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미술은 나와의 소통을 위한 또 다른 언어

최인선의 미학 오디세이

결론적으로 그는 미술을, 작업을 너무나 사랑하는 작가였다. 사랑할 때마다 매번 첫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인 것처럼죽을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처럼 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사람. 보는 사람을 위한 미술이 아닌,자신을 보여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그. 화가 최인선의 얘기다.



‘추상적 단위의 점, 선, 면이 모여 다양한 형태감을 보여 주는 작업.’ 최인선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한 줄 평은 대개 그런 식이다. 그러나 최 작가의 작품들을 한 마디로 압축하기엔 참으로 방대하다. 물리적인 양도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도 그렇다. 1986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90년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는 물질성이 강조된 단색 추상회화에 몰입했고, 이후로도 ‘영원한 질료’, ‘생각의 형태화’, ‘사고 조각’, ‘지각의 창’, ‘미술관 실내’, ‘날것의 빛’ 등의 연작을 선보이며 주제와 표현 방식에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해 왔다. 단지 작품상의 변화만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세계도 함께.

그런 의미에서 최근 최 작가가 선보인 전시는 단순히 관객들에게 작품을 내보이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최인선의 미학 오디세이 25년’이라는 주제가 품고 있는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그림과 함께해 온 지난 삶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그런 점에서 분명 회고전 성격을 띠고, 또 신작 400여 점을 포함한 630여 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작품 수로 따져도 어지간한 대가의 회고전을 능가하는데도 그는 한사코 ‘회고전’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제 자신을 성찰하고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일 뿐입니다. 제 작품들이 내용적 또는 형식적인 면에서 어떤 미술적 가치관 안에 놓여 있었나를 점검하는 전시였죠. 사람들은 자꾸만 25년이라는 시간에 기대 ‘사반세기 회고전’이라고 하는데 어색하고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다만 이번 기회를 또 다른 생명이 파생하는 기점으로 삼을 뿐입니다. 실제로 다음 작업들에 대해 지금까지 한 것보다 조금은 더 자신감이 생겼어요. 더 투명해졌다고 할 수 있죠.”


‘날 것의 빛’, 200×200cm, Oil on canvas, 2014년

첫 개인전 이후 25년, 이제부터가 진짜다
또 다른 생명의 파생이라.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첫 개인전을 기점으로 25주년을 맞은, 나이 쉰이 된 올해가 ‘비로소 진짜 시작’이라고 했다. 지난해 전시 때도 “이번을 첫 번째 개인전으로 삼고 싶다”고 했던 발언을 곱씹어 보면 그에게는 늘 처음이고 시작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뜻이 담긴 말이었다.

“어릴 때 그림 그리는 걸 너무 좋아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화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곤 줄곧 그 뜻에 변함이 없었죠. 시간이 지나 대학에 가고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린다면, 쉰이 넘어 진짜 화가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쉰 살이 될 때까지는 미술학도와 같이 계속 스터디를 한다는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작가들은 조로증이 많은데 제 기준대로 하면, 이번 전시 후 진짜 프로 작가로 데뷔하는 셈이니 앞으로 30년을 더 그리면 정말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두터운 팬 층이 있고, 화단에서도 이미 인정받고 자리를 잡은 중견 화가의 ‘겸손 가득한’ 발언으로 치부하기엔 미술에 대한 열정과 탐닉이 넘치고 흘렀다. 이제 막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해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는 젊은 작가처럼.


‘조각적 사고 사고적 조각’, 162×132cm, Combined process on canvas, 2000년

사실 창작열만큼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다. 단적으로 작업량이 그 사실을 반증한다. 이에 대해 최 작가는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자신 안에 그만큼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듬어지지 않은 생생한 날것을 보여 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서는 언뜻 낙서나 일기처럼 보이는 작품들부터 한 작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주는 듯한 작업 등이 세밀하게 정제되지 않은 채 관객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게 제 장점이자 단점인데 옷에 때가 좀 묻었다고 해서 빨아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요. 제 작품이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 공부죠. 작품 수가 많고 그러다 보니 전시를 자주 하게 되는데, 그 또한 나 자신과의 끊임없이 소통 때문이에요. 사회 구조 속에서의 소통이라기보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이 안에서 자꾸 솟아오르니까요. 그래서 제 작품들은 그간 다양한 방법론 안에 놓여 있었죠. 한 가지 방법으로 일관되지 않아요. 보통 작가가 추상으로 시작하면 추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또 대부분의 작가는 구체적인 이미지 작업으로 시작해 추상으로 생을 마감하는데 저는 역방향으로 가고 있죠. 거대 추상으로 시작해 구체적인 이미지가 드러난 작업으로 말입니다.”


