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ebrity] 시(詩)를 쓰며 꿈꾸고 노래하는 내 삶이여
입력 2010-06-15 17:02:44
수정 2010-06-15 17:02:44
배우 윤정희
어릴 적 배탈이 나면 할머니 손이 ‘약손’이 되는 연유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굳은살로 뱃가죽에 닿는 느낌이 까칠하기만 했던 그 손이 몇 차례 스치고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통증은 사라지곤 했다. 그때 나이의 곱절이 넘게 세월이 흐른 뒤 내 어머니가 할머니가 됐을 즈음, 어렴풋하게나마 약손의 ‘비밀’에 대한 해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온기(溫氣).’ 그것은 병원에서 주는 약보다 강했다. 배우 윤정희가 16년 만에 수줍게 선보인 영화 <시>가 주는 감동이 꼭 그랬다. 아랫배를 타고 전해오는 할머니 약손의 온기처럼 은근하고 긴 여운. 스크린 밖에서도 꿈을 꾼다는 윤정희는, 천생 ‘여배우’다.
“카메라 앞에서는 ‘윤정희’지만 촬영장만 벗어나면 ‘손미자(윤정희의 본명)’로 살아요. 자랑 같지만 내가 요리도 좀 잘하는데, 아직도 (파리에서) 멸치젓을 담가 김치를 담가요. 우리 집에 가면 담근 연도를 적어 붙여둔 멸치젓 통이 가득하지.
거기(파리)서 손님 치를 때도 그냥 한국식으로 해요. 김치찌개, 된장찌개, 부침개 몇 가지에 불고기만 차려내면 외국 손님들은 그냥 ‘뿅’ 간다니까. 하하.”
며칠째 비가 내려 우중충했던 서울 하늘에 반짝 햇살이 비친 날,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대한민국 여배우의 ‘전설’ 윤정희는 영락없는 ‘큰언니’ 손미자 씨였다. 남편(피아니스트 백건우)과 집에서 벌이는 ‘요리 경쟁’이 결국 딸의 입만 호사시키고 있다는 푸념 속에 묻어나오는, 저 멀리 프랑스 파리에서 날아온 행복의 냄새가 명품 향수의 향보다 진하다.
윤정희는 1966년 1200대 1이라는 경이적인 경쟁률을 뚫고 합동영화주식회사의 신인배우 오디션에 합격하며 히트작 <청춘극장>의 주인공으로 데뷔해 196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계보를 출발시킨 주인공이다.
<청춘극장>으로 1967년 대종상 신인상을 거머쥔 뒤 출연한 작품이 330편. 그 가운데 325편은 그가 주인공이었다. 또한 25회에 걸친 최다 여우주연상, 1969년 최초 할리우드 진출(영화 <여진족>), 최초의 석사 여배우 등 한국 영화사에 기록된 수많은 ‘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원로배우 김희라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타공인 ‘대한민국 국보급’ 여배우다.
그 국보급 여배우가 1994년 <만무방> 이후 장장 16년 만에 한국 영화에 출연했다. 그의 오랜 침묵을 깬 주인공은 이창동 감독. 오직 ‘윤정희’만을 염두에 두고 쓰기 시작한 작품 <시>의 시나리오를 받아보던 날, 여배우의 가슴은 밤새도록 뛰었다고 한다.
너무도 닮아서 되려 어려웠던 여자, ‘미자’
개봉되기도 전에 2010년 제63회 칸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진출,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시>를 통해 우리는 스크린 안의 윤정희를 만날 수 있다. 극중 ‘미자’와 윤정희는 실제 나이도 66세로 동갑이다.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소도시. 이혼 후 부산으로 떠나 사는 딸을 대신해 중학생 손자 ‘욱이’를 혼자서 키우고 있는 ‘미자’는 외출할 때 꽃이 달린 모자 하나쯤 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소녀 같은’ 할머니다.
호기심 많고 엉뚱하기도 한 이 할머니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면서 난생 처음 시 쓰기에 도전하게 된다. 시상을 찾기 위해 예순이 넘도록 무심히 지나친 일상을 하나하나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미자’는 삶의 아픔과 그로 인한 응어리를 세상에 토해낼 용기를 내게 된다. 바로 ‘시’를 통해서다. 첫 시사회 직후 여주인공은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운 듯 울먹였다.
