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에서 한국전력은 대표적으로 ‘엉덩이가 무거운’ 주식으로 통한다. 지난해 코스피지수가 50% 급등하는 강세장에서도 주가 상승률이 15% 수준에 그칠 정도로 움직임이 둔한 종목이다.
반대로 하락장에서도 좀처럼 급락하지 않고 주가가 일정 범위 내에서 버텨주는 힘이 있다. 한전은 전국에 보유한 부동산도 많아서 대표적인 가치주로 분류된다.
이런 한전이 올해 증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고 있다. 미국 중국 남유럽 등 해외발 악재가 연이어 터지는 와중에서도 한전 주가는 1월에만 12% 이상 오르며 초강세를 보였다. 해외 원자력 발전소 수주와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자산 재평가 등 호재가 겹친 덕분이다.
한전이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여의도에서 가치주 재평가 바람이 불고 있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가치주가 성장 스토리의 가세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다. 주요 증권사들은 올해 주목할 가치주를 소개하는 리포트를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가치주의 몸값이 올라간 것은 지난해와 달라진 증시 여건이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대를 안고 출발한 2010년 증시는 연초부터 해외 변수가 불거지면서 신중론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의 은행규제와 중국의 긴축 움직임, 그리스 등 유럽 일부 국가의 재정위기 등이 잇따라 외신을 타고 전해오면서 투자전략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당장 국내 증시 수급의 열쇠를 쥐고 있는 외국인이 지난 2월부터 소극적인 매매로 돌아섰다.
증시 상황이 작년과 달리 녹록지 않게 돌아가자 증권가에 ‘짝수 해 징크스’가 다시 떠돌고 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 탓이다. 2000년대 들어 짝수 해에는 주가가 떨어지거나, 설령 상승하더라도 그 폭이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최근 10년 새 홀수해면 어김없이 강세장이 펼쳐졌던 것과 대조적이다. 주요 증권사들이 내놓고 있는 코스피지수 연간 전망치도 박스권에서 오르내림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처럼 시장의 심리가 보수적으로 돌아서면서 가치투자가 자연스럽게 주목받고 있다. 가치주는 실적이나 자산가치에 비해 저평가돼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주식을 말한다.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기대하고 투자하는 성장주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량한 자산을 보유한 자산주, 배당성향이 높은 고배당주, 매년 안정적인 이익을 유지하는 종목 등이 대표적인 가치주로 분류된다. 이런 종목들은 경기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기업의 펀더멘털(내재가치)에 따라 주가가 점진적으로 움직인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가치 투자자로 잘 알려진 조용준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올해처럼 국내외 정책변수로 불확실성이 큰 국면에서는 거시경제 분석으로 주가를 예측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다”며 “이럴 때는 목표를 한 단계 낮추고 가치주를 발굴하는 전략이 현명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과거에 기업이 벌어놓은 자산이 많거나 현재 또는 미래의 수익가치가 큰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가치투자”라며 “꾸준히 이익을 내면서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종목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때마침 한전이 화제주로 떠오르면서 가치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한전은 연초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400억 달러 규모의 원자력 발전 사업을 수주하면서 ‘원전 테마’의 대표주로 나서 시장을 이끌었다.
정부가 내년 7월부터 전기요금 산정기준을 바꿔 연료비 연동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한 것도 힘을 보탰다. 연료비 연동제란 전력생산에 쓰이는 국제원유의 가격 등이 상승하면 이에 맞춰 전기요금을 인상하는 제도다.
지금까지 한전은 정부의 물가인상 억제책 때문에 국제유가가 올라도 이를 전기요금에 반영하지 못해 수익성이 좋지 않았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6배에 불과해 전 세계에서 가장 저평가된 전력회사로 평가됐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창목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해외 전력회사들의 사례에 비춰볼 때 연료비 연동제가 시행되면 PBR는 1배 이상으로 올라간다”며 “연료비 연동제 시행으로 한전의 수익구조와 기업가치는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전은 자산 가치도 상당하다.
지난 1월 한전이 보유한 토지 건물 기계장치 등의 자산을 재평가한 결과 장부가액이 19조1650억 원에서 30조4679억 원으로 11조 원 이상 늘었다. 재평가 차액은 회사 전체 자산의 16%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다.
KT 역시 올 들어 가치주 장세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KT는 지난해 줄곧 4만 원선을 기준으로 지루한 등락을 거듭한 탓에 ‘재미없는’ 주식으로 인식돼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확산과 함께 무선데이터 사업이 강력한 수익원으로 부상하자 1월에만 27% 넘게 급등하며 단숨에 주도주로 나섰다.
전문가들은 대형 가치주의 강세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올해 연중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박승영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올 들어 시장 전체의 이익 성장세와 주가 상승폭이 완만해지자 투자자들은 새로운 성장 스토리를 찾아 나섰다”며 “IT 버블 붕괴 이후 10년간 가치주로 분류됐던 통신주에 스마트폰이 가세하면서 투자자들이 일시에 몰렸다”고 분석했다.
기존 성장주의 상승 탄력이 떨어지자 새로운 이익 모멘텀을 겸비한 가치주의 몸값이 올랐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가치주의 비중을 크게 줄여놨던 투신권이 대거 매수세에 가담하면서 주가 상승세에 탄력이 붙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해 횡보세에 머물렀던 한국가스공사의 주가가 지난 1월 중순부터 우상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배경도 한전과 비슷하다. 지난 2년간 정부의 가스가격 규제로 중단됐던 원료비 연동제가 올해 재개된다는 점이 이 회사 주가 상승의 주된 이유다.
증권사들은 올해 선전이 예상되는 가치주 후보들을 연이어 소개하고 있다. 이재만 동양종금증권 연구원은 “국내 경기선행지수가 작년 4분기를 정점으로 하락세를 이어갈 전망이어서 가치주의 상대적 강세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 증권사는 동일 업종 내에서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높으면서 주가순자산비율(PBR), 기업가치를 세금 및 이자지급전 이익으로 나눈 EV/EBITDA 등은 낮은 종목을 관심주로 꼽았다. 롯데삼강 넥센타이어 현대미포조선 아시아나항공 LG디스플레이 풍산 영원무역 한솔LCD 한라건설 부산은행 KPX화인케미칼 등이 대표적인 가치주로 선정됐다.
NH투자증권은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가치가 큰 자산주를 골라냈다. 현금성 자산에서 차입금을 뺀 순현금이 많고, 부동산이나 우량 자회사를 보유한 기업 중에서 ROE가 5% 이상으로 성장성을 갖춘 동시에 PBR가 1.2배 아래로 저평가된 종목을 자산주로 분류했다.
순현금이 많은 자산주로는 현대미포조선 케이피케미칼 율촌화학 대덕GDS 피앤텔 등이 선정됐다. 한진중공업 삼양사 파라다이스 등은 보유 부동산이 많은 자산주로,다우기술 유니드 세방 등은 ‘효자’ 자회사를 거느린 자산주로 각각 분류됐다.
이 밖에 이트레이드증권은 주가상승 여력이 있는 중소형 가치주로 웅진코웨이 신세계푸드 대한제강 한국전자금융 대한제분 한샘 등을 선정했다.
박해영 한국경제신문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