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서예는 내 삶을 떠받치는 또 다른 축” 옥중에서 가명으로 시 응모해 신인상 수상
입력 2009-09-21 12:35:15
수정 2009-09-21 12:35:15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의 시와 서예
군사정권 시절인 1983년 7월의 어느 날. 도하 주요 일간지 1면에 ‘강호제현(江湖諸賢)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지금의 시각에서도 파격적인 형식의 광고가 실렸다. 형식도 형식이지만 그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당시 재계의 떠오르는 신예였던 명성그룹이 국세청의 세무조사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음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세무조사를 받는 기업이 국세청에 정면으로 도전한,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문제의 광고를 낸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은 결국 탈세혐의로 검찰에 고발돼 17년 3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고 9년여를 복역한 후 1993년 출감했다.불명예스런 일로 옥고까지 치렀지만 김 회장은 한국의 기업사에 남을 선구자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레저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던 시절에 콘도미니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숙박시설을 소개하며 국내 첫 레저전문 기업을 일궜다. 요즘도 그는 명성그룹의 재기를 꿈꾸며 여수에 해양 에코시티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이런 김 회장에게 ‘레저’만큼이나 그의 일생을 따라다닌 화두는 시와 서예다. 그는 복역 중에 지은 시로 문단에 정식 데뷔했고 두 차례의 서예전도 가진 바 있다. 김해성 시인은 그의 문단 데뷔작을 두고 “우리 현대시의 대맥을 이룰 수 있다”고까지 높게 평가했다. 고희가 지난 김 회장은 지금도 매일 새벽 지필묵과 펜을 들고 서도와 시에 몰두하고 있다. 김 회장은 “나를 떠받치고 있는 한 축이 기업이라면 다른 한 축은 예술”이라며 “앞으로 시집도 내고 서화전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명성그룹의 재도약을 꿈꾸며 관광레저사업을 벌이고 있는 김 회장을 만나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들어봤다.“난 시인입니다. 1987년 문예진흥원에서 발간하는 예술계라는 잡지를 통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어요. 시집 4권, 시문집 2권 등 모두 6권의 책을 냈지요. 시는 옥중에서 썼습니다 (김 회장은 명성그룹 사건으로 1984년부터 9년여를 복역했다). 서도전도 2번 가졌어요. 첫 번째는 1981년에 롯데호텔에서 했고 지난해 두 번째 서도전을 열었습니다.”“대학 졸업(한양대 원자력공학과) 후 1964년에 호남비료에 입사했는데 그 때부터 서예를 시작했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45년이 됩니다. 처음부터 서도 선생을 모시고 글씨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나만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들었지요. 그래서 누구에게도 글씨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1981년에 첫 서예전을 할 때 250점을 내놓았는데 당시 원곡 김기승 선생께서 내 작품에 대해 ‘분마여월천’이라는 평을 써주셨습니다. 달리는 말이 개천을 뛰어넘는 것과 같이 웅장하고 기백이 넘친다는 뜻이지요. 지금 용인에 있는 3군사령부 군사박물관에 가면 ‘웅비관’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 글자는 1981년에 제가 쓴 겁니다. 글자 크기가 1m가 넘습니다. 손 하나로 잡기 어려울 정도의 큰 붓을 들고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당시 제가 추천을 받았죠.”“추사의 서체를 좋아합니다. 한자는 같은 글자라도 그 의미가 여러 가지예요. 난 글씨를 쓰면서 내 나름대로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농민을 쓴다면 내 머리 속에 농민의 이미지를 담아내려고 합니다. 그 이미지는 글을 쓸 때마다 달라집니다. 그런 시도가 내게는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나는 산(山)을 가장 많이 썼어요. 아마 나만큼 그 글자를 많이 쓴 사람이 없을 겁니다.”“저는 전라북도 임실 출신입니다. 임실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유년시절을 산과 계곡에서 보냈지요, 중학교 1학년 때 전주로 왔는데 산에 대한 친근감이 너무 커서 스스로 청운산이라는 호를 지어 불렀어요. 대학 시절에는 친구들이 나를 부를 때 ‘청운’을 빼고 ‘산’으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내 아호를 ‘청산’이라고 지었습니다. 지난번 서도전에도 ‘산’자만 7∼8개의 작품을 내놨어요. 가지고 있는 작품도 300점 정도 됩니다. 산을 쓸 때도 제가 상상하는 산의 이미지에 따라 독특한 모양의 필체가 나옵니다. 그 서체들이 매우 파격적이어서 서도계에서는 꽤 회자됐었지요.”“‘산’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이미지가 다릅니다. 내가 산을 1만 번 이상 써도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산을 다 나타낼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세검정에 사는데 거기서 보면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모두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산이 다 달라요. 