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시장] 미 금융사, 빚 줄이기 주력…투자자들은 금·채권에 집중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진 지 2년이 지났지만 전 세계 금융시장에는 충격의 여파가 남아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큰 금융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두고 여전히 논란을 벌이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은행이 어려움에 빠지면 구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다.

자산규모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6000억 달러)의 파산은 채권자, 거래상대방, 고객 등을 포함해 6만5000건의 피해 사례가 접수될 정도였다. 파생상품과 관련 장부를 정리하는 데만 20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이해관계자 간 끝없는 소송과 사실관계 확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월가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다. 예전같이 차입을 통한 레버리지 거래를 통해 단기 수익을 좇긴 어렵게 됐지만 인수·합병(M&A) 시장이 기지개를 켜고 있고 채권과 주식 트레이딩으로 상당한 수익을 내고 있다.

하지만 은행들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저금리 정책 덕을 가장 많이 보고 있다. 2008년 12월 금융위기 여파로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자 FRB는 금리를 사실상 제로 수준으로 낮추고 시장에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는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했다.

명목 금리를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상황에서 돈의 양을 늘려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FRB가 2008년 12월부터 매입한 자산은 국채 3000억 달러, 모기지 증권 1조2500억 달러, 정부기관채 1750억 달러 등 총 1조7250억 달러에 달한다. FRB의 대차대조표상 자산규모가 2조3700억 달러에 달한다.

금융위기 이후 월가 금융사들은 디레버리징(차입 축소)에 주력하고 있다. 대출 확대와 증권 매입을 통해 자산을 늘리기보다는 준비금을 쌓는 데 힘쓰고 있다. 미 금융산업의 레버리지는 1990년대 이후 장기 추세선을 과도하게 넘어섰다. 규제 완화, 금융 혁신, 증권화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 투자은행(IB)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대 경제학 교수와 함께 <이번에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를 쓴 카르멘 라인하르트 메릴랜드대 교수는 “대공황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사례를 분석한 결과 은행 레버리지는 위기 전 10년 평균 38.4% 증가했지만 위기 이후 10년 동안 연 평균 37.7% 감소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상당기간 은행의 디레버리지 현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7월 금융개혁법이 통과되면서 각종 규제를 따르려면 레버리지를 줄일 수밖에 없다. 대형 은행들은 자기 매매를 할 수 없게 됐고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투자를 자기자본의 3% 이내로 낮춰야 한다. 또 원자재 스와프 거래와 신용부도스와프(CDS) 등 파생상품 거래를 예금은행으로부터 분리하도록 했다. 은행의 과도한 위험 추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금융위기는 일단 발생하면 전염이 빠르다는 점을 감안해 또 다른 금융위기를 막는다는 취지에서 강화된 국제자본 요건인 바젤Ⅲ도 마련됐다. 기존에는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위험가중 자산 대비 일정 비율 이상의 자기자본을 보유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위험 자산을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보통 자본(common stock)’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국제 거래를 하는 대형 은행들은 대략 자산의 7%에 해당하는 보통자본을 유보해야 한다. 예전처럼 후순위 채권 같은 것은 자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미국에서 대형 은행에 대한 자산건전성 평가(스트레스 테스트)를 할 때는 보통자본 4%를 기준으로 우량 정도를 따진 만큼 훨씬 강화된 룰이라고 할 수 있다.

은행들은 2019년 1월까지 이 기준을 충족하면 된다. 시간을 많이 벌게 된 데다 당초 예상보다 규제 정도가 세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각국 간 의견차가 워낙 큰 탓에 유동성 규제는 2015년 이후에 논의하기로 유보했다.

경기가 좋을 때 더 많은 유보금을 쌓도록 하는 방안은 각국에서 알아서 도입하기로 했다. 일각에서는 이 정도 규제로 또 다른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번에 마련된 바젤Ⅲ 안은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최종 승인을 받아 적용하게 된다.

전후 최악의 금융위기는 돈의 흐름도 바꿨다. 물가가 안정된 가운데 저성장이 지속될 것이란 전망에 따라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심화되며 최근에는 채권 시장 버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6월 말까지 최근 2년간 채권형 펀드로 유입된 자금은 4802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인터넷 거품 때인 1999년부터 2000년 사이 주식형 펀드에 유입된 자금(4969억 달러)에 육박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자금 유입으로 2년 만기 미 국채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전반적인 채권 금리가 속락했다. 반면 미 투자회사협회(ICI)에 따르면 2008년 1월부터 올 6월까지 주식형 펀드에서 빠져나간 자금은 2320억 달러에 달한다.


채권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자 철도회사인 노르폴크서던은 2105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최장기 채권 1억 달러어치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사는 2005년에도 100년 만기 장기 채권 3억 달러어치를 6% 금리로 발행한 바 있다.

또 국채 외에도 투자등급 이후 기업채에도 자금이 몰리고 있다. 고수익 연구회사인 가먼리서치의 크리스토퍼 가먼 사장은 “투자자들은 FRB가 상당 기간 제로 수준의 저금리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고수익 채권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권 시장이 과열 양상을 띠고 있는데도 채권부도 위험을 예방하는 CDS 가격은 떨어지고 있다. 단기적인 부침은 있었지만 그만큼 채권 투자 열기가 뜨겁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세계 최대 채권회사인 핌코는 내년 상반기까지 미국 경제 회복이 미약할 것으로 보고 초금리 현상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해 투자 전략을 세워왔다.

하지만 조엘 레빙턴 브룩필드인베스트먼트매니지먼트 이사는 “채권 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언제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거품은 터지게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주식시장에서는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한 이후 발생한 손실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다우지수는 위기 발발 전보다 900포인트 이상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특히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미국 금융주들은 2년 전보다 3분의 1가량 낮은 수준이다.

선진국 증시에서 자금이 빠져나가 신흥시장 국가로 유입되는 현상도 가속화됐다. EPFR글로벌의 집계에 따르면 2008년 8월 이래 전 세계 투자자들은 선진국·주식 자금 중 230억 달러를 빼내갔다.

이는 당시 선진국 주식 자금 2조4000억 달러의 8.5%에 달하는 수준이다. 대신 신흥시장의 주식 투자 자금은 크게 늘었다. 이는 투자자들이 위험을 감수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 신흥시장이 낮은 부채 수준 등으로 인해 선진국 대신 전 세계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역할을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금은 금융위기 재발 가능성에 대비해 ‘보험’을 찾는 투자자들이 늘어난 데다 장기 인플레이션 가능성과 저금리 등으로 인해 가격이 64%나 치솟았다. 스트래티거스 리서치 파트너스의 수석투자전략가인 제이슨 디세나 트렌너트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여파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며 “투자자들의 행태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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