첫 시사회인데 보고 난 소감이 어떤가요.
“(한참을 망설인 후) 할 말이 없네요.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항상 작품을 보고 나면 불만이 많아요. 오늘이 첫 시사회인데 시험 치르고 난 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것 같네요. 영화에서 울던 ‘미자’처럼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요.”
어떤 점이 만족스럽지 않았나요.
“뭐든 하고 나면 욕심이 더 생기잖아요. 작품에 대해서는 너무나 만족해요. 연출이 기가 막히잖아요. 이창동 감독은 300편 넘는 작품을 찍은 배우를 재해석했어요. 대단한 거지. ‘미자’라는 역할은 촬영하면서 왜 그리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16년 만의 스크린 컴백인데,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요.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는데, 이번 작품은 ‘제2의 데뷔’라고 생각하고 온 정성을 다했어요. 예전의 윤정희를 잊고 ‘미자 윤정희’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죠. <청춘극장>의 여주인공을 할 땐 오히려 쉬웠던 것 같아요.
첫 작품인데도 금방 빠져들었거든. 그런데 ‘미자’는 나하고 너무 똑같으니까 오히려 빠져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젊을 때보다 역할에 대한 부담감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원래 내가 출연한 영화는 가족과 함께 보지도 않는 사람인데 이번 작품은 남편 앞에서 연기 연습을 했을 정도였거든요. 남편도 그러더라고요. ‘미자’가 어쩜 그렇게 나랑 똑같으냐고요.(웃음)”
‘미자’의 어떤 면이 그렇게 본인과 닮았나요.
“조금 엉뚱하고 늘 꿈을 꾼다는 점이죠. ‘미자’가 큰 잘못을 저지른 손자 문제로 희진이 엄마(극중 손자 ‘욱이’는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했고, 피해 여학생인 희진이는 결국 강물에 투신, 자살한다)에게 다른 학부모들과의 합의를 설득하러 갔을 때 실상 (밭에서 일하는) 희진이 엄마를 만났을 땐 거길 왜 갔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자연이 아름답다며 딴소리만 하고 돌아오잖아요. (웃음)
내가 그렇게 엉뚱한 면이 있어요. ‘미자’도 알츠하이머병 초기라서 그랬다기보단 엉뚱한 면이 있었던 거지. 완전히 꿈속에 빠져 있는 여자, 나랑 비슷해요. 들국화를 봐도 다른 사람들은 오버한다고 느낄 만큼 고함을 지르고 좋아하고, 구름에 가려진 달만 봐도 눈물이 나고 그러거든. 또 ‘미자’처럼 시도 좋아해요.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지 않아요?”
메가폰을 잡은 이창동 감독은 실제로도 ‘(손)미자’인 배우 윤정희에게 특별히 ‘미자’가 되라 주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작품 속 ‘미자’의 자리에 이 여자를 자연스럽게 오버랩시킨 것이 아닐까.
한 신 촬영하고 한 번 안고, 다음 신 촬영하고 또 한 번 부둥켜안으며 감독과 ‘미자’는 그렇게 일치되는 것에 행복해했다. 시쳇말로 ‘4차원’인 여자 ‘미자’ 때문에 감독도, ‘진짜’ 미자도 참 많이 웃고, 또 웃었다고 한다.
장 보는 남편, 요리하는 아내로
화려한 데뷔 후 영화에 논스톱으로 캐스팅되며 고속 행진을 하던 1974년, 대한민국 톱 배우는 스포트라이트 속에서의 7년 생활을 정리하며 돌연 프랑스 유학을 단행했다. 집에서 촬영장으로, 다시 촬영장에서 집으로 이어지던 일상에 쉼표 하나 제대로 찍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놀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2년 후 파리에서 또 하나의 빅뉴스가 들려왔다. 바로 두 살 연하의 재불 피아니스트 백건우와의 결혼이었다. 이후 그는 서울이 아닌 파리에 적을 두게 됐다. 피아노 치는 남편, 연기하는 아내, 바이올린 켜는 딸. 유럽의 어느 화방에 걸린 이름 모를 작가의 유화 속 따뜻한 오브제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한국에서는 너무나 주목받는 삶을 사는 바람에 자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힘들었죠. 촬영장과 집을 오가는 일만 반복했으니까요. (실제로 1971년 한해 출연작을 세어보니 41편에 달했다.) 파리에서는 자가용 대신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데 그래도 행복해요. 남편이랑 전 옷도 아주 편하게 입고 다니는 스타일이에요.
