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e Story] 빨간 론에서 발견한 하얀 보석들, ‘비오니에, 마르산, 루산’
입력 2010-08-13 13:23:16
수정 2010-08-13 13:23:16
저마다 소중한 기억을 품고 있는 와인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샹트 알루에트’,‘뵈브 클리코 라 그랑담 1995(Veuve Clicquot, La Grande Dame 1995)’,‘르 파비용 뒤 샤토 마르고 2000’이 그렇다.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이들은 단 한 모금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와인들이다.
최근 들어 와인 시장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샤르도네, 리슬링, 소비뇽 블랑 등의 대표적인 화이트 품종을 충분히 섭렵한 애호가들의 관심이 서서히 새로운 품종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고뉴 와인이 국내에서 퍼져 나갈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몇몇 대형 와이너리의 와인 외에는 수입되지 않던 론의 와인이 최근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더욱 반가운 것은 최근 수입되는 와인들이 레드 와인을 앞세운 도멘(Domaine)이 아니라 화이트 와인에서 이름 높은 도멘들이라는 사실이다.
보르도, 부르고뉴에 이어 프랑스의 세 번째 와인 산지로 손꼽히는 론은 크게 대륙성 기후의 북부 론과 지중해성 기후의 남부 론으로 나뉜다. 론 와인 생산량의 90%는 남부 론 와인이 차지하지만 오늘날 시라(Syrah)로 대표되는 이곳의 명성은 코트 로티(Cote Rotie), 에르미타주(Hermitage)가 있는 북부 론 덕택이다.
코트 로티, 콩드리외(Condrieu), 샤토 그리예(Ch. Grillet)로 이어지는 이곳 북부 론에서는 오직 레드 와인용으로는 시라, 화이트 와인은 비오니에(Viognier), 마르산(Marsanne), 루산(Roussanne) 등을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이들 세 품종에 자연스레 ‘론의 화이트 와인 삼총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수확량이 많지 않고 재배나 양조에 있어 수월하지 않아 이들 삼총사는 아직 여타 화이트 품종처럼 신대륙으로의 진출이 활발하지 않다. 때문에 대중적인 지명도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최고의 화이트 와인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들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콩드리외와 샤토 그리예, 비오니에를 말하다
북쪽부터 시작되는 원산지 순서에 따라 소개 순서를 정하자면 비오니에가 먼저다. 원산지 규정상 코트 로티는 레드만이 가능하지만 최고 20%까지 비오니에를 시라와 섞을 수 있다.
코트 로티의 유명한 ‘라라라 시리즈(이 기갈의 라 랑돈느, 라 물랭, 라 튀르크)’ 중 100% 시라만 사용해 만든 와인은 라 랑돈느뿐이고 나머지 두 와인에는 모두 비오니에가 섞인다.
비오니에가 억센 시라를 부드럽게 만드는 보조 역할을 떠나 그 매력적인 자태를 맘껏 뽐내는 최적지는 콩드리외와 샤토 그리예다. 이곳 와인은 100% 비오니에만을 가지고 와인을 만든다.
비탈진 포도밭에서 풍부한 햇볕을 받으며 자란 비오니에의 매력은 누가 뭐래도 화려한 향이다. 덕분에 삼총사 품종 중 가장 국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호주에서 비오니에는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비오니에를 두고 일부 와인 애호가들은 글래머러스한 할리우드의 여배우를 들먹인다.
샤토 그리예의 샤토 그리예, 콩드리외에서는 이 기갈의 라 도리안느, 앙드레 페레의 코트 드 셰리(Coteau de Chery), 조르주 베르네의 코트 드 베르농(Coteau de Vernon), 이브 퀴에롱의 레 샤이레 비에유 비뉴(les Chaillets Vieielles Vignes)를 먼저 맛본다면 그들의 표현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에르미타주, 마르산의 성지
에르미타주의 화이트 와인은 와인 좋아하기로 유명했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일찍이 프랑스 최고의 화이트 와인이라 극찬한 바 있지만 레드의 명성이 워낙에 탄탄하다 보니 늘 뒷전에 밀려 있었다.
폴 자불레 에네가 최근 1962년산을 끝으로 생산을 중단했던 ‘라 샤펠 블랑(La Chapelle Blanc)’을 부활시켰다는 점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이 와인은 대부분 함께 블렌딩되는 경우가 잦아 샴쌍둥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마르산과 루산이 각각 80%, 20%씩 사용됐다.
이 기갈의 에르미타주 블랑 엑스 보토, 장 루이 샤브의 에르미타주 블랑 역시 마르산을 중심으로 루산과 블렌딩해 전 세계 화이트 와인 애호가들의 지갑을 열게 하고 있다.
