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과 문화는 내 삶의 일부”

예술품 수집으로 문화훈장 받은 코리아나화장품 유상옥 회장

코리아나화장품 유상옥 회장은 재계에서 컬렉터로 이름이 높다. 그림에서 고미술품, 종 등 컬렉션 종류도 다양하다. 2003년에는 이 작품들을 모아 코리아나미술관과 코리아나화장박물관을 열었다.예술품 수집과 문화활동 공로로 최근 문화훈장까지 받은 유 회장을 코리아나화장박물관에서 만났다.울 강남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코리아나화장박물관에서는 지난 10월부터 ‘송파의 수집 이야기전’이 열리고 있다. 송파는 코리아나 유상옥 회장의 호이다. 이번 전시회는 희수를 맞아 그의 컬렉션 역사를 되돌아봄과 동시에 문화훈장 수여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박물관 1층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최근 건강에 문제가 생겨 지팡이에 의지한다고 했다. 의사가 과로하지 말라고 했다며 인터뷰를 살살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런 후 그는 지하 1층에 마련된 전시장으로 기자 일행을 안내했다.전시장 초입에는 그가 직장생활 초기부터 쓰던 수첩과 메모장이 진열되어 있었다. 수첩에는 임원회의 결과와 하루 일정 등이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오래된 수첩에는 회의 기록 옆에 붉은 색 도장이 찍혀있기도 했다. 그가 동아제약 기획실장 시절에 쓰던 것으로, 회의 내용을 보여주면 창업주인 강중희 회장이 확인 도장을 찍어주었다고 한다.이곳에 진열된 수첩은 컬렉터 유상옥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교육받고, 일하고 죽을 때까지 남기는 게 있어야 한다고 젊은 날의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수첩을 모으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수첩도 하나하나가 모이면 개인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의미 없이 평생을 사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남기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집한 모든 컬렉션은 지나온 인생의 기록인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사연 없는 것이 없습니다. 제 삶의 일부인 셈이죠.”실제로 그랬다. 수첩 진열장 안쪽 벽에 걸린 세계 지도 또한 사연을 담고 있다. 1800년대 제작된 세계지도는 코리아나 화장품 탄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코리아나화장품은 영문으로 표기할 때 ‘K’대신 ‘C’를 쓴다. ‘Koreana’가 아니라 ‘Coreana’인 것이다. 원래 한국은 Corea로 포기했다. 지금 전시장에 걸린 세계지도는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외국 출장 중에 사 모은 것이다.그가 본격적으로 그림과 공예품 수집에 열의를 가지게 된 것은 회사 선배의 충고가 계기가 되었다. 평소에 그를 눈여겨보던 선배는 그에게 “당신은 이성은 갖췄는데 감성이 부족하다”면서 “인사동에 가서 그림을 보면서 감성을 키우라”고 말했다. 충고를 들은 후 그의 본격적인 인사동 나들이가 시작되었다.“제가 수집을 처음 시작한 게 1970년대 들어서입니다. 그때만 해도 먹고살기 바빠서 그림 같은 데 관심이 없을 때였죠. 가격도 워낙 비싸서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미술 관련 책을 보는 데 만족했죠.”당시로서는 큰 작품을 사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월급쟁이 처지에 10만 원, 20만 원 하던 그림을 살 여유가 없었다. 처음 눈독을 들인 게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민속품이었다. 당시는 그가 동아제약에 다니던 시절. 민속품 중에서도 제약과 관련된 공예품에 눈독을 들였다. 약재의 양을 재는 저울이나 한약 재료를 가는 도구 등이 당시에 수집한 작품들이다.그러나 정작 좋아하는 그림은 사지 못했다. 대신 그림공부는 쉬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서가에는 당시 그림공부를 도왔던 , 등 70~80년대에 발행된 미술전문 잡지들이 꽂혀있다.“처음 산 작품이 두산 정술원 씨 작품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돈으로 5000원인가를 주고 샀는데, 사무실에 걸어놓고 보니까 너무 좋은 겁니다. 소품이지만 그 안에 산이며 물, 나무 등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 뒤로 돈이 생기면서 좀더 고가의 작품을 샀죠.”