파리가 사실 역사와 예술의 도시로 겉모습이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아주 알찬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의외로 그렇게 검소할 수가 없거든요. 한번은 프랑스경제협회장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자기 성(城)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호예요. ‘건우, 우리 집에 가서 저녁 할래요?’ 하길래 안 그래도 저녁을 집에 가서 해 먹을까 레스토랑에서 해결할까 고민하던 터라 그 사람 집으로 따라갔죠.
그 정도 부잣집에서는 음식도, 와인도 아주 근사하게 차려 먹을 것 같잖아요? 그랬는데 웬걸요. 와이프한테 서프라이즈 해준다고 미리 연락도 안하고 우리를 데려가더니, 저녁상 내오는 걸 보니 우리 집이랑 별반 다를 게 없더라고. (웃음) 와인도 그냥 보통 급이고 집 안을 둘러보니 필요 이상의 사치도 안하더라고요.”
두 분 모두 예술가이고 게다가 파리에 살면서 검소하기 힘들지 않나요.
“내 남편은, 자꾸 ‘내 남편, 내 남편’ 하니까 좀 그러네요. 그냥 ‘건우 백’이라고 할까? (웃음) 하여간 그 사람과 나는 인생관이 잘 맞아요. 소박한 것 좋아하고 집에서 요리해 먹는 것 좋아하고. 그냥 김치찌개, 된장찌개 끓여 먹고 살아요.
카메라 앞에서나 ‘윤정희’지 밖에서는 손미자잖아요. 난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 이해가 안돼요. 우리 부부는 누가 음식을 더 잘하나 경쟁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 딸이 그러더라고요, 엄마 아빠가 음식을 잘 하니 자기는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신난다고. (웃음)”
두 분 대표 메뉴 한번 들어볼까요.
“난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한식을 잘해요. 멸치가 제철일 땐 멸치를 한가득 사다 두는데, 장보기는 남편 담당이에요. 주로 연습하다가 머리 식힐 때 산책도 할 겸 장을 보러 가죠.
남편이 멸치를 사오면 난 소금 뿌려 간해서 멸치젓을 담가요. 우리 집엔 담근 날짜를 적어둔 멸치젓 통이 가득해요. 1~2년 뒀다 적당히 익으면 그걸로 김치를 담가 먹죠. 한국에서 미역이 올 때면 더 좋아요. 멸치젓에 멸치 몇 마리 쫑쫑 썰어 넣고 마늘이랑 파, 참기름으로 버무려 쌈장을 만들면 기가 막힌 미역쌈이 되거든.
외국인 손님 접대도 불고기에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부침개 몇 개만 하면 문제가 없어요. 아주 ‘뿅’ 가지. (웃음) 남편은 스파게티를 아주 잘하는데 저 보단 양식에 강해요. 근데 중요한 건 요리책을 안보고 해도 아주 맛있다는 사실이에요.
무슨 요리든 정통 레시피에 따르기보다는 창작을 하거든. 우리 집에선 식은 밥이 아주 맛있는 비빕밥이나 리조토로 변신도 하고 그래요.”
부부는 살면서 닮는다고 합니다. 두 분은 어떤 부분이 가장 비슷한가요.
“아휴, 너무 닮아도 재미없잖아. 가끔 입국할 때 세관 사람들이 우리더러 엉뚱하게도 얼굴이 닮았다고 하는데, 어디 정말 그래 보여요? 아니지? 그건 아니잖아. (웃음)
대신 남편하고 살면서 배운 게 있는데, 원래 내 성격이 조금 급한 편이에요. 남편은 일할 때는 너무나 철두철미하지만 일할 때 빼곤 아주 느긋한 사람이죠. 살다 보니 제가 좀 느긋해지긴 하더라고요.”