반면 엠 샤푸티에(M. Chapoutier)의 행보는 남다르다. 로버트 파커가 100년 이상의 숙성력을 지녔다고 극찬한 레르미트 2003(L’Ermite 2003)를 비롯해 드 로레(de l’Oree), 르 메알(Le Meal), 샹트 알루에트(Chante Alouette)는 모두 이곳의 100% 마르산으로 만든 와인이다.
언젠가 이 회사 관계자에게 루산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산화’에 쉽게 노출되는 단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정황을 살펴봐도 에르미타주 블랑의 성공 여부는 마르산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산의 독주가 펼쳐지건, 루산의 보조를 받건 에르미타주 블랑의 정수는 10년 이상의 인내를 거친 자에게만 허락된다.
샤토뇌프 뒤 파프, 루산을 안아주다
오즈 클라크는 그의 책 <포도품종 대백과>에서 루산을 두고 마르산보다 더 스타일리시하고 우아하며 복합적인 향을 내는 품종이라 추켜세웠다.
이와 함께 그는 루산이 다루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아 포도 재배업자나 양조업자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사실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뿌리째 뽑혔던 루산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르산였다.
루산이 오늘날 이렇게 번듯하게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부 론, 특히 샤토뇌프 뒤 파프(Chateauneuf-du-Pape)의 공이 크다. 이 원산지에서만큼은 늘 붙어 다니며 루산의 기를 죽였던 마르산의 입장이 아예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마르산을 블렌딩하면 샤토뇌프 뒤 파프라는 원산지 이름을 쓸 수 없다. 루산은 이곳에서 와인의 몸집을 잡아주는 중추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큰 목소리를 낸다.
샤토 드 보카스텔 루산 비에유 비뉴(Ch.de Beaucastel Roussanne Vieilles Vignes)는 루산 100%로 만든 귀한 와인이다. 쏟아지는 찬사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중 프랑스 아세트 출판사의 <와인 가이드> 평은 루산과 이 품종만을 사용해 만든 이 와인을 가장 잘 소개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만남이 있는 것처럼 와인도 당신의 미각에 각인되는 게 있다. 샤토 드 보카스텔이 바로 그런 와인으로 단번에 우리의 넋을 잃게 만든다. 고급스러운 색깔에서부터 잠시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화려한 향까지 모든 게 다 예술이다. 이 원숙한 맛은 일종의 미각적 오르가슴이다!”
글 김혜주 알덴테북스 대표
사진 제공 신동와인, 나라식품, 아영FBC, 소펙사
최근 들어 와인 시장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샤르도네, 리슬링, 소비뇽 블랑 등의 대표적인 화이트 품종을 충분히 섭렵한 애호가들의 관심이 서서히 새로운 품종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고뉴 와인이 국내에서 퍼져 나갈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몇몇 대형 와이너리의 와인 외에는 수입되지 않던 론의 와인이 최근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더욱 반가운 것은 최근 수입되는 와인들이 레드 와인을 앞세운 도멘(Domaine)이 아니라 화이트 와인에서 이름 높은 도멘들이라는 사실이다.
보르도, 부르고뉴에 이어 프랑스의 세 번째 와인 산지로 손꼽히는 론은 크게 대륙성 기후의 북부 론과 지중해성 기후의 남부 론으로 나뉜다. 론 와인 생산량의 90%는 남부 론 와인이 차지하지만 오늘날 시라(Syrah)로 대표되는 이곳의 명성은 코트 로티(Cote Rotie), 에르미타주(Hermitage)가 있는 북부 론 덕택이다.
코트 로티, 콩드리외(Condrieu), 샤토 그리예(Ch. Grillet)로 이어지는 이곳 북부 론에서는 오직 레드 와인용으로는 시라, 화이트 와인은 비오니에(Viognier), 마르산(Marsanne), 루산(Roussanne) 등을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이들 세 품종에 자연스레 ‘론의 화이트 와인 삼총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수확량이 많지 않고 재배나 양조에 있어 수월하지 않아 이들 삼총사는 아직 여타 화이트 품종처럼 신대륙으로의 진출이 활발하지 않다. 때문에 대중적인 지명도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최고의 화이트 와인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들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콩드리외와 샤토 그리예, 비오니에를 말하다
북쪽부터 시작되는 원산지 순서에 따라 소개 순서를 정하자면 비오니에가 먼저다. 원산지 규정상 코트 로티는 레드만이 가능하지만 최고 20%까지 비오니에를 시라와 섞을 수 있다.
