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의 앤티크 살롱] 혁명과 전쟁의 시대, 조제핀 스타일 (Josephine Style)
입력 2011-05-13 17:04:15
수정 2011-05-13 17:04:15
조제핀과 나폴레옹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조제핀과 나폴레옹의 샤토 말메종에는 그들의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지금까지 수채화처럼 선명히 그려져 있다. 조제핀의 세련된 안목이 남아있는 말메종에서 조제핀 스타일의 연원을 찾아가본다.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조제핀과 나폴레옹의 샤토 말메종(Chateau de Malmaison)은 일드프랑스 오 드 센(Hauts de Seine)의 뤼에유 말메종(Rueil-Malmaison) 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성이다.
성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저택이라 해야 좋을 정도의 규모로 사랑스런 정원과 입구에 일직선으로 크게 뻗어있는 길이 인상적인 이 건축물은 성의 여주인이 시대의 영웅과 폭풍 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누구든 말메종을 방문해보면 조제핀의 세련된 안목을 깨닫게 된다. 퐁텐블로(Fontainebleau) 성과도 다르고 베르사유(Versailles) 같은 규모와는 전혀 다른 앙피르(Empire) 시대의 디테일이 조제핀의 안목으로 다듬어진 조각을 보는 듯하다고 해야 할까.
애정과 정략이 뒤섞인 결혼
조제핀이 직접 디자인한 가구에는 백조와 이니셜 ‘J’, 그리고 ‘N’이 모노그램으로 남아있는데, 이는 후기 네오 클래식, 즉 앙피르 사조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준다. 도자기 그릇과 스털링 실버웨어, 마호가니와 흑단의 조화, 이집트와 로마의 정치적 결합으로 나타난 모티브들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현신으로서 말메종은 한 시대의 디자인을 보여주는 뮤지엄이기도 하다.
1763년 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트르와질레에서 프랑스 장교의 장녀로 태어난 조제핀의 본명은 마리 조제프 로제 타셰 드 라 파제리(Marie-Josephe-Rose Tascher de la Pagerie)다. 그녀의 부모는 이주해온 프랑스인이다.
조제핀은 16세가 되던 1779년 부유한 청년 장교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자작과 중매 결혼을 해 프랑스로 이주했고 두 남매를 낳았다. 그러나 애정이 없던 두 사람은 긴 별거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보아르네 자작은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처형당하고 그녀도 투옥됐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로베스 피에르의 몰락으로 석방된 조제핀은 혁명기에 세련된 미모를 앞세워 파리의 사교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일생 동안 7만5000여 통에 달하는 편지를 썼다. 이 중 많은 편지는 아내 조제핀에게 보낸 것이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1795년 12월에 조제핀에게 보낸 편지는 놀랍게도 그가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였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의 사랑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내 생각은 당신으로 가득하오.…나를 사랑에 취하도록 만든 당신과의 어제 저녁은 나의 모든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오. 그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사랑스러운 조제핀,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내 마음을 움직이오! 화가 났소?
당신 얼굴에 비치는 것이 그늘이오? 걱정하고 있소?…이제 12시면 당신은 떠날 거고 3시간 후에 당신을 보게 될 거요. 그때까지 my sweet love, 당신에게 수천 번의 키스를 보내오. 하지만 내게는 키스를 보내지 마오. 당신의 키스는 나를 불살라 버리니까.”
이혼 후에도 이어진 끝없는 애정
나폴레옹의 열정적인 편지는 어떤 시인의 작품보다 뜨겁고 진솔했다. 1795년 12월, 청년 장교 나폴레옹은 파리 사교계의 꽃인 조제핀에게 이 같은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낸 3개월 후인 1796년 3월 9일,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27세의 총각이었으나 조제핀은 33세의 두 아이를 둔 과부였다. 사랑의 감정이 진정이었다 하더라도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접근한 배경에는 정략이 숨어 있었다.
