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세대 공감 한옥의 멋, 마니아 급증
입력 2014-06-10 17:51:56
수정 2014-06-10 17:51:56
한옥 가구 10만 시대
한옥은 주거환경 측면에서 아파트보다 불편하고, 유지보수비가 많이 드니 가격 경쟁력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우리 전통 가옥의 멋스러움에 반해 한옥살이를 원하는 사람들의 수는 갈수록 늘고, 최근에는 그 인기가 젊은 층으로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수요가 많아지면서 전국에 한옥 마을도 조성 중이다. 한옥의 변천사를 알아보고 최근 트렌드를 짚어봤다.한옥은 과거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말 그대로 한국인의 가옥이다. 1980년 도시화 바람을 타고 편안함을 찾아 서양식 집인 아파트와 주택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몇 년 전부터 다시금 한옥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한옥이 살고 싶고 혹은 갖고 싶은 집으로 부상하면서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한옥마을 개발 붐도 일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한옥은 전국적으로 2008년 5만5000가구에서 2012년 말 8만9000가구로 늘었고, 최근에는 10만 가구까지 급증했다. 이처럼 한옥이 고급주택이자 세련된 웰빙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은 불과 5~6년 안팎. 서울 종로구 계동, 가회동, 삼청동 일대 북촌마을은 한옥 돌풍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서울시가 한옥 밀집지인 북촌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하고 2001년부터 북촌 가꾸기 사업을 시작한 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후 2006년까지 800억 원의 지원금이 풀리면서 새 단장하는 집이 하나 둘 늘어났다. 희소성 높은 도심 한옥마을은 매각 차익을 노린 투자자들도 많이 유입됐는데,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등 한옥 임대사업이나 카페, 음식점 등 상업용 리모델링 사례가 많아진 것도 이 무렵이다.
참살이 바람 타고 수요 늘어
조선시대 사대부 집권세력이 모여 살던 북촌은 오늘날에도 정치인, 재벌총수 등이 대거 둥지를 틀었다. 왕의 기가 흐른다고 알려진 가회동 31번지 일대는 고급 한옥이 즐비하다. 1-131번지의 주인 최은영 한진해운 홀딩스 회장을 비롯해 정독도서관 근처 93-3번지에 사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나란히 붙은 33-35번지와 33-36번지 소유주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부인 홍라희 씨 등이 이곳에 한옥을 가지고 있다. 한화건설은 아예 가회동 33번지와 가회동 11번지 사이의 땅 총 1만6848㎡를 사들여 한옥풍 고급주택 단지로 조성했다. 김승연 회장은 가회동 1-11번지 1655.3㎡ 규모의 주택을 본인 이름으로 갖고 있으며, 김동관 한화솔라원 실장은 삼청동 35-22번지 주택과 가회동 임야 2620㎡를 보유 중이다. 그 외에 사업가와 정치인, 외국인과 예술가 등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이들은 직접 살기보다는 별장이나 갤러리 등 세컨드 하우스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가회동에서 만난 한 주민들은 “북촌과 서촌 일대는 주인은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이 허다하다”며 “집을 사 놓고 한 번씩 왔다 갔다 하는 ‘회장님’들이 눈에 종종 띈다”고 귀띔했다.
실제 북촌의 경우 5~6년 전 한 차례 물갈이가 이뤄졌다. 한옥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북촌이 관광명소로 떠오르면서 강남의 큰손과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반대로 터줏대감들은 집을 팔고 아파트 혹은 전원주택으로 이주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계동 주민 차성민(53) 씨도 이때 북촌에 들어와 5년째 한옥에 살고 있다. 그는 “30년 넘게 잠실에서 아파트 생활만 하다가 어느 날 숨통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집을 팔고 한옥으로 옮겨 왔다”며 “난방이 잘 안 되고 유지나 보수비용이 많이 들긴 해도 자연과 더불어 조용히 힐링할 수 있어 몸도 건강해지고 훨씬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옥이 사랑받는 것은 건강한 삶, 즉 ‘참살이’에 대한 현대인의 욕구가 늘어난 이유가 크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들어 젊은 세대도 한옥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과거 한옥은 은퇴한 부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20~30대에게도 트렌디한 한옥은 ‘살고 싶은 집’으로 각광받고 있다. 북촌에서 20년째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한 공인중개사는 “몇 년 사이 젊은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며 “부동산을 찾는 신혼부부 가운데 70~80%는 한옥에 대해 문의하지만 66㎡대 낡고 허름한 한옥조차도 평균 전세가가 2억~2억5000만 원 정도라 실거래가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3.3㎡당 700만 원 선이었던 북촌 일대 한옥 시세는 최근 3000만 원까지 치솟았다. 위치가 좋은 곳은 3.3㎡당 5000만 원까지 가격이 뛴다. 전세의 경우 99㎡ 기준 3억5000만 원 수준이다. 경복궁 서쪽 누하동, 옥인동, 통인동이 위치한 서촌 한옥은 평당 매매가가 2000만 원 선으로 다소 저렴하다. 이 공인중개사는 “아파트 값이 하락하는 데 반해 한옥 수요는 꾸준해 매물이 부족할 지경”이라며 “한옥 소유는 공시지가가 오르지 않아 가격에 변동이 크지 않지만 찾는 발길은 꾸준하고 한옥 마니아 가운데서는 두 채 이상씩 소유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전국 한옥마을 개발 붐…‘무늬만 한옥’ 우려도
서울 북촌과 서촌 붐을 시작으로 전북 전주 교동 한옥마을, 경북 안동 하회마을 등 한옥마을의 인기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대규모 한옥 단지 조성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전통 한옥이라기보다는 생활 편의성을 크게 높인 현대식 한옥이 대부분이다. 최근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일원에 한옥 50가구와 타운하우스 150가구 규모로 조성된 ‘잠정햇살마을’ 한옥마을은 전통 한옥 구조로 지어진 겉모습과 달리 아파트 못지않은 편리한 내부 시설을 자랑한다. 현대식 자재로 보완해 단열 성능을 높였으며 모든 가구에 태양광 발전 시설까지 설치했다. 경기 김포 대명항 인근 ‘전통 한옥 명가마을’ 역시 전통 목구조 방식으로 건축하되 벽체에 숯을 넣고, 지열보일러를 설치해 에너지 절약형인 ‘패시브하우스’로 설계했다.
한옥을 지을 수 있는 택지도 활발하게 공급되고 있다. 우성산업개발은 충북 청원군 오창 미래지 농어촌테마공원에 한옥마을 택지를 분양 중이며, SH공사는 은평 뉴타운 단독주택 부지 3만6000㎡에 조성되는 은평 한옥마을 필지를 분양하고 있다. 이르면 6월부터 개인이 모여서 한옥 단지를 짓기도 쉬워진다. 국토교통부가 내놓은 ‘주택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한옥을 지을 때 50가구까지는 사업계획승인을 받지 않아도 되는 등 허가가 간소화된다. 이에 업계에서는 지역 특성에 맞는 틈새 주택인 한옥 공급이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한옥이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우리 고유의 가치가 스며든 전통 한옥은 점점 사라지고 편리한 현대식 한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무늬만 한옥’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옥 연구가이자 건축가 이재균 씨는 “현대식 한옥이 대량 양산되면서 선조들의 지혜가 깃든 과학적 설계나 아름다움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라며 “시간이 흘러 후손들이 창호지가 아닌 페어글라스(복층유리)가 끼워진 한옥을 우리 전통 가옥으로 알진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