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RCHITECTURE] 새로운 혁신 주거의 전형을 보여 주다
입력 2014-08-05 17:54:47
수정 2014-08-05 17:54:47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의 ‘건축 기행 그리고 인생’(5)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d d’Habitation)2010년 KT&G 사외이사 재임 시절 프랑스 칸으로 출장을 갔을 때, 나에게는 또 다른 미션이 있었다. 책으로만 접했던 르 코르뷔지에의 흔적을 만나는 일이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집합 주거인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칸에서 멀지 않은 마르세유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층 아파트의 원형이자 주상복합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 건축물을 보면서 세계 유명 건축 거장들이 그를 숭배해 마지않는 이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김종훈 회장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 곳곳은 폐허로 변했다. 도시의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도시 건설 계획이 입안됐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시작된 프랑스 복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건설된 서민용 집합 주거다.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 재건에 나선 프랑스 정부의 의뢰를 받아 프랑스어로 ‘큰 주거 건물’을 뜻하는 이 건물을 설계했다.
외부에서 바라본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특출했다. 1층을 필로티(거대 기둥)로 처리해 공중(公衆)에게 개방한 점이나 다양한 입면, 빨강·파랑·노랑의 세 가지로 구성된 외부 발코니 세대 칸막이의 컬러 조합,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거친 표면의 노출 콘크리트 마감이 그러한 느낌을 더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한 빌딩에 1인용부터 8인의 대가족용까지 무려 23개 평면 타입을 가진 337세대가 있다. 모든 가구가 복층형으로 한 가구가 2개 층을 사용하도록 설계됐다. 복도는 3개 층마다 하나씩 있는데, 중앙에 있는 복도에서 한 세대는 밑으로 한 세대는 위층으로 진입하도록 해 공용면적을 최소화했다.
이 집합 주거는 6m 높이의 34개 필로티가 받치고 있다. 필로티는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새로운 건축의 5원칙’ 중 하나로, 지상으로부터 건물을 들어 올려 지상을 공중에게 개방하고 통풍도 좋게 했다. 지중해와 인접해 습도가 높은 마르세유의 기후 특성도 고려한 것이다.
옥상 정원 또한 르 코르뷔지에의 5원칙 가운데 하나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옥상 정원에는 수영장과 조깅 트랙, 유치원, 오픈 스페이스 등 주민을 위한 공용 시설들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탁월한 디자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밖에도 7층과 8층에는 24개 객실의 호텔, 사우나, 임대 상가 등 상업 시설들이 위치한다. 건설 당시 유니테 다비타시옹 인근에는 이러한 편의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주거 시설을 복합화, 도시화해 최소의 투자로 한 건물이 복합적인 기능을 갖도록 하려는 시도였다.
디자인 측면에서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 중 하나이기도 한 모듈러다. 모듈러 이론이란 기존 건축에 사용되던 미터법이나 인치법 대신에 인간 신체의 척도와 비율을 기초로 황금분할을 찾아내 그것을 건축학적으로 수치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최소한의 공간 속에서 사람이 팔을 벌리고 움직일 때 불편함이 없도록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황금비율을 모듈러 시스템에 적용했고, 이를 다양하게 조합해 건축 재료와 공간 분할의 기준 수치로 삼았다. 그 외에도 유니테 다비타시옹 내부에는 각종 디자인과 그림 등 천재 건축가로서 르 코르뷔지에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흔적들이 도처에 남아 있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1947년 기초공사가 시작된 후 1952년 완공되기까지 약 5년, 설계 기간을 포함하면 7년이 걸렸다. 당시에도 아파트는 존재했지만 이처럼 큰 규모의 집합 주거는 첫 시도였다. 몇몇 건축가들은 이 실험적인 건물을 향해 “여기에 살면 정신병에 걸릴 수 있겠다”며 빈정대기도 했는데, 실제로 초기에는 입주가 잘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나 독특한 건축 철학이 반영된 유니테 다비타시옹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관광객들이 몰려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세유의 명소가 됐으며, 결국 현대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중요한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
여행과 독서를 통해서 배운 건축으로 현대 건축의 위대한 거장이 되다
미스 반 데어 로에,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와 함께 근대 건축의 거장 3인 중 하나로 꼽히는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수련을 통해 건축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887년 스위스에서 시계 세공업을 하던 잔느레가(家)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이며, 음악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2년 14세 때 처음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이것이 그가 받은 정규 교육의 전부다. 그 대신 20대 전반은 주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고대 건축과 도시를 연구했다. 1911년 24세 때 체코 프라하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다시 그리스와 이탈리아 남부 및 로마로 이어지는 ‘동방여행’이라는 이름의 긴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이 그의 삶을 바꿔 놓았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림에 소질을 보였는데, 항상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스케치를 하고 글을 쓰거나, 건축물을 실측해 도면화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다다른 그는 더할 수 없이 감격했다. 아크로폴리스에 오르지 않고, 하루 종일 커피를 마시면서 언덕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4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파르테논 신전을 실측하고 스케치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건축물을 휘둘러보는 것이 고작인데, 이러한 면모만 보더라도 그의 범상함과 끈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어릴 때부터 여행뿐 아니라 철학, 문화, 역사 등 여러 분야의 독서와 글쓰기를 체질화했다. 또한 그는 화가, 조각가, 도시 계획가, 건축과 도시 이론가, 저술가, 가구 디자이너, 공예 디자이너로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실제 35세 때 인구 300만을 위한 도시계획을 제안했으며, 인도의 샹디가르라는 행정도시를 계획했고, 알제리 수도 알제의 도시계획에도 관여하는 등 전 세계에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도시와 건축물을 남겼다. 그는 1965년 지중해에서 수영을 즐기던 중 심장마비로 78세의 나이에 타계했는데, 앙드레 말로 당시 문화부 장관은 루브르궁에서 거행된 장례식 진혼사에서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 페이디아스, 르네상스의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와 같은 반열의 예술가”라고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60여 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임에도 비교적 잘 유지, 관리되고 있었다. 지금 봐도 세련된 이 건물을 감상하면서 창조와 혁신으로 주거의 편의성을 구현해 낸 건축가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울러, 전후에 싼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게 프로젝트를 의뢰하고, 전폭적으로 그를 지지했던 프랑스 정부의 혜안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건축은 발주자와 설계자를 포함한 공급자가 같이 만들어간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이야말로 발주자의 리더십과 혜안이 위대한 역사적인 건축물을 낳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좋은 사례였다. 혁신적인 디자인은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디자인으로 우리의 도시와 삶의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는 그날이 언제 올지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