그는 서양화보다 동양화가 마음에 와 닿았다고 했다. “서양화를 수집하셨더라면 지금쯤 큰 돈이 되었을 텐데요?”라고 했더니 유 회장은 “그러니까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서양화는 제 취향에 맞지 않더라고요”라며 웃어 넘겼다. 서양화는 그가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후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백남준에서 데미안 허스트 등 유명작가의 작품 여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지하 2층 전시실에는 데미안 허스트와 백남준, 김강용, 전준엽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코리아나화장품이 이익을 많이 냈어요. 이익이 나면 주주들한테 배당을 하잖아요. 배당금을 가지고 그림과 공예품을 많이 샀어요. 국보급 공예품도 적지 않았는데, 그중 일부를 올 초에 국립박물관에 기증을 했습니다. 한 200점 정도 됩니다.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국립박물관이 관람객이 많으니까,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겠다 싶어서요.”국립박물관에 기증을 했지만 코리아나박물관 5층에는 여전히 많은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다. 5층 전시품목의 테마는 ‘미용’이다. 이곳에는 오래전 이 땅에 살았던 여인들이 썼던 화장용기와 장신구 등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동아제약에 다니다가 자회사인 라미화장품 사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화장품 회사 사장이니까 수집도 그쪽으로 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머리빗을 사 모으다가, 돈이 생기면 조금 비싼 화장용기들로 눈을 돌렸죠.”화장품 회사로 발령 난 후 또 하나 수집을 하게 된 게 종(Bell)이다. 벨 컬렉션의 역사는 그가 라미화장품으로 자리를 옮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미화장품으로 자리를 옮긴 후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던 어느날, 그는 개발회의에서 화장품 병의 모양을 보고 즉석에서 ‘라미벨(LamiBell)’이란 상품명을 지었다. 병의 모양이 종과 닮았으므로 라미의 종, 즉 ‘라미벨’이란 이름을 붙이기로 한 것이다. 프랑스어로 ‘belle’은 아름다움이란 의미로 쓰여 화장품 브랜드로 제격이었다.이 무렵 그는 미국 출장 중 비행기에서 라미벨의 광고 콘셉트를 구상했다. 상표와 포장이 벨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작고 예쁜 벨을 광고에 등장시키기로 하였다. LA에 내리자마자 벨을 산 그는 귀국하여 CF의 마지막에 벨을 등장시켰다. 벨이 등장한 광고는 대히트를 쳤다. 그 결과 신제품 ‘라미벨’은 목표를 초과달성하였고 라미화장품의 손익구조를 바꿔놓은 효자상품이 되었다.“그 후에도 해외 출장 때마다 그 나라의 특색 있는 벨을 사 모았습니다. 대개 1~2달러씩 하는데, 수가공 유리 크리스털은 조금 가격이 나가서 보통 100달러는 줘야 해요. 제가 벨을 모은다는 소문이 퍼지자 직원들도 출장 때 벨을 사오고 친지들도 벨을 사다주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벨이 이제는 1000여 개에 달합니다. 최근 벨 컬렉션을 활용해 2010년 코리아나 화장품의 캘린더를 만들었어요.”벨을 위한 특별 전시실 한켠에는 전 세계 갤러리에서 수집한 포스터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포스터만 400여 장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포스터는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예 사지 않거나, 여행 도중 버리는 게 예사다. 그러나 그에게는 포스터도 좋은 컬렉션의 대상이다. 포스터 중 큰 것은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여행 내내 들고 다닌 것들이다.유 회장의 컬렉션은 수집벽에 가깝다. 어쩌면 그는 수집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컬렉션 하나하나에 담긴 스토리를 모으면 유 회장 개인의 히스토리가 되기 때문이다.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money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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