아침에 다르고 한낮에도 다르고 석양에도 다릅니다. 평생 수많은 영감을 갖고 ‘산’을 써도 모든 산을 표현할 수 없어요. 한자는 독특한 형상미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글자가 나름대로 구조를 갖추고 있어 획을 해체해서 쓰는 것만으로도 예술적 느낌을 받을 수 있지요. 이것이 작가의 개성이고 작품에 독특한 가치를 부여해줍니다. 또 그 글을 보는 관객들도 여러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게 예술작품입니다.”“과거에 저는 모든 콘도를 우리나라 산자락에 지었습니다. 명산대찰이라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예요.”“명성그룹이 한창 번창할 때도 지필묵은 항상 내 곁에 있었습니다. 집무실과 응접실에 별도의 지필묵이 있었고 집무실 옆에 별도의 서실이 있었어요. 난 자투리 시간을 그냥 보내는 것은 소모라고 생각합니다. 바삐 사업을 할 때도 술을 입에 댄 적이 없고 담배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납니다. 출근 전까지 4시간 반 동안 운동도 하고 시도 씁니다. 4시에 일어나는 습관은 대학 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저는 인생에서 승부를 걸려면 깨어있는 시간이 20시간은 돼야한다고 생각했어요.”“전혀 없어요. 추사체와도 공통점이 없어요. 내 글자체는 완전히 독특합니다. 글자의 구도는 창의성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예술을 하는 사람은 어떤 것을 봤을 때 영감이 떠오르고 그걸 형상화해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떤 글자를 계속 쓰다가 몰입된 경지가 되면 독특한 글씨체를 쓰게 됩니다. 지금 이런 글씨를 쓰라고 하면 쓸 수 없어요.”“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는 변화되고 정진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답보된 상태에서 또 비슷한 전시회를 열어 나를 아끼는 분들에게 실망을 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많이 팔았죠. 가격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깜짝 놀랄만한 고가에 팔린 것도 있습니다. (서화집 속의 ‘외경-2’ 라는 작품을 보여주며)이건 지필묵으로 그림을 그린 것인데 가장 고가에 팔렸어요.”“우리는 너무 물질에 몰입돼 있어요. 돈 아니면 다른 것은 보지 않죠. 그러다 보니 정신이 혼탁하게 됐습니다. 정치인도 기업가도 모두 마찬가지예요. 지필묵을 대하게 되면 몰두하는 속에서도 정신이 집중됩니다. 산에 올라 운동하면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사람도 운동하는 순간에는 잡념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지필묵을 잡는다는 것은 정신집중을 한다는 겁니다.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지요.”“중학교 때 소월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어요. 대학 다닐 때는 문예반 서클활동을 하면서 몇 편의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196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책 한 권을 단 한편에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시를 선택했습니다. 1987년에 예술계라는 잡지에서 시공모를 했는데 ‘지리산’, ‘강변에 서면’이라는 2편의 시를 응모해서 신인상을 받았어요. 당시 옥중에 있었기 때문에 김동봉이란 가명을 써서 응모를 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김해성 시인이 직접 특별면회를 신청해 내가 쓴 시라는 것을 확인하시고, 내 손을 꼭 잡고 큰 시인이 돼 달라고 격려하셨어요. 1989년에 청산이라는 시집을 처음 냈는데 미당 서정주 선생께서 극찬을 해주셨지요. 이후 모두 4권의 시집과 2권의 시문집 등 모두 6권의 책을 냈습니다.”“물론이지요. 지금까지 써놓은 시가 약 1500편은 됩니다. 그 정도면 책으로 치면 약 20권 분량이에요. 좀 여유가 생기면 출간을 할 생각입니다. 시는 주로 새벽에 씁니다.”“나는 사실 감옥 안에서는 당돌하게도 노벨문학상을 꿈꿨습니다. 문단에 데뷔한 1987년은 내가 복역한 지 5년째 되던 해였어요. 제가 (명성사건으로) 17년 3개월의 형량을 받았으니 시에 몰두할 시간은 충분했지요. 나중에 서정주 선생을 뵙고, 노산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크게 감격했습니다. 내 삶의 열정을 받치고 있는 한 기둥이 기업이라면 다른 한 기둥은 시와 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일에 대한 열정은 여전합니다. 여수에 해상호텔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내년쯤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해상호텔 프로젝트는 일시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미 1981년에 7개국에 발명특허를 냈던 사업입니다. 바다호텔을 중심으로 해양 에코시티를 만드는 겁니다. 지금 주식회사 명성을 비롯해 4∼5개의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굳이 강조하자면 저는 전 명성그룹 회장이 아니라 명성그룹 회장입니다.”명성그룹 회장한양대학교 원자력공학과금강개발 대표이사전주상공회의소 회장한양대 총동창회 회장글 김태완·사진 이승재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