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현대미술의 이유 없는 반항

Jackson Pollock

물감을 캔버스에 뿌린다. 물감이 막대기 끝에서 흘러내린다. 알 듯 모르는 부정형의 선, 다시 붓으로 뿌리고 막대기로 흘리고…천천히, 그러나 격정적으로, 또 뿌리고, 또 뿌리고 또 뿌리고…또 뿌린다. 그러다가는 아예 부어 버린다. 격정을 캔버스에 던져버린 사나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 그의 이름은 현대미술의 신화가 됐다.

<북두칠성의 그림자>, 1947년, 캔버스에 오일, 110×92c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 1947년, 캔버스에 오일, 110×92c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독한 담배와 알코올에 찌들고 자신의 분노를 거침없이 폭발해 버리는 불같은 야성, 재주가 없어 변변한 드로잉 없이도 자신의 신념으로 몰아붙여 뉴욕화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 가난으로 얼룩진 무명 시절부터 영광과 고뇌의 시절까지 뉴욕과 예술과 삶에 ‘이유 없는 반항’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명예와 성공을 얻자 더 이상 새로운 예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자각하고 44년이라는 길지 않은 세월을 만취한 채, 자신의 포드 자동차를 몰고 고의적 사고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20세기 현대미술의 풍운아.

그가 떠난 자리, 흘리고 뿌린 물감 아래 미국 추상표현주의라는 새로운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그 꽃은 현대미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화가의 행위가 회화에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되는 미국 현대미술의 홀씨가 됐다.


현대미술의 반항아

1949년 8월, 라이프 잡지에 ‘잭슨 폴록, 그는 미국의 현존하는 위대한 화가인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폴록의 그림은 이젤에 캔버스를 세워놓고 붓에 물감을 묻혀서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붓 대신 막대기로 공업용 에나멜이나 자동차 도료 같은 페인트를 직접 뿌리는 ‘드리핑(dripping) 페인팅’ 방식으로 제작했다.

작품을 하기 전에 밑그림이나 드로잉은 애당초 찾아볼 길이 없고 그저 행위의 과정에 치중해 온몸으로, 온 정신을 다 기울여 제작했다. 작업을 할 때면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렸지만, 작품에서는 기존에 보았던 형상과 이미지 재현의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른 완전한 새로움이 꿈틀거렸다. 평론가 헤럴드 로젠버그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 명명한 이 방식은 작가의 통제를 벗어난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퍼포먼스의 산물이었다.

1 <작품 1A> 부분, 1948년, 캔버스에 오일 에나멜, 뉴욕 현대미술관(MoMA)
부분, 1948년, 캔버스에 오일 에나멜, 뉴욕 현대미술관(MoMA)">
1950년, 사진가 한스 나무스(Hans Namuth)는 폴록의 실제 작업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바닥에 펼쳐진 커다란 캔버스 위를 누비며 막대와 붓대로 물감을 휘갈기고 들이붓는 행위에 완전히 몰입한 장면을 담은 나무스의 사진들은 ‘액션 페인팅’ 화가로서 그를 신화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역동적이고 저돌적인 제스처는 남성적이고 폭력적으로 비춰졌고, 이로 인해 폴록은 반항아적 이미지로 유명했던 말런 브랜도와 제임스 딘 같은 당대의 영화배우들에 비유되기도 했다.

나아가 지속적인 언론에의 노출은 서부에서 보낸 유년 시절, 알코올 중독과 갑작스런 죽음 같은 화가의 개인사와 맞물리면서 ‘고독하고 낭만적인 천재 예술가’로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형성했다.
2 <사탄>, 1947년, 캔버스에 오일 에나멜, 104×266.7cm, 개인 소장
, 1947년, 캔버스에 오일 에나멜, 104×266.7cm, 개인 소장">
작업의 과정

폴록은 1912년 와이오밍주에서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인 아버지의 다섯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폴록의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어려서부터 미술공부를 시켰지만, 반항적이고 거친 폴록은 어머니의 뜻에 잘 따르지 못했다.

유년기를 서부에서 전전하다가 로스앤젤레스(LA)에 정착해 매뉴얼 아트 고등학교에 다니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하고 만다.

1929년 나중에 화가가 된 형과 함께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 입학해 스승인 토마스 하트 벤턴에게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는다. 벤턴은 폴록에게 아메리칸 리얼리즘의 사실주의 화풍과 멕시코 벽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영향을 받은 큐비즘, 변형된 인간과 동물의 이미지, 그리고 앙드레 마송의 초현실주의 화풍을 가르친다.

3 &lt;전쟁&gt;, 1947년, 종이에 펜 잉크 색연필, 52×40.6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 1947년, 종이에 펜 잉크 색연필, 52×40.6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폴록은 스위스의 정신병리학자 칼 융의 심리적 환상 이미지나 인디언 토템 같은 신화를 그렸지만, 그에게는 피카소라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1940년대 뉴욕화단은 피카소 작품으로 초토화됐고, 그의 공습은 폴록에게도 치명적이었다. 2001년 에드 해리스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폴록>에서 그는 절규한다. “피카소가 다 해버렸어!”

폴록은 술에 취해 외쳤다. 더 이상 피카소를 뛰어 넘을 예술가는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새로움에 대한 고민으로 몇 날 며칠째 캔버스 앞에서 고민하던 폴록은 주저하며 망설이는 붓 끝에서 흘러내리는 물감이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본다.