자신을 ‘엉뚱하다’고 했는데, ‘4차원’이란 말 들어봤는지요.
“하하. 그 4차원이란 말, 한국 와서 배웠다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이 나더러 4차원이라는 거야. 그래서 4차원이 도대체 뭔지 인터넷에서 찾아봤지. 그런데 그 뜻과 내가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어서 사람들한테 다시 물어봤더니 엉뚱한 사람을 두고 4차원이라고 한다더군요. 그런데 맞아요. 내가 좀 4차원이긴 해요. (웃음)”
따님이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두 분의 영향이 컸겠죠.
“우리 진희는, 아휴, 이것 또 자랑인데, 글도 아주 잘 써요. 어릴 때부터 일기를 몇 장씩 쓰는데 아주 기가 막혔죠. 글도 잘 썼지만 피아노도 아주 잘 쳤어요.
이 아이 진로를 두고 가족회의를 했었는데, 음악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터라 저널리스트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얘가 ‘엄마, 아빠. 바이올린이 없는 제 인생은 생각할 수조차 없어요’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그렇게 확고하니 ‘오케이’라고 했죠.”
따님에게 자주 해주는 말씀이 있다면요.
“그저 모든 것을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진실 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줘요.”
부모의 예술적 재능을 따님이 물려받지 않았다고 보기 힘들 것 같네요. ‘미인’이라는 프리미엄이 아닌, 배우로서의 ‘필살기’가 있다면요. 선천적인 끼를 타고 난 건가요.
“어릴 적부터 무용, 노래 등을 일찍 접했어요. 무용도 전통에서 발레까지 다 배웠으니까요. 노래하는 것도 참 좋아했었죠. 책 읽는 것도 좋아했는데, 아이 때부터 유독 소설 같은 거 보면 감정이입이 엄청나게 잘 되는 타입이었죠.
그런 것들이 연기를 하는데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 이렇게 마주 앉아서 인터뷰를 하는 것도 영화 속 한 장면 같아요. 너무 아름답잖아. (웃음)”
예순을 훌쩍 넘긴 이 여배우가 여전히 아름다운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노래하고 시를 쓰듯 삶을 즐기는 자세, 세상에는 아직도 충분히 감동받을 일들이 많을 거란 기대 말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페르소나로
윤정희·백건우 부부는 1976년 결혼과 함께 파리에 정착한 후 사는 아파트를 한 번도 옮긴 적이 없단다. 딱 두 번 본 후 ‘평생 헤어지지 말자’며 결혼을 약속해버렸다는 사람들치고는 예상 밖의 진득함(?)이다.
피아니스트 말고 ‘남편 백건우’는 어떤 타입인가요.
“우리 두 사람은 일 욕심이 많은 편이에요. 남편은 일에 관한 한 한 치의 빈틈도 없죠. 너무 철저한 사람이거든. 그런데 일단 일을 떠나면 너무 느긋하고, 아주 수다스럽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웃음)
우리 딸이 그런다니까. 집에서 제일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빠라고. 그래도 참 낭만적인 사람이에요. 우린 서로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아주 자주 잊어버리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백 선생님이 이상형이었나요.
“1972년 올림픽 문화사절단으로 독일 뮌헨에 갔을 때 처음 봤었죠. 그 당시까지 내 이상형은 순수하고, 착하고, 실력 있고, 매력 있는 남자였다고 할까요. (웃음) 솔직히 처음 만났을 땐 남편이 피아니스트인 줄 몰랐고, 남편도 내가 영화배우인 줄 몰랐어요.
그저 한국 사람을 만났으니까 얘기나 조금 했지. 그때 뮌헨에서 윤이상 선생의 오페라 ‘심청’ 공연이 있었는데, 공연장에서 좌석 번호를 찾아서 앉았더니 바로 앞좌석에 남편이 앉아있었어요. 그 다음날 내 영화 <심청이> 상영이 있었는데 윤이상 선생이 그러시더라고, 남편이 촉망받는 훌륭한 피아니스트라고요.
