뭡니까.(웃음)”

“당신은 지상에서 뭘 하고 왔느냐”는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최재형 선생을 ‘광고(廣告)’한다. 그를 이해하려면, 장학회에 뜻을 함께 하려면 완전한 애국자 최재형의 정신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재형장학회 후원 문의 1688-7050, 02-2203-3500


독립운동 자금지원 ‘큰손’최재형은…

1960년대 후반 한반도 북단에 몰아닥친 대기근 당시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 고려인 1세대다. 12세가 되던 해 극심한 가난을 이기지 못해 가출했다가 선량한 러시아 상선 선장부부를 만난 후 선원으로서 6년간 전 세계를 돌며 국제 정세에 일찍 눈을 떴다. 노비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 학교에 다녔다.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했던 덕에 한인 노무자가 대거 투입된 라즈돌리노예~연추 간 군사도로 공사 시 통역을 맡았고, 수십만 명의 병사가 주둔하던 극동함대사령부 식료품 납품권을 따내면서 당대 최고의 거부(巨富)가 됐다. 러시아에 귀화한 그는 1893년 우리의 군수에 해당하는 도헌(都憲)으로 선출됐다.

청년 시절부터 문화계몽운동을 전개, 도헌으로 선출된 후 한인 집단거주 지역에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일제 압박으로 만주에서 연해주로 밀려온 독립군에게 군자금과 러시아 신무기를 제공했으며, 동의회 발족을 주도, 국내로의 진공작전을 지휘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를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했다. 1920년 일본군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김창송

현 성원엔비켐(주)·성원교역(주) 회장

중앙대 국제경영대학원 석사

(사)한국인간개발원 부회장

무역기독인회 창립 및 고문

한국기독실업인회 중앙회장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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