그는 곧바로 물감을 캔버스에 흘리기 시작한다. 점과 선이 엉킨다. 거대한 선들은 코튼 천에 스미고 번져 용트림한다. 화면이 살아 숨 쉬듯 일렁인다. 이렇게 보아도, 저리 뒤집어 보아도, 거대한 우주를 올려다보는 듯하고, 태양계 너머 빛나는 북두칠성의 별빛이 빛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보아도, 어떻게 해석해도, 무슨 이야기를 해도 상관이 없다. 그것은 폴록의 작품으로 탄생한 새로운 별이 됐다.

“내가 나의 그림 안에 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않는다. 일종의 ‘(그림과) 관계 맺음’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자각한다. 나는 그림을 변화시키거나 이미지를 파괴하는 등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그림은 자체적으로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이 그 생명을 드러내도록 한다. 작품이 엉망으로 나오는 경우는 나와 그림 간의 접속이 끊긴 경우뿐이다. 이 외엔 완전한 조화, 용이한 기브 앤드 테이크가 일어나고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

폴록은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에 자신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 같은 무의식적 상황 속에서 있다가, 그림이 완성되면 그때서야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술회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완전히 타인의 몫으로 남겨진다지만 폴록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타인의 삶처럼 초연했다.

4 &lt;무제&gt;, 1946년, 종이에 펜 연필 과슈 색연필, 57×77cm, 뉴욕 플래닛 코퍼레이션
, 1946년, 종이에 펜 연필 과슈 색연필, 57×77cm, 뉴욕 플래닛 코퍼레이션">
페기 구겐하임과의 인연

폴록의 부인 리 그래스너는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여류화가로서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수없이 많은 여인들 가운데 진정 폴록을 위대한 예술가로 만든 숨은 공로자다. 그래스너는 현명한 여자였다.

자신도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은 예술가적 열망을 갖고 있었지만, 폴록을 만나고부터 폴록 알리기와 뒷바라지를 헌신적으로 하는 대신 자신의 그림은 접었다. 그녀의 노력은 폴록에게 영광을 안겨다준 20세기 미술사의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을 만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2년 뉴욕에 금세기 미술화랑을 개관한) 18년 전 미국 미술계에는 순수한 개척정신이 있었다. 새로운 미술운동인 추상표현주의가 태어난 것이다. 나는 그 운동을 지원했고,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5 &lt;작품 18&gt;, 1950년, 합판에 오일 에나멜, 56×56.7cm,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 1950년, 합판에 오일 에나멜, 56×56.7cm,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추상표현주의는 폴록을 낳았다. 아니 폴록이 그 운동을 낳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미술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만큼, 세계가 그렇게 빨리 변화했으므로 미술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천재가 10년 단위로 나올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20세기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천재를 선사했고,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해선 이따금 놀려두어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예술가들은 독창적이기에는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런 그림들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다.”

천재는 양산되지 않고, 천재가 나올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야 된다고,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해서 휴지기가 필요하듯 예술가의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대가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구겐하임의 철학은 새겨볼 만한 일이다.

폴록은 1942년 구겐하임이 비영리로 운영하는 금세기 미술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1943년부터 1947년 구겐하임이 베네치아로 떠나기 전까지 그녀는 폴록에게 헌신했다.

“산마르코 광장에 앉아 미술관의 열린 창문을 통해 폴록의 작품을 바라보며 느꼈던 짜릿한 기쁨이 지금도 생각난다. 폴록의 작품이 내 뒤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전시실 발코니로 나와서 눈앞에 펼쳐진 산마르코 광장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1950년 자신이 컬렉션한 폴록의 작품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맞은편에 있는 코레르 미술관에서 대여 전시할 때의 풍경을 훗날 구겐하임 자서전에 적은 글이다. 그녀는 진정 폴록의 작품을 사랑했다.

위대한 예술가

예술가는 위대한 혼자다. 멀고 길며 고독한 세월을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 누가, 그를 도와주더라도 결국 완성의 길은 혼자 걸어가는 것, 해탈을 향한 구도자의 길과 같은 것이다. 그 길은 험하다.

내적 갈등, 외적 상황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자신을 송두리째 보여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관심을 보이고 인정한다. 세상이, 사람들이 예술가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잔인하지만, 그래야 진정 아름다움이 꽃 피고 열매 맺기 때문에 이 고단한 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가 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쉽게 얻는 예술이라면 그건 예술품이 아니라 생필품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리 울었나보다.’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국화꽃도 꽃피우기까지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임을 알까.

쉬워 보이는 평범함은 어려움이 지나야 얻을 수 있다. 겪은 사람만이 알고 아는 사람만이 아는 경지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웃 사랑이 진정 어려우니 하는 이야기다. 이웃 사랑이 쉽다면 왜 이 말을 <성경>에 적어놓았겠는가. 혼자 가는 예술가의 길이 진정 어려우니 사람들은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6 MoMA에 전시된 &lt;작품 1A&gt;. 거대한 혼돈이다.
. 거대한 혼돈이다.">
예술가의 길은 비극으로 점철됐다. 고흐의 비극은 서막이고, 농민전쟁에 뛰어들었다가 몸이 처참하게 찢겨나가는 참형을 당한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엘크라트제프, 농민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다시는 끌을 쥘 수 없도록 두 손이 짓이겨진 조각가 리멘슈나이더, 파리코뮌에 참여했다가 훗날 망명의 길을 걸어야 했던 리얼리즘의 대가 쿠르베, 왕과 귀족들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풍자화와 징역형을 맞바꾸어야 했던 도미에, 히틀러의 압제를 피해 망명한 스위스에서 결국 자살을 결행한 표현파의 양심 에른스트 키르히너, 프리다 칼로, 나혜석, 모딜리아니, 마크 로스코….그들은 모두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제임스 딘의 비극을 동경하고 자신도 비극의 주인공이 된 잭슨 폴록, 그는 거대한 혼돈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 시대의 반항아요, 랭보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같은 삶을 산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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