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신흥국 위기의 유형

외자 이탈·경기 침체…악순환에 빠지다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 추진 이후 세계 주가와 신흥국 통화가치가 급락했다. 벌써 미국 중앙은행(Fed)이 테이퍼링을 너무 빨리 추진하지 않았느냐는 비판과 함께, 미국 증시에 낀 거품이 본격적으로 붕괴되는 것이 아니냐와 신흥국에서 제2의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미국 증시 거품 논쟁은 비교적 오래됐다. 첫 단추는 2012년 8월에 있었던 ‘주식숭배(cult of equity) 종료 논쟁’이다. 당시 빌 그로스는 채권을, 워런 버핏은 주식을 살 것을 권했다. 그 후 다우존스 지수가 30% 이상 올라 그로스 자신도 패배를 인정할 만큼 버핏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한동안 잠잠하던 거품 논쟁이 다시 불붙은 것은 꼭 1년 만인 지난해 8월이다. 이색적인 것은 비관론자 간에 벌어졌다는 점이다. 마크 파버는 지난해 남은 기간 안에 주가 20% 폭락을 주장한 데 반해,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앞으로 2년 동안 재테크 수단으로 주식이 가장 유망할 것으로 내다봤다.

곧이어 3차 논쟁이 벌어졌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로버트 실러와 우리에게 ‘투자의 정석’, ‘성장의 함정’의 저자로 알려진 제러미 시겔 간의 논쟁이다. 실러는 지난해 9월 당시 주가수익비율(PER)이 CAPE 지수(물가를 감안한 10년간 PER 평균치)보다 높은 점을 근거로 거품이 끼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시겔은 통계상의 오류를 들어 정면으로 반박했다.



증시 논쟁이 지속되는 속에 시장에서도 다섯 가지 거품 징후가 나타났다. PER가 24배로 1996년과 비슷한 점, 주식 비관론자들이 낙관론으로 돌아선 점, 채권은 거들떠보지 않는 점, 자금조달창구로 기업공개(IPO)에 몰리는 점, 개인이 레버리지 단타에 쏠리는 점이 그것이다. 거품론이 설득력을 얻어가자 마침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도 지난해 12월 회의에서 인정했다.


외자 이탈국의 공통된 특징
증시에 낀 거품이 붕괴되려면 특정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올해 1월부터 추진하고 있는 테이퍼링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너무 성급하게 추진하면 자금 이탈에 시달리는 신흥국 위기로 미국이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월가에서는 ‘제2의 에클스 실수(Eccles’s failure)’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테이퍼링 추진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신흥국들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급격한 자금 이탈’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점이다. 앞으로 신흥국 금융시장에서는 외국 자금이 추가로 유입되는 것보다 유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급격한 자금 이탈은 외환·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이며, 외환·금융위기에 따른 실물경제의 침체는 또 다른 자금 이탈을 유발하는 이른바 나선형 악순환 위기를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제 주요국의 경험적 사례를 보면 급격한 자금 이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외환위기, 금융위기 또는 국가채무위기 등 다양한 형태의 위기로 확산된다.

나라별로 차이는 있으나 급격한 자금 이탈은 특정 국가의 내부 요인과 외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에는 내부 요인보다 외부 요인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자기실현적 기대(self-fulfilling expectation)로 설명하는 시각이 공감을 얻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정부 정책 등에 대한 부정적인 기대가 형성될 경우 자본 흐름이 역전되면서 급격한 자금 이탈과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인접 국가로 전염된다고 봤다. 태생적 한계(original sin)를 갖고 있는 신흥국과 개도국의 금융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이 이론의 시각에 따라 파악하려는 경향들이 높아지는 추세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한 외자 이탈이 발생한 국가들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신용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이 급증한다는 점이다.

