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isen 탄생 300주년, 유럽 최초 도자기

1. 초기 뵈트거의 스톤웨어 2. 전원 풍경과 한 송이 꽃을 모티브로 한 티 포트
300년 전, 중국의 천년 도자기 아성에 도전한 독일의 마이센이 최초로 1300도 이상의 고온으로 빚어낸 자기는 이후 세계 도자 시장의 판도를 바꾸게 된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만이 제작할 수 있었던 최첨단 하이테크의 명품 자기를 유럽에서 빚어낸 것이다.

이로부터 유럽인들의 흙을 다루는 솜씨는 일취월장하여 종주국인 중국을 넘어 글로벌 프리미엄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유럽의 도자기들은 백화점 명품 코너뿐 아니라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경매시장을 점령했다.

전 세계 도자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유럽 도자기의 중심에 마이센이라는 이름이 있다. 마이센은 최초라는 상징성뿐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예술품으로 각인되었다.

자기 도공 뵈트거
Johann Friedrich Bottger

마이센 도자기가 첫선을 보인 시대는 바로크의 전성기로, 당시 유럽의 제후들은 중국의 백색자기를 금보다 더 비싸게 거래했다.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광맥을 찾듯, 백색 금을 찾고자 하던 시기이다. 백색 금을 만드는 기술을 획득하고자 유럽의 권력자들과 상인, 학자, 기술자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백색의 연금술사를 꿈꾸는 이들의 경쟁은 ‘강력 왕’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독일 작센 지역의 제후 아우구스투스 2세에 의해 일단락됐다. 일본의 자기 수집에 열광하던 그는 백색 자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연금술사와 과학자를 동원해 실험에 착수했다.

3. 초기 마이센이 일본의 가끼에몽을 모방한 자기 티 캐디 tea caddy 4. 로코코풍의 여인 상 조각
치른하우젠은 이 임무를 맡게 된 화학자였으나 결과를 얻지 못하던 중이었다. 그 당시에 백색 자기를 누가 먼저 개발하느냐는 금맥을 찾는 것만큼이나 횡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유럽의 도시가 발달하고 국제간에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일차 산업에 의지하던 경제 구조가 변화되고 있던 시점이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자본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대였다.

아우구스트 2세에게도 백색 금을 만드는 일은 꼭 달성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당시 왕족이나 귀족들이 그러했듯이 백색 자기의 마니아였던 아우구스트 2세는 드레스덴 성의 연회장을 온통 백색의 자기로 차려놓고 연회를 열거나 전시회를 갖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일본 자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뵈트거(Johann Friedrich Bottger)는 프로이센 태생으로 일찍이 그의 고향에서는 연금술사로 소문이 자자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는 보트거가 금을 만드는 비법까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뵈트거는 프리드리히 왕이 자신을 가두어 놓고 금을 만들 때까지 내보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피해 작센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작센의 군주 아우구스트 2세 역시 소문으로 알고 있던 뵈트거를 보자마자 두 명의 감시자를 붙여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5. 전원적인 풍경을 그려 넣은 로코코풍의 티 포트 6. 마이센의 바로크 풍의 황금장식의 접시
그리고는 연금 상태에서 금을 만들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납이나 동으로 금을 만드는 데에 실패만 거듭하자 왕은 화학적 조합만으로는 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 즈음 이미 아우구스트 2세 아래에서 봉직하고 있던 티룬 하우젠은 오래 전부터 자기의 제조 비법을 밝히고자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뵈트거가 더 이상 금을 만들어낼 수 없음을 간파한 왕은 그에게 티룬 하우젠과 함께 자기를 개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감옥과 같은 마이센 성의 실험실에 감금된 그는 8년간의 실험 끝에 1709년 마침내 서양 최초의 경질자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초기 뵈트거의 자기는 중국의 쉬엔싱 가마에서 만든 것과 유사한 붉은 스톤웨어(강도가 높은 도기와 자기의 중간 단계)를 생산했다.

이것은 유리 세공사들이 커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장식하였다. 1708년 뵈트거는 드디어 경질자기의 핵심 소재인 카올린을 발견하여 흰 태토로 된 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1710년에 드레스덴 근처의 마이센성에 ‘왕립 작센 자기소’가 설립되었고 뵈트거의 비법으로 자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자기의 기형은 이미 유럽에서 사용하던 실버 제품의 형태를 따랐으며 다양한 색채의 에나멜로 장식되었다.

Decorative of Messien 마이센의 문양과 장식

마이센은 1720년 뵈트거의 후임으로 해롤드를 영입하였다. 그는 당시 다른 장식미술품에서도 유행하던 중국풍, 일명 ‘시누아즈리’ 패턴과 전쟁의 한 장면, 또는 귀족들이 즐기던 연극 ‘코미디아 델 아르테’의 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능숙했다.

특히 그는 자주색, 빨강색과 더불어 핑크 러스터(산화 철 등 금속성 안료를 사용하여 반짝이는 것)를 주요 색상으로 사용했다. 꽃 그림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도자기의 형태와 장식 모티브로 선호도가 높았다.

7. 신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바로크 시대의 물병 8.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자기 조각
특히 서양 자기에서 볼 수 있는 꽃 모티브는 초창기 중국이나 일본 자기를 모방하였는데 아우구스투스 제후의 일본 자기 컬렉션에서 영감을 얻은 초기의 자기는 일본의 가끼에몬Kakiemon과 이마리Imari자기의 패턴과 유사했다. 이른바 ‘인디안 꽃Indianishe Bluemen’이라고 불리는 이 패턴은 일본 자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국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잔잔한 꽃 문양을 마치 종이를 잘라 붙이 듯 납작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다가 1735년경부터는 소위 ‘독일 꽃Deutche Blumen’문양이 등장했다. 이것은 마치 목판화의 이미지와 유사한데 줄기부분을 바짝 잘라내어 꽃부리 부분이 강조되었으며 이것과 거의 같은 크기의 나비가 대조를 이루며, 그 주위로 잔잔한 꽃과 벌레들이 흩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유럽 최초로 자기를 빚어낸 마이센은 또한 유럽 최초로 디너 세트를 생산했다. 이후 마이센이 새롭게 시도한 독일 꽃문양과 같은 새로운 패턴의 식기는 츠빙거에서 벌어지는 초청 만찬에서 사용되었다. 참석자들의 새로운 패턴에 대한 찬사는 자국 자기의 유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마이센 彫像의 시대와 하우스말러 Hausmaler

조각가 출신으로 마이센에 들어온 캔들러Johann Joachim Kandler는 1731년 미니어처 같은 작은 자기인형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크기가 약 10~14cm 정도인 이 작은 인형들은 원래 식탁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 귀족들의 연회 테이블은 오늘날의 정식 코스와 비슷하게 여러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마지막 디저트 코스에는 설탕으로 만든 인형과 조각으로 테이블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자기 인형의 등장 후 일회성 설탕 인형은 영구적인 마이센 인형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귀족들의 취향을 겨냥한 마이센은 이후 중국 도자기에 이어 유럽 자기 시장을 독점하게 된다. 마이센 자기의 상당수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백자의 상태로 판매되어 여러 개별 공방에서 장식되었는데 이러한 작품을 ‘하우스말러(영어로는 housepainting에 해당함)’라고 부른다.

18세기 중반 가장 유명한 하우스 말러 장식가로는 아브라함 소이터Abraham Seuter와 이그나츠 프라이슬러Ignaz Preissler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 가지 색상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금도금을 했는데 정통 마이센과는 다른 형식의 이색적인 장식 때문에 하우스 말러 작품만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이들도 있다.

김재규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 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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