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기 그지없는 ‘늦깎이’ 나눔의 삶”

디자이너 박윤수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영영 철이 들고 싶지 않다는 박윤수 디자이너. 불굴의 ‘청년 정신’으로 패션에서도, 액티브한 삶에서도 ‘지존’을 지켜온 그가 이태 전부터 조용히 ‘철’이 들어버렸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나눔’을 통해 그가 또 한 차례 성숙한 것.

디자이너의 길 30년, 디자이너로서의 그는 아직도 ‘청년’이다. ‘이립(而立)’의 시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니 부럽다. ‘이립의 숙제’를 그는 아주 우연히, 그리고 간단히 풀었다고.

디자이너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 가운데 하나다. ‘에고(ego)’가 강한 직업의 소유자를 편하게 대하려면, 일종의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윤수 디자이너를 만나러 가는 길도 그랬다. 엘리베이터를 따라 내리며 “오셨어요?”라는, 마치 구면의 손님을 맞는 인사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티셔츠·가방·머그잔에 담아낸 행복

스스로를 ‘여백의 디자이너’, ‘소통의 디자이너’라고 표현하는 박윤수 디자이너는 내년에 데뷔 30년을 맞는다. 크리에이터로서의 고민을 녹여낸 수많은 작품들은 SFAA 서울컬렉션에만도 40여 차례 올려졌다. 업계에서는 그런 그를 두고 SFAA 서울컬렉션 ‘개근상’을 논한다. 대중과의 끊임없는 소통의 결과다.

소탈한 인사말로 시작된 대화는 본론에 앞서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본업인 패션 디자인 외에 취미로 배우는 사진과 스포츠댄스, 자전거 타기까지... 얘기를 듣다보니 그의 일상에는 정작 그가 좋아한다는 ‘여백’, 혹은 여유를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지독한’ 아침형 인간에다, 부지런함까지 타고난 탓이다.

스포츠댄스를 설명할 땐 기꺼이 ‘몸’을 설명에 동원하고, 자전거 얘기를 할 땐 사무실 입구에 서 있는 자전거가 동원된다. 그런데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그의 열정 어린 설명만큼이나 재미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가 입고 있는 옷이다. 당연히 디자이너 박윤수 자신의 작품이다.

“참 신기한 것이 이 옷만 입으면 안 되던 일도 술술 풀려요(웃음). 취미를 함께 하는 모임에 검찰청 고위 인사도 있고 CEO도 있는데 이 셔츠를 보면 무슨 그림이냐고 꼭 물어보거든요.

가끔 선물도 하는데 아이들의 맑은 영혼이 좋은 에너지를 전해서 그런지 이 셔츠만 입으면 일이 잘 풀려요. 중대한 일이 있을 땐 빨강색 속옷을 입는데(웃음) 이 셔츠도 챙겨 입어야 한다니까요. 하하하….”

패딩 조끼 아래 셔츠의 원조(?) 디자이너는 사실 멕시코에 있다. 두 해 전부터 한국컴패션을 통해 그가 후원을 해주고 있는 한 아이가 그 주인공이다. 국제아동양육단체인 컴패션(Compassion)을 통해 그의 후원을 받고 있는 아이는 10명. 셔츠의 독특한 프린트는 아이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와 카드 속의 그림에서 비롯됐다.

“일만 했지 나눔이 뭔지 모르고 살았죠. 2년 전 어느 날 지인이 갑자기 컴패션 후원자의 밤에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따라가 봤는데 부끄럽더군요. 몇 해 전 북한에 갔을 때도 너무도 가난한 삶에 찌들린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안 좋았던 일이 있었어요.

그제야 할 일을 찾았다고 할까요? 그 자리에서 바로 10명 후원을 약속했죠(웃음). 필리핀, 태국, 아프리카 등지의 예닐곱살 아이들이에요. 어느 날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이 보낸 카드그림을 바닥에 죽 펼쳐놓고 보는데 그림이 살아 움직이더라고요. ‘저거다!’ 싶었죠.”

그것이 출발이었다. 아이들의 그림을 티셔츠와 스카프, 가방, 접시, 머그잔에 프린트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작품들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은 지난해 6월. 신애라·차인표 부부, 주영훈·이윤미 부부, 황보, 예지원 등 많은 셀러브러티들이 참여한 한국컴패션 행사의 일환으로 마련된 박윤수 디자이너의 패션쇼가 끝나자 ‘판매는 안 하냐’는 문의가 쇄도했다.

