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 (사)김창준 미래한미재단 이사장 “이제 남은 꿈은 조국의 정치 선진화”

1993년 미국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스물한 살에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던 한인 김창준 씨가 도미 31년 만에 한국인 최초, 동양인 최초로 미국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는 뉴스였다. 그는 3선 의원으로 미 연방 하원에서 활동하며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의 입지를 조금씩 넓혀갔다. 지난 7월 김 씨는 한국에서 미래한미재단을 설립했다. 조국의 정치 선진화가 꿈이라는 김 이사장의 아직도 남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이 스물한 살 때였으니 적잖은 세월이 지났다. 김창준 (사)김창준 미래한미재단 이사장의 지난 삶을 정리할 때 ‘파란만장’이란 표현보다 더 적당한 단어가 있을까. 남가주대(USC)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던 유학생은 1990년 한인 최초로 캘리포니아 주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시장을 역임했고, 3년 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당시로서는 한국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공화당원 가운데 유일한 동양인이기도 했다. 내리 3선에 당선된 후 4선 도전에서 아깝게 패배한 뒤 그는 미국 정치계를 떠났고 이후 한동안 마음고생을 겪었다.

하지만 사업가 출신답게 아내와 함께 사업에도 매진하면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강연회, 언론 집필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그의 나이 일흔 둘. 보통 사람들이 은퇴 후 여유를 즐길 만한 시간에 그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장을 던졌다. 그런데 이번엔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다.

그의 이름을 딴 사단법인 김창준 미래한미재단이 그것. 이 재단은 한국의 정치 선진화와 젊은 인재 양성을 기치로 내걸며 지난 7월 발족식을 가졌고, 대한민국 30~40대 젊은 정·재계 후배들의 응원을 한껏 받았다. 트위터 개설 두 달 만에 4700여 명에 이르는 팔로어(follower)를 확보한 김 이사장은 “국민이 그만큼 대한민국의 우리 정치 현실을 답답해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조국의 정치 선진화를 보고 눈을 감고 싶다”고 말하는 김 이사장의 남은 꿈, 미래한미재단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물었다.

“공천권, 당연히 국민에게 돌려줘야”

미래한미재단 설립은 오래전부터 그렸던 청사진인가요.

“아니, 전혀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에요. 올해 나이 일흔둘 아닙니까. 컬럼이나 쓰고 방송도 조금씩 하면서 여행이나 다녀야겠다고 생각 중이었죠. 재단은 내가 시작한 게 아니에요. 지난 6월에 30~40대 기업인 2세들이 찾아와서 대한민국 정치 선진화가 절실하니 좀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어 경제가 자꾸 거꾸로 간다면서요. 재정적인 지원은 자기들이 할 테니 저더러 앞장을 좀 서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것이 계기가 됐죠.”

재단 설립이 한국 정치계 입문의 단초가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나는 정치적 야망이 없어요. 미국서 하원의원을 3선까지 했던 사람이고 이제는 나이도 많고 힘도 없잖습니까.(웃음) 다만 겉으로는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 사회가 깊숙이 들여다보면 심각하게 썩어있다는 걸 알게 됐고, 재단을 시작하고 보니 사명감이 저절로 생깁니다.

나를 찾아왔던 30~40대 기업인들이 우리 세대가 될 때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무엇을 하면 이 사회의 병폐를 치료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니 당 공천부터 없애야겠다는 결론이 섰어요. 당과의 연줄, 돈이 오가는 공천이 국회의원의 당락을 좌우하다 보니 탈당하면 국회의원 자리를 잃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재들도 모두 당에 들어가면 거수기가 됩니다. 대한민국은 면장까지도 당 세력 아닙니까. 1960~70년대부터 세습된 정치 문화지요.”


그렇다면 공천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요.

“공천권은 당연히 국민이 가져야 합니다. 공천권을 제대로 돌려놓으면 경제 발전도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공천 때문에 돈이 왔다 갔다 하고, 국민은 비례대표를 뽑느라 투표를 두 번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요. 우리 국민의 정치 수준도 미국에 못지않다고 봅니다.

국회의원은 잘나고 상식이 많아서 국회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국민이 바쁘니까 국회에서 국민을 대신해 일하라고 보낸 대의원들(representative)이에요. 지금 제 책상 위에 대통령께 쓴 편지가 있어요. 국가 안위에 관한 사항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는 헌법 제72조에 의거,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리는 것에 대한 국민투표 제안을 건의할 생각이에요.”


국회의원들에게 불만이 많으신 듯합니다.

“국민의 머슴이 돼야 할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니 문제지요. 기름 값이 자꾸 오를 때 국민한테 전기 아끼라고만 하지 말고 자신들이 중형차 놔두고 지하철 타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미국 국회의원들은 지하철 타고 다닙니다.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야 국민이 따라할 거 아닙니까. 금융감독원까지 돈을 먹고. 이게 뭡니까.”


국민의 시선도 있고, 여러 모로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겠습니다.

“기대가 커서 부담도 됩니다. 나를 굉장한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나는 그리 파워가 있는 사람이 아녜요.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 정치가 선진화될지는 알고 있지요. 미국 사회를 들어가 본 사람으로서 아는 것이지요.”


욕먹을 각오하고 재단을 설립한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요, 욕까지 먹어가며 이러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오면 올수록 좋아지는 게 대한민국이고, 특히 사람들이 좋아요.”


미래한미재단을 통해 2세대 젊은 정치 인재 양성의 포부도 밝히셨는데,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정치 인재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애국자이면 됩니다.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친다는 각오가 있으면 되는 거지요.”


