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늦었지만 진정한 ‘知音’을 만난 행복

윤병훈 오죽장 & 이황희 청담엔비의원 원장

오죽장(烏竹匠) 윤병훈은 우리나라, 그리고 세계 유일의 오죽세공 명장이다. 나이 서른에 만지기 시작한 오죽을 그는 희수(喜壽)가 되도록 놓지 못한다. 후계자를 두지 못한, 세상에 유일무이한 장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시관 하나 만들고 떠나겠다는 그의 평생소원을 알아주는 ‘지음(知音)’을 만났다. 이황희 청담엔비의원 원장이 후원자로 자청하고 나선 것. 늦었지만 두 사람이 만나 함께 꾸는 꿈이 예사롭지 않다.


문을 열고 들어선 오죽장 윤병훈 선생의 작업실. 반상 위에 반상이, 그 반상 위에 또 다른 반상이 첩첩이 쌓여있다. 재료가 같아 크기와 색깔이 모두 엇비슷해 보이는 각각의 반상 표면은 만들다 만 문양이 못질 자국과 함께 남아있다.

나무를 깎아 상 틀을 만들어 둔 지 벌써 1년. 바닥에서 천장 가까이까지 쌓인 반상들은 사실 이미 ‘갈 곳’이 정해진 것들이란다. 주문받은 지 1년이 됐건만 윤 선생은 완성을 서두르지 않는다.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이란 것이 자연에서 온 놈이라 숨을 쉬다 보니 한참 전에 작업을 해 둬도 틀어져버리면 도루묵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모조리 뜯어버리는 수밖에.


이 까다롭고도 까다로운 오죽을 다루다 보니 어떤 작품은 10년을 그의 곁에 있었고, 작업실에는 말려서 잘라둔 지 몇십 년이 되는 대나무 조각도 수두룩하다. 문양대로 잘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에서 온 그대로의 문양을 활용하다 보니 대나무 300줄기 가운데 원하는 문양은 하나밖에 건지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게 골라 잘라 놓은 대나무 조각이 작업실에 수두룩하다. 윤 선생이 얼마나 긴 세월을 오죽을 찾아다니는 데 쏟아 부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오죽장이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이 일은 인간의 근원적인 것, 정신적인 기본을 가르쳐주지요. 어차피 시작을 했고, 또 세상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나밖에 없으니 나중에 박물관이라도 하나 만들 수 있게끔 열심히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에요.

대나무를 만질 땐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자세가 필요하지요. 대나무를 만질 때만큼은 대나무를 능가하는 사람이 돼야 하는데, 그것이 사실은 가장 어려운 단계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랄까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 보기에 바보가 될 때도 있지요. 너무 외골수니까요.”

우연히 만나 ‘평생’을 약속하다

오죽은 예부터 충효정절을 의미한다 해 신성하게 여겼던 대나무다. 중국에서는 ‘자죽’, 일본에서는 ‘흑죽’으로 불리는 오죽은 표면에 별도의 칠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색채를 띤다. 이 오죽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오죽장’이다.

1996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될 때 윤 선생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오죽세공 기술을 영원히 계승하고 싶은 욕심에 ‘죽장’ 앞에 ‘오’를 붙여 ‘오죽장’으로 등록해 달라 요청했다. 오죽장 윤병훈은 현재 전 세계 단 한 명밖에 없는 우리의 전통 오죽세공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다.

잘라놓은 대나무 잔재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윤 선생의 작업실에서 나누는 환담이 무르익을 때쯤 그의 후원자인 이황희 청담엔비의원 원장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언강후원회’를 이끌고 있는 이 원장의 어머니 김정옥 여사도 동행했다. ‘언강’은 윤 선생의 호로, 언강후원회는 대한민국 명장(95-18)이자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윤 선생의 예술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발족한 단체다.


두 사람의 등장과 함께 기자는 아껴 둔 질문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성형외과·피부과 전문의와 오죽장의 만남, 그 사연부터 궁금했다. 더구나 윤 선생은 1년 전부터 오래도록 터를 잡고 있던 서울의 북촌마을을 떠나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 그의 작업실이 있는 인천노인전문병원은 이 원장의 아내인 김경주 원장이 병원장으로 있는 곳이기도 하다.