아마추어 그림이 쿠튀르 패션으로

훈훈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첫 번째 패션쇼 이후 그는 고민에 빠졌다. 작품이 판매로 이어진다면 더 많이 기부할 수 있을 것이란 일종의 의무감이 스멀스멀 저 속에서 올라온 것.

“지난 1월에 옥션행사를 가졌는데 50여 작품이 완판됐어요(웃음). 처음엔 티셔츠 등 쉬운 아이템들 위주였지만 이번엔 쿠튀르적인 작품들이 주를 이뤘죠. 이 세상에 단 한 벌밖에 없는 옷들이죠.

아이들의 그림을 컴퓨터 작업을 통해 패턴화하는 작업은 프린트, 나염 등 어느 공정 하나 쉬운 것이 없었어요. 근 한 달 이상 밤샘 작업을 하며 만들었는데, 그래도 식구(직원)들이 힘들어하기보단 즐겁게 일해 주더라고요.”

물론 행사 진행비용을 제외한 옥션의 수익금 전액은 컴패션에 보내졌다. 옷을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 이렇게 ‘행복한 거래’가 또 있으랴. 이번 옥션에 출품된 옷들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둘째딸 소정 씨(큰딸은 가방 디자이너다)가 함께 땀을 흘려주어 더욱 의미가 깊다. 패션패밀리의 부녀가 오롯이 타인을 위해 고민하고 땀 흘린 시간은 이제 가족의 작은 역사가 됐다.

“이번 작품들은 디자인성이 강해 대중에겐 조금 어려웠던 점이 아쉬웠어요. 두어 번 해보니까 답이 보이더라고요. 보다 많은 사람들과 접하려면 디자이너의 감성이 묻어있되 조금 쉽게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많이 팔려야 기부금도 그만큼 늘어날 것 아니겠어요?(웃음)”

그의 말 속에서 이미 다음 작품들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 명함의 한 면을 가득 채웠던 ‘감투’들을 모두 던져버린 뒤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바빠 꽤나 행복한 디자이너 박윤수의 삶의 농도처럼 말이다.

더욱 낮추는 삶을 향하여

더 이상 감각적일 수 없을 정도로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그의 사무실에는 세계 각지에서 건너 온 특이한 소품이 가득했다. 그런 사무실 안에서 발견한 보드 하나. 까무잡잡한 얼굴의 아이들 사진 10장 아래 아이들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씨가 적혀있다.

“이것과 같은 보드를 똑같이 3개를 만들어서 회사 작업실마다 두고 봐요. 저 아이들을 보면 긴장하게 되거든요. 패션이라는 분야가 자칫 사치스럽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경각심을 가지려는 생각에서죠. 매달 후원금을 보내곤 있지만 이런 저런 선물도 보내고 챙겨주려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겠다 싶거든요.”

생각이 미치면 실천에 옮기고야 마는 그는 가까운 필리핀으로 후원 아동들을 만나러 갈 일을 구상 중이다. 산꼭대기만 바라보며 올라가는 과정보다 꼭대기에서 산을 내려가는 것이 살필 것이 많아 어렵다는 그가 굳이 후원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 아이한테 매월 보내는 4만5000원 후원금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지만 실제 현지에 가서 아이들의 삶을 보고나면 자기 자신을 정말 많이 낮출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너무나 도도했던 지인이 컴패션 비전 트립을 다녀온 뒤에 아주 많이 변했어요. 많이 늦긴 했지만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것이 아주 다행이지요.”

세계 60억 인구가 모두 디자이너 박윤수의 옷을 입는 꿈을 꾼다는 그는, 지구 전체가 고통받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시달리는 지구, 그 지구 속의 사회, 그 사회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그는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아름다운 옷의 날개, 디자이너이기에 가능한 꿈이겠다. 옷이 날개이듯, 꿈은 그의 날개다.

박윤수

디자이너
1980 중앙일보 중앙디자인 콘테스트로 데뷔
1986 올스타일 박윤수 설립
2003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장
2004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겸임교수
현재까지 SFAA 컬렉션 40회를 비롯,
파리, 뉴욕, 오사카 등 해외 컬렉션 참가
現 (주)수이스타 대표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money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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