코트 로티의 유명한 ‘라라라 시리즈(이 기갈의 라 랑돈느, 라 물랭, 라 튀르크)’ 중 100% 시라만 사용해 만든 와인은 라 랑돈느뿐이고 나머지 두 와인에는 모두 비오니에가 섞인다.
비오니에가 억센 시라를 부드럽게 만드는 보조 역할을 떠나 그 매력적인 자태를 맘껏 뽐내는 최적지는 콩드리외와 샤토 그리예다. 이곳 와인은 100% 비오니에만을 가지고 와인을 만든다.
비탈진 포도밭에서 풍부한 햇볕을 받으며 자란 비오니에의 매력은 누가 뭐래도 화려한 향이다. 덕분에 삼총사 품종 중 가장 국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호주에서 비오니에는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비오니에를 두고 일부 와인 애호가들은 글래머러스한 할리우드의 여배우를 들먹인다.
샤토 그리예의 샤토 그리예, 콩드리외에서는 이 기갈의 라 도리안느, 앙드레 페레의 코트 드 셰리(Coteau de Chery), 조르주 베르네의 코트 드 베르농(Coteau de Vernon), 이브 퀴에롱의 레 샤이레 비에유 비뉴(les Chaillets Vieielles Vignes)를 먼저 맛본다면 그들의 표현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에르미타주, 마르산의 성지
에르미타주의 화이트 와인은 와인 좋아하기로 유명했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일찍이 프랑스 최고의 화이트 와인이라 극찬한 바 있지만 레드의 명성이 워낙에 탄탄하다 보니 늘 뒷전에 밀려 있었다.
폴 자불레 에네가 최근 1962년산을 끝으로 생산을 중단했던 ‘라 샤펠 블랑(La Chapelle Blanc)’을 부활시켰다는 점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이 와인은 대부분 함께 블렌딩되는 경우가 잦아 샴쌍둥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마르산과 루산이 각각 80%, 20%씩 사용됐다.
이 기갈의 에르미타주 블랑 엑스 보토, 장 루이 샤브의 에르미타주 블랑 역시 마르산을 중심으로 루산과 블렌딩해 전 세계 화이트 와인 애호가들의 지갑을 열게 하고 있다.
반면 엠 샤푸티에(M. Chapoutier)의 행보는 남다르다. 로버트 파커가 100년 이상의 숙성력을 지녔다고 극찬한 레르미트 2003(L’Ermite 2003)를 비롯해 드 로레(de l’Oree), 르 메알(Le Meal), 샹트 알루에트(Chante Alouette)는 모두 이곳의 100% 마르산으로 만든 와인이다.
언젠가 이 회사 관계자에게 루산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산화’에 쉽게 노출되는 단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정황을 살펴봐도 에르미타주 블랑의 성공 여부는 마르산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산의 독주가 펼쳐지건, 루산의 보조를 받건 에르미타주 블랑의 정수는 10년 이상의 인내를 거친 자에게만 허락된다.
샤토뇌프 뒤 파프, 루산을 안아주다
오즈 클라크는 그의 책 <포도품종 대백과>에서 루산을 두고 마르산보다 더 스타일리시하고 우아하며 복합적인 향을 내는 품종이라 추켜세웠다.
이와 함께 그는 루산이 다루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아 포도 재배업자나 양조업자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사실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뿌리째 뽑혔던 루산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르산였다.
루산이 오늘날 이렇게 번듯하게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부 론, 특히 샤토뇌프 뒤 파프(Chateauneuf-du-Pape)의 공이 크다. 이 원산지에서만큼은 늘 붙어 다니며 루산의 기를 죽였던 마르산의 입장이 아예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마르산을 블렌딩하면 샤토뇌프 뒤 파프라는 원산지 이름을 쓸 수 없다. 루산은 이곳에서 와인의 몸집을 잡아주는 중추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큰 목소리를 낸다.
샤토 드 보카스텔 루산 비에유 비뉴(Ch.de Beaucastel Roussanne Vieilles Vignes)는 루산 100%로 만든 귀한 와인이다. 쏟아지는 찬사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중 프랑스 아세트 출판사의 <와인 가이드> 평은 루산과 이 품종만을 사용해 만든 이 와인을 가장 잘 소개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만남이 있는 것처럼 와인도 당신의 미각에 각인되는 게 있다. 샤토 드 보카스텔이 바로 그런 와인으로 단번에 우리의 넋을 잃게 만든다. 고급스러운 색깔에서부터 잠시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화려한 향까지 모든 게 다 예술이다. 이 원숙한 맛은 일종의 미각적 오르가슴이다!”
글 김혜주 알덴테북스 대표
사진 제공 신동와인, 나라식품, 아영FBC, 소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