남편은 그때 뮌헨 근방에서 연주회가 있었는데 윤이상 선생 오페라를 보러 왔던 거죠. 이후에 그 사람은 뉴욕으로 돌아가고 난 한국으로 돌아와 무척 바쁘게 살았어요. 그런데 파리로 유학을 간 뒤 우연히 한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난 거예요. 그때만 해도 한국 유학생이 많지 않았고, 가뜩이나 여학생은 내가 유일했지. 남편이 유난히 말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렇게 과묵한 사람이 꽃 장사한테 빨간 꽃 한 송이를 사더니 선물로 주는 거예요. 그때 둘이서 약속했죠. 또다시 헤어지지 말자고. 이게 천생연분이다 싶었죠. (웃음)”
살아 보니 잘 한 선택이다 싶은가요.
“인생관이 비슷하니까 좋아요. 사치 싫어하고 편안한 옷 좋아하고. 남 의식하지 않고 사는 파리 생활이 좋아요. 그러면서도 남편의 예술 세계는 정말 존경해요. ‘우리부부는 참 부자야’ 그래요.
남편은 콘서트 레퍼토리가 80개가 넘고 음악인들에게 존경받는 음악인이거든요. 공연이 끝나면 청중보다는 단원들이 ‘브라보’를 정신없이 외쳐요. 그게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몰라요.”
두 번 만나고 결혼을 결심한 뒤 파리로 유학을 갈 때도 남달랐다던데요.
“그때 좀 웃겼지. 남산에 어린이 극장이 있었는데 사비로 빌려서 프랑스 대사관 사람들을 불러놓고 내 영화를 보여줬어요. 대사한테 ‘프랑스에 가서 영화 공부를 하고 싶으니 대사님, 장학금 좀 주세요’ 그랬더니 대사가 껄껄 웃으면서 그러대요.
이렇게 훌륭한 배우이니 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자기는 대사고, 난 유명 여배우니 돈이 오가면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고요. (웃음) 그래서 그때 장학금 대신 에어프랑스 일등석 티켓을 후원받았어요.”
<시>에서의 노래방 장면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와인글라스’란 곡을 집에서 맹연습했다고 들었습니다.
“나 사실 그 노래 처음 듣는 곡이었어요. 근데 시나리오를 가만히 보니 노래방 사장인 손자 친구 아버지한테 합의금 꾸러 갔다가 기다리며 노래 부르는 장면이 의미가 깊더라고요.
기다리는 동안 돈 꾸러 간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혼자 노래를 부르는 ‘미자’의 엉뚱함도 표출되면서 노래를 하는 동안 ‘미자’가 뿜어내는 끼에서 그 여자의 과거가 자연스럽게 녹아나야겠더라고. 왜 그런 대사 있잖아요.
간병하는 김 노인이 ‘왜 오늘은 안 웃어?’ 하고 물었을 때 미자가 ‘내가 웃으면 사람들이 뿅 가서 안돼요’ 하는. 그래서 잘해야겠다 싶어서 조감독이 녹음해 온 원래 가수(최유나) 노래를 엄청 듣고 따라했지. 마지막엔 그 가수를 찾아가서 개인 교습도 했고. 근데 그렇게 잘 했어요? (웃음) 남편 앞에서도 연습 많이 했거든요.”
집에서 가족하고는 출연작도 안본다고 들었는데 노래 연습을 했다고요.
“네, 그만큼 잘하고 싶었으니까요. 파리에서 한국 영화제 하고 그럴 땐 가족과 같이 가서 보기도 해요. 집에서 DVD를 절대 못 보게 하지. 왠지 쑥스럽고 편치 않더라고. 어쨌든 집에서는 내 영화를 안 봤으면 해요.”
내놓기 그렇게 쑥스럽다는 아내의 영화를 보기 위해 남편은 기꺼이 파리에서 서울로 날아왔다. 남편의 총평은 “미자는 너무나 아내와 닮았다”는 것. 영원히 꿈꾸고 싶고, 언제나 시를 쓰고 싶다는 이 여배우는 그가 분했던 수많은 페르소나(persona)를 뒤로 하고, 어제와 오늘 사이에도 성급한 ‘진화’를 거듭할 것 같다.
글 장헌주·사진 김기남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