“3년 전이었어요. 윤 선생님께서 서울 필동에 있는 ‘한국의 집’에서 작업과정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행사를 하셨는데, 어머니와 그 행사를 찾았던 것이 계기가 됐죠. 작업하시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선생님 제자가 보여준 작품집을 보고 아름다운 작품들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을 가만히 보니 거동이 불편해 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뭐 도와드릴 일 없습니까’ 하고 여쭸더니 ‘혹시 도와줄 생각이 있느냐’고 되물으셨어요. 그렇다고 대답을 했는데, 그 다음 선생님 작품전을 찾았을 때 도움을 줬으면 한다는 말씀을 어렵게 꺼내시더라고요.”

어릴 적부터 음악과 그림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이 원장은 그가 운영하는 병원에도 윤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여러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해 놓을 정도로 예술에 관심이 많다.

윤 선생을 본 후 가슴 한편이 아렸던 이유는 그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오죽세공 작품이 어느 날엔가 송두리째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어느 날’은 아마도 윤 선생의 임종이 될 터. 윤 선생 역시 긴 세월 가르쳤던 제자가 떠난 후 후계자 없이 평생을 바쳐온 작품을 세상에 버려두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심 불안했던 상황이었다.

“후원자라곤 하지만 별 것 없습니다.(웃음) 생활하고 작업하시는 데 불편한 것 없이 공간을 마련해 드리고 지원해 드리는 것밖예요. 제 능력이 되는 만큼 해드리는 거죠. 지난해 선생님께서 큰 수술을 받으셨는데, 건강 악화로 거동이 불편해지셔서 거쳐도 서울에서 이곳으로 옮겼어요. 노인전문병원에 계시면 아무래도 편찮으신 부분까지 돌봐드릴 수 있으니까요.”

서른에 오죽세공에 뛰어들었으니 윤 선생이 오죽과 사랑도 하고, 씨름한 세월이 47년이다. 예순을 넘어서면서 그의 열 손가락 끝은 모두 직각으로 휘어 굳어버렸다. 부레와 아교를 섞어 접착제를 만드는데, 대나무 조각에 그 접착제를 붙여 제대로 단단히 붙을 때까지 30분 넘게 손끝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 누르다 보니 손가락이라고 남아날 리 없었다.

3년 전 이 원장과 어머니를 만난 후 윤 선생은 그 굽어 휘어진 손으로 서약서를 썼다. 오죽장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임종까지의 삶과 사후 관리까지 모두 이 원장에게 맡긴다는 내용이다. 혹시나 자신의 언약이 깨질까 윤 선생은 공증 절차까지 거쳤다. 후원자라지만 윤 선생이 이 원장을 그렇게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평생의 꿈, 오죽장 전시관 건립의 꿈을 이뤄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시관 개관의 꿈을 같이 꾸다

오죽으로 만들 수 있는 작품은 무궁무진하다. 작은 서랍장부터 큰 책장, 서적과 편지를 꽂아 벽에 걸어두는 고비(考備) 등 생활용품들이 대부분이다.

윤 선생은 1980년 빛의 각도에 따라 다양한 문양으로 보이는 ‘기하화법’을 응용한 처녀작 <염원>을 선보인 후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한국전통공예전 출품을 비롯해 1980년에서 1994년 사이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과 장려상, 문화체육부장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1995년에는 노동부 등죽세공예 명장으로 선정된 바 있다. 중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라지만 명장으로서의 경력은 화려하다. <고비>와 <지통>이라는 작품은 현재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북촌에 있을 때 일본 내무대신이 사람을 보내왔어요. 일본은 제아무리 높은 사람이라고 해도 국보급 장인을 만날 때 1년 전에 예약하고 기다리는 문화가 있거든요. 내무대신이 사람을 보내 내 작품을 구입하겠다고 했는데, ‘이건 내 혼이 담긴 것이니 팔 수 없다’고 했어요. 하하하.”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천차만별 다양한 문양으로 해석되는 윤 선생의 작품 가치는 ‘몇 호에 얼마’ 하는 식으로 매겨지는 미술작품의 그것과는 다르게 매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하지만 그는 작품을 건네주며 액수를 언급하지 않는다.