리더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도 운영하실 계획이라고요.

“내년 3월경부터 시작할 계획인데, 우리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경제 선진화가 프로그램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실천적인 실례를 중심으로 강의가 이뤄질 예정입니다. 현재 저를 포함해 대학교수 등 강사진을 구성 중입니다.”


트위터 팔로어가 4700여 명을 넘어섰던데요.

“두 달이란 짧은 기간에 많은 팔로어가 생겨 저도 놀랐습니다. 그만큼 한국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팔로어들에게 여론조사를 해 봤는데, 한국의 정치 후진성과 경제 양극화를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 꼽았습니다. 연락만 하면 돕겠다는 분들도 있어요.”


“한국 정부, 경제 발전 속도 못 따라”

“한국 경제는 오히려 미국보다 발전성이 높아 보입니다. 문제는 정부가 박자를 못 맞춘다는 겁니다. 정책 결정을 하는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니 경제가 더 발전할 수 없는 거죠.”
한국의 양극화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계신데 미국에서 바라본 한국 경제는 어떻습니까.

“한국 경제는 오히려 미국보다 발전성이 높아 보입니다. 문제는 정부가 박자를 못 맞춘다는 겁니다. 정책 결정을 하는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니 경제가 더 발전할 수 없는 거죠.

중국은 경제 성장 대비 대학 졸업생 수를 절반으로 맞춥니다. 우리나라는 대학 졸업생들이 너무 많아요. 머리는 좋은데 일자리 못 구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재주는 썩지요.

그러니 범죄만 느는 것이죠. 국민소득 2만 달러인데 사치 수준은 4만8000달러인 미국보다 더 합니다. 한국이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인데, 거리에는 외제차가 즐비합니다. 한국서는 명품이 비싸야 더 잘 팔린다는 오명까지 쓰고 있잖습니까.”


실례지만 이사장님은 어떤 차를 타십니까.

“10년 된 ‘똥차’를 끌고 다닙니다.(웃음) 그랬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안 어울리니 차를 바꾸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차란 것이 잘 굴러서 가고 싶은 데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계속 타고 다닙니다. 하루는 호텔 정문에서 주차를 돕는 직원이 다른 사람들 차는 문을 열어주는데 내 차 문은 안 열어 주기에 다가가서 말을 걸었어요.

‘자네는 무슨 차 타고 다니나’ 하고 물었더니 S 브랜드 차를 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네가 그 차 타면서 내 차 문은 왜 안 열어주나’ 하고 한 마디 해 줬죠. 사람들이 집은 안 사도 벤츠는 타고 다녀야 한다는 게 다 같은 이유 아니겠어요.”


재단 설립 전후 근황은 어떠셨나요.

“최근 3~4년간은 미국서 한국을 오가며 강연회도 가지고 아내랑 사업도 했어요.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주말에 운동도 하고 그랬죠. 어쩌다 보니 신문에 컬럼을 쓰기 시작했고, 그 후 별안간 TV 출연도 하게 되고, 지금까지의 일들이 진행됐어요.(웃음)”


유학생에서 사업가, 시장, 하원의원 3선까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셨는데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는 어떤 것입니까.

“미국은 하루에도 수만 명이 배를 타고 불법 입국을 하는 나라예요. 나가는 문은 활짝 열어놓지만 들어가는 것은 아주 힘든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민 온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또 미국입니다. 나처럼 국회의원도 될 수 있고요.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겠죠. 미국 부자 중에 한인들도 많습니다. 맨주먹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아메리칸 드림이겠죠. 미국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가려고 하는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어요.”


3선 의원까지 지내시고 4선 낙선 후 마음고생이 많으실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셨다 들었습니다.

“제니퍼(제니퍼 안은 현재 미국에서 정부 프로젝트 홍보를 주로 하는 PR 회사를 운영 중이다)는 발랄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에요. 가족도, 선거도 모두 잃고 좌절할 때 교회에서 만난 사람인데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자기 회사에 나와 일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죠.

당시 수중에 있는 돈이 200달러 정도 됐던 것 같아요.(웃음) 다투고도 5분이면 잊어버리는 사람이라 남자인 나보다 더 대범한 사람이에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살면 살수록 사랑하게 되는 여잡니다.”


가수 조용필 씨와 동서지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애창곡도 혹시 조용필 씨 곡인가요.

“하하…. ‘허공’이 애창곡인데 동서 앞에서 불렀더니 잘 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안 여사님과 함께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를 미국에 진출시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박지혜 양 얘기인 것 같네요. 우연히 한 행사에 갔다가 박지혜 양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았어요. 내가 바이올린 연주를 조금 하는데, 공연을 보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초청해서 집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어요.

한인들과 미국인 등 100여 명이 참석했는데 지혜 양이 극찬을 받았어요. 내친 김에 8월에 뉴욕 카네기홀, 10월에 워싱턴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주선했어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적게 먹고 운동을 많이 해야 하는데 어릴 때 가난하게 자라서 그런지 음식을 남기지 않는 습관이 있어요. 그때는 음식 남기면 어른들께 야단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뭐든 남기지 않고 싹 쓸어 먹다 보니 과식하게 돼요. 그러니 죽어라 운동을 해도 이놈의 배는 들어갈 생각을 안 하네요, 하하하.”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김창준

현 워싱턴 포럼 이사장 겸 (사)김창준 미래한미재단 이사장
1939년생
보성고 졸업
USC 학·석사
한양대 정치학 박사
1976년 제이킴 엔지니어스 설립
1990년 미 캘리포니아 주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시장 역임
1993년 미 연방 하원의원 당선(공화당 103·104·105대 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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