‘날 것의 빛-얼굴’, 194×259cm, Oil on canvas, 2013~2014년

역방향은 의도의 결과가 아니었다. 공부했던 학교(홍익대 학사와 대학원 졸업 후 뉴욕주립대 대학원을 졸업했다)가 추상 작업이 강했고, 은사들의 지도를 받다 보니 추상회화가 자신을 극명하게 대변해 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에게 미술은 보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그림이 아닌 그를 드러내는 또 다른 언어였다. 해서, 1990년대 그가 추구했던 추상이나 ‘미술관 실내’, ‘날것의 빛’ 등 현재의 컬러풀하면서도 이미지가 도드라진 작업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똑같은 ‘최인선의 언어’다. 그가 미술계에서 흔히 행해지는 어떤 상대적인 평가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미술은 개인적인 절대성이 드러나는 일이잖아요. 그 가치를 다른 사람과 상대평가 할 수가 없죠. 물론 미술사라는 거대한 기준 안에서 평가될 순 있겠지만, 무명이든 유명이든 미술과 함께 한 인생은 모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 남과 비교할 수 없죠. 다만 많은 작가들이 한 번 모티브를 정하면 그 길로만 가고, 결국 소멸하고 마는데 그걸 보면서 저는 나이가 들어서도 상승하는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미술관 실내-빛의 들판’, 132×162cm, Oil on canvas, 2013년

타인에게 희망과 빛·생명의 언어가 되고 싶다
자기표현의 수단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객의 시선이나 그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건 결코 아니다. 일례로 캔버스 위에 원색의 물감을 두껍게 발라 현대인의 안식처인 실내 공간을 표현한 ‘날것의 빛’ 연작에 대해 최 작가는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밝은 빛의 실내 풍경을 통해 위안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실 이미지라는 게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줘요. 어두운 영화를 볼 때와 희망적인 영화를 볼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잖아요. 바로 감정이입이 되죠. 마찬가지로 제 작품을 보면서 관객들이 빛으로 희망으로 생명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어둡고 지쳐 있고 낙망하는 비주얼로 드러나길 원하지 않아요. 화려하고 밝은 색채와 빛이 제 작품 안에 공존하는 건 그런 이윱니다.”

실제로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그 화사함에 끌려 잠시 고단한 마음을 내려놓는다. 일상적인 공간, 익숙한 오브제들을 콜라주 했지만 반추상적인 그림들은 현실도 아니고 꿈도 아닌 채 그렇게 다독인다. 화가로서의 삶이 목표이자 꿈이고 현실이자 이상이었던 그가 잠시 흔들렸던 어느 시점을 지나 다시 캔버스 앞에 앉게 된 것도 그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누군가를 위로하고 살리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2002년에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싶었어요. 그때가 유일하게 찾아온 위기였는데 결국 제가 가진 재능을 소명으로 알고 다른 이들을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죠. 그림을 그리는 일도 종교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날 것의 빛-모네’, 194×259cm, Oil on canvas, 2014년

독실한 크리스천인 최 작가의 작품 중에는 실제로 종교적 성향이 강한 것들도 다수다. 주로 성경 말씀을 쓰는 작업들인데, 대표적으로 ‘요한’이란 작품은 소더비 경매에서 3만6000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작품이 그의 언어이듯, 언어가 작품이 된 경우다.

그가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스스로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것의 연장선이다. “한시도 붓을 놓지 않으면서도 후학 양성이 가능한가”라는 ‘우문’에 그는 “열심히 작업하지 않으면 그 어떤 생명력도 전달할 수 없다”고 ‘현답’했다.

“작가 스스로 작품에 매진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가르친다는 건 시간과 공간을 떠나 정신이 지배하는 영역이에요. 미술이라는 생명수 안에 완전히 푹 젖어 있을 때만 전달이 가능한 거죠.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는 건 곧 아이들을 통해 배우는 거예요. 사실 교육자들이 범하는 오류가 자신의 색채는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색채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그러다 보면 결국 좋은 작가로 키울 수가 없어요. 다행히 저는 지난 세월 동안 다양한 표현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면이 있죠.”

인터뷰 내내 최 작가는 “나는 유명하지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말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반문을 해도 “그렇다”고 했다. 인터뷰 초반에는 농담쯤으로 여겼지만, 말미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 작가에게 유명과 무명은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라고. 그렇다면 표현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로 변화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 그이니 진정 노력하고 반성하는 작가라고. 그리고 이제 또 한 번의 비상을 막 시작한 작가라고.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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