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RCHITECTURE] 규정에 어긋난 건축 설계도의 위대한 성공
입력 2014-09-05 11:51:58
수정 2014-09-05 11:51:58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의 ‘건축 기행 그리고 인생’(6)
요른 웃손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Sydney Opera House)오페라하우스가 없는 ‘미항(美港)’ 시드니를 상상할 수 있을까. 호주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1970년대에 지어진 현대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될 정도로 창의와 혁신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페라하우스의 설립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이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건 사실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필자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방문한 건 2003년, 가족들과 함께 떠난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에서였다. 이곳에서 성악가 조수미가 프리마돈나로 열연한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감상했다. 공연의 감동과 더불어 노을 지는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바라본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멋진 풍광은 아직도 나의 기억 속 멋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38세 건축가 요른 웃손과 오베 아룹의 걸작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위한 논의는 1940년대부터 시작됐다. 대형 전문 공연장의 필요성을 느낀 시드니의 음악원장 유진 구센스가 정부를 설득해 대규모 공연 시설을 건축하기로 했다. 구센스는 1954년 뉴사우스웨일 주 조셉 케이힐 전 총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냈고, 오페라하우스를 반드시 베넬롱 포인트(현 오페라하우스 부지)에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뜻에 따라 1956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디자인 공모전이 개최됐다. 공모전의 응모 요강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홀과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홀을 구성하라는 것. 전 세계 32개 나라에서 233건의 응모작을 보내왔는데, 이때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알바 알토, 미스 반 데어 로에, 필립 존슨 등 세계적인 건축계의 거장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심사위원은 총 4명. 3명의 심사위원이 어느 정도 안을 추려 놓았을 때 뒤늦게 온 심사위원 이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이 탈락한 안들을 살펴보던 중 덴마크 신예 건축가 요른 웃손(JØrn Utzon)의 조금은 허술한 디자인을 골랐다. 웃손이 제출한 디자인은 투시도도 없고, 도면이 건립 부지와도 맞지 않는 등 공모전 규정에 부합하지 않았지만, 사리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결국 웃손이 1등에 당선됐다. 사리넨은 웃손이 제시한 셸 구조, 즉 조개껍데기 모양의 건축물에 호감을 보였다. 그리하여 경험과 기술은 다소 부족하지만 디자인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지닌 웃손은 38세의 나이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설계를 맡게 된다.
스케치에 불과했던 그의 디자인이 지금의 멋진 외관으로 구현된 데는 영국의 엔지니어링 회사 오베 아룹(Ove Arup)의 기술적 뒷받침이 컸다.
1958년 3월 오베 아룹과 함께 시드니를 방문한 웃손은 ‘레드북(Red Book)’이라 불리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디자인의 초안을 공개했으며, 이듬해 3월 기공식이 열렸다.
그러나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프로젝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케이힐 총리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앞으로 웃손에게 닥칠 시련을 예고하고 있었다.
레드북 발표 이후 웃손은 2년 동안 설계를 발전시키면서 도면과 모델 이미지, 스케치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며 자신의 안을 구체화했다. 당시 빠른 착공을 위해 이른바 ‘패스트트랙(Fast Track)’ 방식으로 3단계 공사가 진행됐다. 1단계 기초 및 토대 공사, 2단계 셸 모양의 지붕 구조체를 만들고 타일을 붙이는 공사, 3단계 벽체와 내부 공사로 나눠 설계를 부분적으로 완성해 가기로 했다. 그러나 설계와 시공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오류와 시행착오가 많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공사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예상했던 예산 700만 호주달러로는 어림도 없었다. 준공 이후 1974년 호주 정부가 공식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공사에 든 총 비용은 1억200만 호주달러였다. 당초 예산 대비 15배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 셈이다. 공사 기간은 당초 계획보다 6년이 늘어났다.
케이힐 총리가 사망한 후 정권이 교체되면서 주 정부는 건설 과정에 계속 개입하는 등 웃손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웃손의 모든 계획안을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호주 내 국민 여론도 매우 악화된 상황이었다. 현지 언론은 오페라하우스를 향해 ‘콘크리트로 만든 낙타다’, ‘베넬롱 곶의 곱사등이다’와 같은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정부가 웃손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한 다자인 결정권을 포기하고 자문 역할만 할 것을 제안하자, 끝내 그는 마지막 3단계 공사에 관여하지 않은 채 1966년 사퇴했다. 웃손은 그렇게 고국 덴마크로 떠난 이후로 다시는 시드니를 방문하지 않았다(훗날 호주 정부가 웃손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 관계가 호전되기는 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완성된 실물을 보지 못했다).
공사 기간과 예산이 엄청나게 초과된 이 프로젝트는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보면 위대한 실패작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실패 사례는 대규모 프로젝트 추진 시 어떻게 하면 당초에 세웠던 일정과 예산을 준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인 프로젝트 관리(Project Management·PM) 기법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실패한 매니지먼트, 그러나 호주의 아이콘이 되다
우여곡절 끝에 1973년 완공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일약 호주의 아이콘이 됐다. 특히 셸 구조의 지붕은 하이라이트였다. 흔히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지붕을 ‘항해하는 범선의 돛과 같다’고 하지만 웃손은 이 디자인의 영감을 오렌지 껍질에서 얻었다고 한다. 오렌지와 같은 원형 구조물을 잘라냈을 때 이러한 셸의 형상이 나온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웃손은 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지붕이 바다와 어울려 하늘 속 구름처럼 보이길 원해 이를 표현할 재료로 도자기를 선택했다. 마침 그는 동양 건축에 심취해 있었다. 유광과 무광의 도자기 타일은 빛의 각도와 날씨에 따라 환상적으로 변한다.
이렇듯 위대한 디자인의 힘은 기막힌 반전을 이뤄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지난해 기준으로 1억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해 총 공사비의 몇 배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07년에는 현대 건축물로는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웃손은 1987년 영국 왕립건축가협회로부터 금메달을 받았으며, 2003년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도 거머쥐었다. 90세까지 살았지만,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외에 이렇다 할 대표작을 남기지 못한 웃손에게는 엄청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웃손이 깐깐한 입찰 규정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모전에서 탈락했다면 위대한 건축물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물을 규정대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융통성 있는 잣대도 필요하다. 우리 회사의 경우, 규정을 적용하기 애매한 사안은 회사 편이 아니라 구성원 편에 서라는 불문율이 있다. 인생도,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로 틀에 갇히지 않으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것이 규정을 벗어나 위대한 성공을 이룩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교훈이다.
정리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제공 김종훈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