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들의 선택, ‘Limited Edition’
제한된 소수만이 소유할 수 있어 그 가치가 더 빛나는 제품, 이른바 ‘한정판(리미티드 에디션)’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
수백 년 역사를 지닌 명품 시계부터 차마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면서 보는 것만으로 흐뭇해지는 위스키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한정판’, 그 아이템들의 주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명품 브랜드들이 한정판을 선보이는 것은 마케팅의 일환이다. 희귀한 아이템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스릴에 매료된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데는 그 이상의 마케팅 수단도 없다.
최근 K옥션에는 25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바쉐론 콘스탄틴’의 회중시계 하나가 출품돼 화제가 됐다. 5000만 원에서 시작된 이 시계의 경매는 결국 1억2500만 원에 낙찰됐다. 물론 낙찰의 주인공은 비밀에 부쳐졌다.
이 시계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회중시계의 뒷면에는 황실의 문장이나 국장의 용도로 사용됐다고 전해지는 ‘이화문(李花文)’ 이 새겨져 있다.
또 시계 뒤편의 뚜껑을 열면 이 제품을 만든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가치를 더했다.
3월 10일 단 하루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이 시계의 경매에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200 대 1이 넘는 경쟁을 뚫고 시계를 손에 넣은 주인공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보면 한정판의 매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십억 원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
지난 5월 13일 서울 청담동 ‘에르메네질도 제냐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는 내장객들로 북적였다. 전 세계 20개 매장에서 이날부터 본격 판매에 들어간 에르메네질도 제냐(이하 제냐) 100주년 기념 한정판 제품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제냐코리아 마케팅 담당자는 “제냐가 처음 내놓는 한정판이어서인지 마니아들의 문의가 끊이질 않았다”며 “이번 한정판 시계와 만년필, 커프스링크 모두 100개씩만 제작됐으며, 한국에 들어오는 물품의 수는 세 개뿐이라 더 이상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 인기의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한정판 시계 중 한 개는 이미 올해 초에 예약 판매됐다”고 귀띔해 줬다. VIP를 대상으로 한 한정판 프리뷰 이벤트 때 눈도장을 찍어둔 고객이 미리 예약을 해 뒀다가 4개월여를 기다린 끝에 시계를 손에 넣었다는 것.
제냐 측은 이번 한정판 제품을 구입하고자 하는 고객에 한해 개별 미팅(고객 상담 시간)을 따로 잡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 한정판 마케팅이 특히 자주 활용되는 아이템은 시계다.
명품 시계 업체들은 1년에 단 몇 개만 제작하는 한정판 시계로 마니아들의 환심 사기에 주력한다. 특히 희귀한 시계들을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는 오데마 피게(이하 AP)의 경우 마니아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AP의 마케팅 담당자는 “아놀드 올스타즈의 경우 국내에는 상품 출시 기사가 단 한 건도 나지 않은 상황에서 해외 기사를 접한 교포가 예약 구매를 했다”며 “기사가 난 뒤에는 많은 고객들이 선불로 그 제품을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심지어 공식 판매 가격에 웃돈을 얹어서라도 반드시 구매하겠다는 고객까지 있었다”고 귀띔했다.
AP의 마케팅 담당자를 통해 한정판 마니아들의 재미난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었다. AP의 한정판을 구입했던 국내의 한 고객이 해외 여행길에서 외국인 AP 마니아를 만나 시계 교환 제의를 받았다는 것. 이 외국인은 자신의 시계 수집 리스트를 보여주며 어떤 것을 골라도 좋으니, 차고 있는 시계와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VVIP 고객들은 어느 정도 가격대 제품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일까. AP의 마케팅 담당자는 “마니아들의 대부분이 10개 이상은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AP에서 판매된 시계의 최저 가격은 1700만 원, 최고가는 11억 원이 넘는다는 점에서 AP의 VVIP들은 금액으로 최저 수십억 원에 달하는 제품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외신 보고 먼저 연락, 시리얼 넘버 확보 경쟁
국내에 들어오는 한정판 제품들의 수는 대부분 많아야 세 개 내외다. 하지만 국내에서의 인기가 높을수록 더 많은 양이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일례로 몽블랑에서 매년 선보이고 있는 ‘문화예술 후원자 펜’의 경우 처음 제작한 1992년에는 국내에 한 개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몽블랑에서 제작한 ‘엘리자베스 4810’은 전체 4810개 중 약 80개가 국내에 들어왔다.
특히 80여 개의 제품 중 이미 절반 이상은 예약 판매 등으로 판매가 완료됐다. 해외 뉴스를 통해 문화예술 후원자 펜 출품 소식을 접한 몽블랑 마니아들이 제품이 국내에 들어오기 몇 개월 전부터 몽블랑 본사에 제품 구입을 예약한 결과다.
몽블랑 측에서는 “미리 연락을 통해 구입 의사를 밝히는 고객들이 상당히 많다”면서 “일부 구입 고객들은 컬렉션을 위해 제품 포장을 뜯지 않고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8000만 원 상당 위스키, 酒 테크 수단으로
아직 그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얼마 전부터 국내에서도 위스키와 와인 등이 재테크나 컬렉션 대상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12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싱글 몰트 위스키 브랜드 ‘글렌피딕’은 올해 초 1년에 50병만 생산되는 ‘글렌피딕 50년산’을 출시했다. 국내에 들어온 글렌피딕 50년산은 단 두 병. 한 병에 3000만 원 가까운 고가의 한정판이었지만, 국내 론칭 행사를 앞두고 순식간에 판매가 완료돼 행사가 취소됐다.
글렌피딕 50년산은 병과 케이스, 은으로 장식된 로고까지 수공 제작됐으며, 생산에 참여한 장인들의 자필 서명이 담긴 보증서까지 포함돼 있다.
글렌피딕 홍보 담당자는 “이미 지난해부터 외신을 접한 국내 주류 마니아들의 구입 문의가 쇄도했다”며 “판매 완료된 후에도 구입하고 싶다는 문의가 많았으나, 국내에 추가로 들어올 분량이 전무해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일부 고객들은 누가 구입해 갔는지를 물어보며, 재판매 가능 여부를 타진하기도 했다고.
글렌피딕 50년산은 2008년을 시작으로 연간 50병씩, 앞으로 9년간 매년 50병을 추가로 선보여 10년간 총 500병이 한정 출시될 계획이다. 싱글 몰트의 특징상 50년 전 숙성시킨 술들은 1년에 1~2% 이상 자연 기화돼, 50년이 지난 후라면 이미 절반 이상은 줄어든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만들 수도 없다.
글렌피딕 홍보 담당자는 “국내에서도 이제 고급 위스키가 투자의 대상으로 활용되는 것 같다”면서 “특히 등급이 확실한 위스키의 경우 연 20% 이상의 수익을 내는 투자 아이템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글렌피딕 50년산의 경우 일본과 캐나다 등지에서는 경매를 통해 8000만 원 이상의 금액으로 재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글렌피딕 홍보 담당자는 올 연말 두 번째로 생산될 글렌피딕 50년산의 경우 국내에 들여올 수량이 조금 더 늘지 않겠느냐는 낙관적인 예상을 했다.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과도 같은 한정판의 매력은 이처럼 투자 대상으로서의 매력까지 더해지며 점차 그 마니아층을 넓혀가고 있다.
김가희 기자 hol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