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 키운 지방은행 금융 판도 흔들까] 한국형 ‘관계형 금융’으로 승부하라
입력 2014-09-15 09:20:48
수정 2014-09-15 09:20:48
전문가 기고 미국·일본 사례로 본 지방은행 성장 전략
최근 우리금융그룹의 민영화 과정에서 부산은행과 전북은행이 각각 경남은행과 광주은행을 인수하면서 1990년대 말 은행 구조조정 이후 처음으로 지방은행 산업구조에 큰 변화의 계기가 마련됐다. 이에 따라 인수·합병(M&A)을 통한 지방은행의 대형화가 그동안 한정된 지역 내 영업에 주력했던 지방은행의 영업 방식에 큰 변화를 야기할 것인지 여부와 그 방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우리나라 지방은행은 1967년부터 1971년 사이에 금융의 지역 분산과 지역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1도 1행 원칙’에 의해 10개가 설립됐다. 그러나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기은행 등 4개 은행이 퇴출 또는 합병을 통해 시중은행에 통합됐고, 경남 및 광주은행과 제주은행은 각각 우리금융그룹과 신한금융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됐다. 그 결과 외환위기 이전인 1997년 말 자산 규모 69조6000억 원에 달했던 10개의 지방은행은 1999년 말 자산 규모 42조5000억 원의 6개로 축소됐고, 일반은행 총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7년 말 12.0%에서 1998년 말 8.5%, 2000년에는 8.0%까지 하락했다. 지방은행의 자산 규모는 2000년 이후 증가세로 전환해 2005년 말 72조4000억 원으로 확대되면서 비로소 외환위기 직전의 수준을 회복했으며, 2013년 말에는 자산 규모 146조 원, 일반은행 총 자산 중 비중 11.4%까지 확대됐다.
이와 같이 지방은행이 대형 시중은행과의 경쟁 및 지역적 영업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장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경영 환경 변화를 고려해 자신의 지역 영업 기반을 중심으로 중소기업 대상의 지역 밀착형 금융을 강화한 데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지방은행은 외환위기 이전에 지역 금융에 충실하기보다는 중앙의 대기업 대출을 대폭 확대했다가 대규모로 부실화된 경험이 있어, 외환위기 이후 주요 영업 대상을 중소기업으로 전환한 바 있다. 또한 외환위기 이후 시중은행들이 대형화, 그룹화됨에 따라 지방은행의 전국 대상 영업에 있어서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 점도 영업 전략을 중소기업 대상의 지역 밀착형 금융으로 전환하는 주요 고려 요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 중소은행 기업금융전담역에서 활로 찾아
지방은행은 외환위기 이후 대형 시중은행과의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중소기업 대출 시장을 시중은행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지역 밀착형 금융을 강화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지방은행이 지역 밀착형 금융을 할 수 있는 요인은 전국적 영업망을 가진 시중은행에 비해 지역 기업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지역적 장점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은행과 차입자 간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전적, 사후적으로 차입자의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를 억제하는 데 기여한다. 특히 투명하고 객관적인 정보가 결여돼 있는 지역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에 있어서는 재무제표와 같은 객관적 자료보다는 기업에 대한 지속적 관찰에서 나오는 정성적 자료가 대출 의사결정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지방은행은 중소기업에 대한 정성적 자료 수집에 있어서 시중은행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 지방은행은 본점이 지역에 있기 때문에 지역 기업에 대한 대출담당자의 판단과 본점의 대출 결정 기준이 유사하게 결정될 수 있다. 그러나 시중은행의 경우 전국을 상대로 영업을 하므로 대출에 대한 일정한 기준이 있고, 해당 지역에 파견된 대출담당 직원이 본점과 거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어 이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지역 파견 직원의 정성적 정보 분석에 대출 의사결정을 완전히 의존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 밀착형 금융의 역사는 길지 않으며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지만, 지역 밀착형 관계형 금융은 전 세계적으로 오래전부터 지방은행 등 소규모 은행들의 중요한 영업 전략으로 자리 잡아 왔다. 미국의 중소형 은행들은 오랜 기간 관계형 금융을 이용해 중소기업 대출을 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고객과의 오랜 관계를 형성하는 기업금융전담역(RM)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 이들은 고객과의 관계 형성을 통해 고객 관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며, 이를 위해 고객을 주기적으로 방문하거나 전화 또는 우편을 이용해 매일 연락을 취하기도 한다. RM들은 오랜 기간 관계(relationship)를 맺은 기업 고객의 해당 사업에 대해 상당 부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고객의 자금 수요에 대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업황이 악화된 단계에서는 적절한 컨설팅 또는 채권 보전 조치 등을 통해 부실 확대를 방지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2003년부터 금융당국 주도의 지역 밀착형 관계형 금융 활성화 정책을 추진해 지방은행 등 지역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자신이 보유한 대출자에 대한 정성적 정보를 이용해 부실채권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후 지역 밀착형 관계형 금융이 지역 금융기관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영업 모델로 인정받음에 따라, 금융당국은 부실채권 정리 이후에도 활성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활성화 정책의 핵심은 지역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장기적 거래 관계를 통해 축적한 정보를 이용해 고객에 대해 대출을 포함한 다양한 금융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지역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지역 기업에 대해 단순한 자금공급자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지역 내 집적된 정보를 이용해 지역 전체의 지속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민·관 연대하에 지역 금융기관, 중소기업, 지역 주민, 지방 공공단체, 중앙 행정기관 출연기관 등 지역 내 전 관련 단체가 지역 발전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지역 실정 및 과제에 적합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과 일본 등의 사례는 최근 M&A를 통한 대형화를 계기로 전국 영업망을 구축하려고 하는 우리나라 지방은행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우리나라 지방은행은 대형화를 추구하며 인접 지역 또는 중앙으로의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역외 지점 확대는 은행 간 경쟁을 촉진하고 외형 확대에 기여하나, 그동안 지방은행의 성장 동력이었던 지역 밀착형 금융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대형 시중은행의 자산 규모가 200조 원을 넘어서는 반면, 합병 이후 지방은행의 자산 규모는 30조~80조 원으로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중은행과 동일한 영업 방식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정성적 정보 적극 활용해야
향후 지방은행은 지역 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며, 이들 기업의 재무제표 등 부족한 공개 정보를 정성적 정보를 이용해 보완하는 지역 밀착형 관계형 금융을 체계화하고 강화해야 한다. 지방은행의 지역적 기반은 한편으로 영업 확대의 제약으로 작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충성도가 높은 지역 고객을 확보하며 정보 비대칭성이 높은 대출 시장에서 고객 정보를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는 주요 근거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지방은행은 합병을 통한 외형 확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같은 RM 모델 또는 일본과 같은 지역 발전 모델 등을 참고해 우리나라에 적합한 지역 밀착형 금융을 체계화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지방은행은 우선적으로 지역 중소기업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비가 올 때 더 큰 우산을 씌어 줄 기업과 이미 너무 젖어 있어 우산을 거둬들일 기업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지방은행과 지역 중소기업 간의 신뢰가 쌓이고 지역경제 발전을 통해 더불어 발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재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