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SION PLAN] ‘푸시형 마켓’으로 변한 퇴직연금 시장서 활로 찾기

퇴직연금 시장의 성격이 적극적 ‘풀(pull)형 마켓’에서 소극적 ‘푸시(push)형 마켓’으로 바뀌고 있다. 다시 말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경향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연금의 확산을 순풍에만 기대기는 힘들다. 푸시형 마켓에 적합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는 사업자의 역량과 정책당국의 배려가 필요한 때다.



배를 우리의 인생에 비유한다면, 배의 목적지는 은퇴 후 평안한 생활에 비유할 수 있다. 오늘날 은퇴 후의 평안한 삶은 인생 전반의 행복도를 결정하는 열쇠다. 이런 시대에 우리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실어다 줄 돛은 무엇보다도 튼튼해야 한다. 퇴직연금은 이 돛의 튼튼함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의 하나다. 후세대에 부담을 주는 국민연금과 달리 퇴직연금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돛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면서 우리 인생이라는 배에 돛이 펼쳐졌다. 이제 남은 것은 바람이다. 돛을 찢어 놓을 정도의 세찬 바람은 필요 없다. 세기가 너무 약해 배를 밀어주지 못하는 미풍이어서도 안 된다. 배가 거친 인생의 바다를 순항할 수 있도록 하는 순풍이 필요하다. 과연 지금의 퇴직연금 시장에 불고 있는 바람은 무슨 바람일까?



퇴직연금 시장에 뛰어든 수십 개의 금융기관이 과당경쟁을 펼치는 현상을 보면 얼핏 세찬 바람이 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지금 퇴직연금 시장에서 일고 있는 바람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급속한 고령화라는 거친 파도의 힘을 이겨낼 수 없는 미풍일 뿐이다.

미풍이 부는 상황에서 배가 목적지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노를 젓는 사공이 필요하다. 퇴직연금사업자인 금융기관이 바로 노 젓는 사공이다. 인생이라는 긴 항해를 노 젓는 사공의 힘에만 의존할 순 없다. 사공의 근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순풍이 불어 주어야 한다. 퇴직연금을 도입해 적극 활용하겠다는 기업과 근로자의 절실한 니즈,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이 곧 퇴직연금 시장의 순풍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현재의 퇴직연금 시장을 진단해 보자. 퇴직연금 시장의 성장세는 실로 눈부시다. 최근에는 적립금의 연간 순증액이 10조 원을 가뿐히 넘고 있으며, 적립금의 연간 증가율은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금융시장에서 퇴직연금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영역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것만 보면 퇴직연금 시장에 강풍이 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데이터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퇴직연금 시장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2012년도 퇴직연금 적립금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35%다. 매우 높다. 하지만 2011년도의 증가율(71%)에 비하면 반 토막에 불과한 수준이다. 적립금의 순증액도 매년 증가 추세에서 감소세로 전환했다. 이런 점에서 2012년은 퇴직연금 시장이 전환기를 맞이한 해라 할 수 있다. 바로 퇴직연금 시장의 성격이 풀형 마켓에서 푸시형 마켓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자발적 퇴직연금 가입 기업 줄어…푸시형 마켓 공략 위한 정책당국 배려 필요
풀형 마켓이란 돈과 고객이 저절로 찾아오는 시장을 말한다. 시장의 매력이 철철 넘치기 때문이다. 펀드 열풍이 일 때 돈뭉치를 들고 금융기관 창구를 찾던 고객의 행렬을 떠올리면 된다. 반면에 푸시형 마켓은 많은 노력과 비용을 투입해야만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시장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보험이다. 누구나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보험 가입은 늘 후순위로 밀린다. 보험의 혜택은 한참 뒤에 나타날 공산이 크고, 어쩌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험 가입을 미루다 사고가 발생하면 그 데미지는 너무 크다. 보험판매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퇴직연금 시장이 2012년을 전후해 풀형 마켓에서 푸시형 마켓으로 전환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약 48만 개에 달하는 법인세 신고 대상 기업 중 흑자를 기록하는 기업은 3분의 1 정도인 32만여 개다. 2013년 말 퇴직연금을 도입한 기업의 수는 23만5716개다. 흑자 기업의 73.3% 정도가 퇴직연금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법인세 절감을 노리고 자발적으로 퇴직연금에 가입하고자 하는 성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법인세 절감 같은 즉시 효과를 기대하는 마케팅 시대는 저물고, 그 대신 근로자의 충성도나 근로자 복지 증진이라는 장기적 효과를 강조해야 하는 마케팅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풀형 마켓의 성격은 약화되고 푸시형 마켓의 성격은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해 은퇴 준비에 대한 근로자의 관심은 매우 높다. 이를 반영하듯 연금 상품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퇴직연금도 마찬가지다. 300인 이상 대기업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이미 75%를 넘었다. 4곳 중 1곳이 퇴직연금을 도입한 것이다. 100~299인 중견기업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54% 정도다. 하지만 99인 이하 소기업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15%를 밑돌고 있다. 이처럼 기업 규모별로 퇴직연금 도입률에 큰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기업 규모가 클수록 재무 상황이 양호하고, 근로자의 협상력이 좋을 것이라는 상식이 퇴직연금 도입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 규모가 클수록 풀형 마켓일 공산이 크고, 작을수록 푸시형 마켓일 가능성이 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중소기업에는 퇴직연금과 경쟁 관계에 있는 퇴직금이 더 큰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이직이 잦고 급여 수준은 낮은 경향이 있다. 급여 수준이 낮은 근로자일수록 먼 미래를 위한 대비보다는 당장의 생활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자금난에 시달리는 기업에 퇴직급여를 사외에 예치해야 하는 퇴직연금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퇴직연금 도입을 둘러싼 의사결정이 사업주에 의해 이루어질 개연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기업 시장은 처음부터 푸시형 마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직연금 시장의 성격이 풀형 마켓에서 푸시형 마켓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연금의 확산을 순풍에만 기대하기는 힘들다. 푸시형 마켓에 적합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는 사업자의 역량과 정책당국의 배려가 필요하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퇴직연금의 확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메마른 대지에 심은 씨앗에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분 공급이 필요하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땀을 흘리며 물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씨앗은 튼튼한 줄기와 무성한 잎을 위한 싹을 틔울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 퇴직연금 시장에 필요한 것은 바로 씨앗에 물을 주기 위해 기꺼이 땀을 흘려야 하는 사람들의 사기 진작이다. 퇴직연금 사업자와 퇴직연금 정책당국자의 사기를 꺾는 행위는 퇴직연금 시장 확산을 저해하고, 궁극적으로는 근로자의 평안한 노후를 위협한다는 점을 명심할 때다.


손성동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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