CDS 프리미엄과 해외 자본 유출입, 환율 움직임과의 관계를 보면 CDS 프리미엄이 장기 평균치에 비해 표준편차의 2배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외자 유입이 감소된다. 변동성이 더 심해져 장기 평균치에서 4배를 벗어나면 CDS 프리미엄이 이전보다 빠르게 상승하는 쏠림현상이 발생한다. 비슷한 시점에서 외자 순유입 규모도 장기 평균치에 비해 표준편차의 2배 이상 감소하는 이른바 ‘급격한 이탈 단계’에 진입한다.

이때부터 위기발생국의 통화가치는 절하되기 시작했다. 외국인 자금이 유입될 당시에는 절상되다가 해외자본 유입이 갑자기 중단되면 곧바로 대량 이탈로 급진전되는 과정에서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갈수록 국제 간 자금 흐름이 투기적인 속성이 강한 자금에 의해 주도됨에 따라 환율 변동성이 심해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기별로는 ‘급격한 외자 이탈’ 발생국의 통화가치가 장기 평균치에 비해 표준편차의 3배를 벗어나거나 해당연도 절하율이 직전 연도의 절하율을 10%포인트 상회할 경우 이전보다 빨라지는 쏠림현상이 나타나면서 외환위기로 악화된다. 이때 위기발생국은 외환보유고를 풀어 외환시장 안정에 나서면서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고 인식되면 CDS 프리미엄이 빠르게 떨어지는 진정 국면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위기발생국들의 외화 유동성에 의심이 갈 경우 투기성 자본들의 공격 대상이 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유동성 지원 등과 같은 계기가 마련되기까지 혼란 국면이 지속됐다. 이 단계에서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국통화표시 자금조달이 곤란하기 때문에 급격한 자금 이탈이 발생하면 외환에 대한 초과 수요가 급격히 증가해 심각한 외화 부족에 직면한다.

그 후 주가와 부동산 가격 하락에 따른 역자산 효과와 경제주체들의 디레버리지(부채 축소·저축 제고), 통화가치 절하에 따른 대차대조표 효과 등을 통해 비교적 큰 폭의 실물경기 침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악의 경우 실물경제 침체가 또 다른 외자 이탈을 유발하는 나선형 악순환 위기에 빠지는 국가도 있다.

이런 과정을 테이퍼링 이후 신흥국에 적용해보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와 달리 이번에는 개별 국가별로 커다란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빠르게 진전되는 인도, 인도네시아 등은 실물경기 침체 직전 단계인 외환보유고가 감소되고 있어 이들 국가를 중심으로 제2의 아시아 위기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금리 인상은 악순환의 시작일 수도
외환보유고 등 위기 지표를 토대로 앞으로 출구전략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경우 신흥국별 외환위기 가능성을 점검하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가장 외환위기 가능성이 높은 국가(high crisis countries)로는 외환보유고에 비해 경상적자와 재정적자가 심한 인도, 인도네시아, 남아공, 아르헨티나, 터키로 나타난다.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지금 당장은 외환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으나 신흥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할 경우 쉽게 전염될 수 있는 국가(middle crisis countries)로는 외환보유고는 적정수준 이상 쌓아 놓고 있지만 경상수지와 재정수지가 악화되고 있는 러시아, 체코, 태국, 멕시코 등이다. 반면 외환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희박하고 오히려 출구전략이 추진될 경우 기회요인이 더 많을 수 있는 국가(low crisis countries)로는 경상수지와 재정수지가 건전하고 외환보유고도 충분히 쌓아 놓고 있는 한국, 중국 등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고위험 위기국으로 분류되는 신흥국들이 잇달아 금리를 올리고 있는 점이다. 현시점에서 성급하게 금리를 올리면 ‘금리 인상→실물경기 침체→추가 자금 이탈→외환위기 발생’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악순환 이론’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신흥국들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고 글로벌화가 더 진전된 초연결 사회다. 이런 여건에서 신흥국들이 외환위기에 빠지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 ‘역풍’을 맞아 선진국 경기도 다시 침체 국면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상춘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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