파리 사교계에 문외한인 코르시카 출신의 청년 장교 나폴레옹에게는 정관계의 후원자들이 필요했다. 사교계를 통해 폭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던 조제핀은 그에게 더없이 좋은 배우자였다.
야심만만한 장교의 구혼을 받은 조제핀은 처음에는 망설였다. 나폴레옹이 너무 조용하고 여성들을 서투르게 대하는 촌뜨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끈질긴 구애는 마침내 조제핀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3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한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1804년 12월 1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황제·황후 즉위식을 거행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은 3년간에 걸쳐 완성된 다비드의 대작 <나폴레옹 대관식>에 그 화려함이 그대로 전해져오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조제핀은 쾌활하고 남에게 호감을 주는 묘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으나, 사치스럽고 낭비가 심할 뿐만 아니라 후사가 없었던 탓에 1809년 이혼을 당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이혼 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합스부르크가(家)의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 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혼 후에도 샤토 말메종에 사는 조제핀과 꾸준히 서신을 나누었다.
때로 조제핀은 그런 나폴레옹에게 거액의 계산서를 보내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세계를 제패한 영웅이었으나 아내 조제핀의 마음을 정복하지 못해 늘 고통스러워했다. 그 스스로 자신을 지배한 진정한 정복자는 조제핀뿐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끝없는 구애의 대상이던 조제핀은 그가 엘바 섬에 유배된 직후 사망한다.
“나는 잠에서 깨어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소. 지난밤 도취의 열락만이 나의 감각 속에 맴돌고 있소. 정다운 이여,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당신, 도대체 내 마음에 어떤 신비한 효력을 불어넣은 거요?”
영웅을 매료시킨 그녀의 안목은 당시 모든 미의 기준이었다. 당시는 보티첼리의 회화 속에 있을 법한 그리스 여신풍의 하늘거리는 슈미즈 의상을 실제로 입었던 여인들의 시대다. 숭고한 혁명의 이념이 패션으로 표현된 이 시대의 의상은 영국의 제인오스틴의 소설 속 여인들에게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여성들은 처형된 앙투아네트가 남긴 신화였던 것이다.
앙피르의 주역인 조제핀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여성들의 선망이 됐기에 그가 입은 옷과 가구, 실내장식은 트렌드의 중심이 됐다.
김재규 _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 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조제핀과 나폴레옹의 샤토 말메종(Chateau de Malmaison)은 일드프랑스 오 드 센(Hauts de Seine)의 뤼에유 말메종(Rueil-Malmaison) 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성이다.
성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저택이라 해야 좋을 정도의 규모로 사랑스런 정원과 입구에 일직선으로 크게 뻗어있는 길이 인상적인 이 건축물은 성의 여주인이 시대의 영웅과 폭풍 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누구든 말메종을 방문해보면 조제핀의 세련된 안목을 깨닫게 된다. 퐁텐블로(Fontainebleau) 성과도 다르고 베르사유(Versailles) 같은 규모와는 전혀 다른 앙피르(Empire) 시대의 디테일이 조제핀의 안목으로 다듬어진 조각을 보는 듯하다고 해야 할까.
애정과 정략이 뒤섞인 결혼
조제핀이 직접 디자인한 가구에는 백조와 이니셜 ‘J’, 그리고 ‘N’이 모노그램으로 남아있는데, 이는 후기 네오 클래식, 즉 앙피르 사조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준다. 도자기 그릇과 스털링 실버웨어, 마호가니와 흑단의 조화, 이집트와 로마의 정치적 결합으로 나타난 모티브들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현신으로서 말메종은 한 시대의 디자인을 보여주는 뮤지엄이기도 하다.
1763년 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트르와질레에서 프랑스 장교의 장녀로 태어난 조제핀의 본명은 마리 조제프 로제 타셰 드 라 파제리(Marie-Josephe-Rose Tascher de la Pagerie)다. 그녀의 부모는 이주해온 프랑스인이다.