가격은 작품을 받아가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스스로 작품 가격을 책정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오죽장’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15시간 이상 꼬박 작업을 하면서도 1년 전에 주문받은 반상 마무리를 서두르지 않는 그는 지난 세월과 함께 대나무의 성정(性情)을 닮아버린 듯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칠십 평생을 넘게 살아도 세상에 당최 적응이 안된다고 한다.

“나도 한때는 돈방석에 앉았었어요.(웃음) 20대 후반에 스위스산 시계를 수입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가 주식으로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지. 뭐하고 살아야 하나 생계가 막막할 때 고물장사들이 즐비했던 황학동 중앙시장에서 고서적 장사를 시작했어요.

리어카에 고서를 숱하게 싣고 다녔죠.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덮어놓고 고서를 사들였는데 그게 돈이 됐어요. 동두천, 인천 일대를 자전거 타고 다니며 책을 사다 팔면서 1년 만에 다시 돈방석에 앉았죠. 그러던 어느 날 수금하러 부여에서 연산으로 가는 길에 어느 집에서 대나무를 캐고 있는 걸 보게 됐어요.

‘왜 대나무를 아깝게 캐서 버리느냐’고 했더니 아무 쓸모도 없고 농작물에 피해만 준다고 하더군요. 그게 아까워서 몇 줄기 얻어온 게 시작이었어요. 전국에 뿌려 논 책 수금도 포기하고 대나무를 구하려 다녔으니까요.”

왜 그랬었는지 그도 정확히 모른다. 그 후 그는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각종 대나무를 구해 연구했다. 대한민국을 다섯 바퀴는 족히 돌았단다. 질 좋은 대나무가 많은 동해안에서 숲을 헤매다 간첩으로 오인 받은 적도 있다.

“솔직히 그때는 대나무를 모아다 수출할 수 있는 문화상품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때까진 돈 욕심이 있었던 거지. 언젠가 울진에 갔는데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어요. 이웃으로 인접한 두 집에 각기 다른 종류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충분히 섞여 자랄 수 있는 환경인데도 각각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자라고 있었어요.

식물도 저렇게 자기 위치를 지키는데 나는 지금껏 뭐했나 싶었죠. 돈에 미쳐 돈만 좇고 살았던 게 부끄러웠지. 거기서 나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 대나무를 다뤄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렇게 시작한 죽세공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진 오죽에 관한 한 고증도 없고 문헌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름 좀 알려졌다 하는 죽세공을 찾아 전국을 다녀봤지만 어느 누구도 오죽을 자유자재로 만질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하나하나 독학하며 눈으로, 손으로 익혀가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오죽 하나 보고 살다 보니 가족과 평범한 생활을 하기도 힘들었다. 생활을 뒷전으로 미룬 가장을 그저 예술가로 봐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가족 얘기를 묻자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오래전에 내가 버렸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에게 오죽은 그가 일상의 행복과 맞바꾼 또 다른 행복인 듯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 아시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선생님 작품은 보면 볼수록 무한한 아름다움이 배어나오거든요. 그야말로 ‘내추럴 뷰티(natural beauty)’죠. 제가 성형외과 의사지만 최고의 성형 역시도 자연미입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나 자연 그대로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 윤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꼭 그런 것 같아요. 오죽이 가지는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작품으로 태어났을 때 더욱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발하거든요. 선생님의 꿈이 지금은 저와 어머니의 꿈이기도 합니다. 전시관 개관을 할 때까지 있는 힘껏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서로 마주 보며 ‘허허’ 웃는 두 사람은 분명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 유일의 우리 전통, 그 자취를 보존하고 싶은 바람. 한 사람은 그 꿈을 위해 오늘도 하루 15시간씩 굽은 손가락으로 오죽을 다루고, 또 한 사람은 오죽세공 예술과 오죽장 윤병훈을 알리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인터뷰를 마치고 인천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때를 넘긴 위장은 줄 것을 달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지만, 이유 모를 충만감에 적어도 그날만큼은 그 아우성을 무시하고 싶었다.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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