조제핀은 16세가 되던 1779년 부유한 청년 장교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자작과 중매 결혼을 해 프랑스로 이주했고 두 남매를 낳았다. 그러나 애정이 없던 두 사람은 긴 별거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보아르네 자작은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처형당하고 그녀도 투옥됐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로베스 피에르의 몰락으로 석방된 조제핀은 혁명기에 세련된 미모를 앞세워 파리의 사교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일생 동안 7만5000여 통에 달하는 편지를 썼다. 이 중 많은 편지는 아내 조제핀에게 보낸 것이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1795년 12월에 조제핀에게 보낸 편지는 놀랍게도 그가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였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의 사랑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내 생각은 당신으로 가득하오.…나를 사랑에 취하도록 만든 당신과의 어제 저녁은 나의 모든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오. 그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사랑스러운 조제핀,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내 마음을 움직이오! 화가 났소?
당신 얼굴에 비치는 것이 그늘이오? 걱정하고 있소?…이제 12시면 당신은 떠날 거고 3시간 후에 당신을 보게 될 거요. 그때까지 my sweet love, 당신에게 수천 번의 키스를 보내오. 하지만 내게는 키스를 보내지 마오. 당신의 키스는 나를 불살라 버리니까.”
이혼 후에도 이어진 끝없는 애정
나폴레옹의 열정적인 편지는 어떤 시인의 작품보다 뜨겁고 진솔했다. 1795년 12월, 청년 장교 나폴레옹은 파리 사교계의 꽃인 조제핀에게 이 같은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낸 3개월 후인 1796년 3월 9일,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27세의 총각이었으나 조제핀은 33세의 두 아이를 둔 과부였다. 사랑의 감정이 진정이었다 하더라도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접근한 배경에는 정략이 숨어 있었다.
파리 사교계에 문외한인 코르시카 출신의 청년 장교 나폴레옹에게는 정관계의 후원자들이 필요했다. 사교계를 통해 폭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던 조제핀은 그에게 더없이 좋은 배우자였다.
야심만만한 장교의 구혼을 받은 조제핀은 처음에는 망설였다. 나폴레옹이 너무 조용하고 여성들을 서투르게 대하는 촌뜨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끈질긴 구애는 마침내 조제핀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3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한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1804년 12월 1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황제·황후 즉위식을 거행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은 3년간에 걸쳐 완성된 다비드의 대작 <나폴레옹 대관식>에 그 화려함이 그대로 전해져오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조제핀은 쾌활하고 남에게 호감을 주는 묘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으나, 사치스럽고 낭비가 심할 뿐만 아니라 후사가 없었던 탓에 1809년 이혼을 당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이혼 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합스부르크가(家)의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 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혼 후에도 샤토 말메종에 사는 조제핀과 꾸준히 서신을 나누었다.
때로 조제핀은 그런 나폴레옹에게 거액의 계산서를 보내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세계를 제패한 영웅이었으나 아내 조제핀의 마음을 정복하지 못해 늘 고통스러워했다. 그 스스로 자신을 지배한 진정한 정복자는 조제핀뿐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끝없는 구애의 대상이던 조제핀은 그가 엘바 섬에 유배된 직후 사망한다.
“나는 잠에서 깨어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소. 지난밤 도취의 열락만이 나의 감각 속에 맴돌고 있소. 정다운 이여,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당신, 도대체 내 마음에 어떤 신비한 효력을 불어넣은 거요?”
영웅을 매료시킨 그녀의 안목은 당시 모든 미의 기준이었다. 당시는 보티첼리의 회화 속에 있을 법한 그리스 여신풍의 하늘거리는 슈미즈 의상을 실제로 입었던 여인들의 시대다. 숭고한 혁명의 이념이 패션으로 표현된 이 시대의 의상은 영국의 제인오스틴의 소설 속 여인들에게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여성들은 처형된 앙투아네트가 남긴 신화였던 것이다.
앙피르의 주역인 조제핀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여성들의 선망이 됐기에 그가 입은 옷과 가구, 실내장식은 트렌드의 중심이 됐다.
김재규 _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 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