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BUCKET LIST] 인간이 만든 불가사의, 자연이 빚어낸 불가사의 요르단 페트라와 와디 럼

요르단 페트라를 실제로 보기 전 일부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장엄에 대한 기대는 실재와 마주하는 순간 언제나 허망해져 버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페트라는 그렇지 않았다. 붉은 사암의 협곡 사이를 지나 느닷없이 출현하는 신전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비벼야 했다.


와디 럼.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한 사막을 사륜구동 차를 타고 달린다.

요르단 암만 국제공항 출입구를 빠져나오자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쳐왔다. ‘드디어 도착했군.’ 힘껏 심호흡을 했다. 공항을 나올 때마다 얼굴을 덮쳐오는 낯선 이국의 공기만큼 여행자를 설레게 하는 것이 있을까. 카레, 치즈, 요구르트, 아랍인들의 땀 냄새, 모래냄새, 그리고 온갖 낯선 식물들과 곤충, 동물들이 만들어내는 형용할 수 없는 냄새는 비로소 여행을 떠나왔다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다.

사람들은 대개 마흔 정도가 되면 젊은 시절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들과 안녕을 고하고 속수무책으로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텐데-가령 멋진 차를 산다든가, 새로운 취미나 공부거리를 가진다든가, 새로운 여자를 만난다든가 하는 방법들-이들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여행이 아닐까. 느닷없이 펼쳐지는 눈앞의 낯선 풍경과 머릿속을 꽉 채우는 당황스런 냄새는 스스로의 심장 박동 소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며 현지 시간으로 새벽 5시 30분 암만 국제공항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페트라, 천년 전 고대도시와의 조우
공항에서 암만의 호텔로 가 3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그리고 페트라로 향했다. 암만에서 약 150km가량 떨어져 있다. 차로 3시간여를 가야 한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축 쳐졌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를 본다는 설렘으로 가슴은 두근거렸다.

문득 2년 전 이집트로 갈 때가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카이로로 향하는 기내에서 본 영화가 ‘트랜스포머’였다. 그 영화에서 피라미드는 거대한 로봇들에게 박살 나고 있었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육중한 돌덩이들이 공중을 날아다녔다. 카이로에 도착해 피라미드 앞에 서자 왜 감독이 그 장면을 피라미드에서 찍었는지 단박에 이해가 됐다. 신비한 외계문명과 거대한 로봇을 설명하기에 피라미드만한 곳이 없었을 듯싶었다.

페트라 역시 ‘트랜스포머’에 등장한다. 외계 로봇 종족의 운명을 가를 열쇠가 신전 암벽 뒤에 감춰져 있는데, 이 신전이 바로 고대 도시 페트라를 대표하는 건축물 알 카즈네(Al Khazneh)다. 알 카즈네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최후의 성전’에도 등장했다. 고고학자 인디애나 존스(해리슨 포드)가 예수의 성배를 찾아다니는 시퀀스에 나온다. 존스가 말을 타고 협곡 사이를 달리다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면서 만나는 장밋빛 신전이 바로 알 카즈네다. 붉은 사암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그 건축물을, 그곳이 페트라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정교한 세트 정도로 여겼다.


좁은 협곡을 통과하면 거대한 고대도시가 나타난다.

페트라 앞에 서자 왜 그 영화의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성배를 숨겨놓은 장소로 이곳을 설정했는지, 외계인이 그들의 운명을 건 열쇠를 이곳에 숨겨 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세상에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고 직접 눈으로 봐도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일투성이다.

페트라는 ‘바위’라는 뜻을 지닌 고대 도시다. 2000여 년 전 세워졌다. 기원전 6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 정착한 유목민족인 나바테아인(Nabataeans)이 도시를 세운 주인공이다.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해발 950m의 바위투성이 고지대에 이 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번성했던 도시는 동로마에 정복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다 지진으로 결정타를 맞는다. 6~7세기 발생한 대지진은 삽시간에 도시를 집어삼켰다. 천년 동안 묻혀 있던 페트라는 1812년 스위스 탐험가 요한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발견되면서 다시금 세상으로 나왔다.

자, 누군가 내게 “페트라라는 곳은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 아마도 나는 잠깐 당황하다 “멋진 곳이죠. 환상적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 작가니까. 소설가 김연수에게 “이번에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어땠어요”라고 물었는데 “재미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얼마나 김빠지는 일일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고 한다. “페트라라는 곳은 말이죠….”

페트라라는 곳은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온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곳인 것 같다.-이십 대나 삼십 대의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들, 그들의 피를 식혀줄 여행지는 세상 구석구석 널려 있잖아.-페트라는 그러니까, 성공과 실패를 겪어본 사람, 멋진 남자 또는 여자에게나 관심이 있고 세상사에는 약간은 시큰둥한 그런 사람, 아마도 알 카즈네로 가는 협곡에 새겨진 돌의 무늬를 쓰다듬으며 ‘아직도 따뜻하군’ 하며 속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에게 어울린다.


페트라의 하이라이트 알 카즈네.

나이를 먹어서 좋은 건 별로 없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구별하고 먹을 줄 알게 되고 한 걸음 물러서서 볼 줄 안다. 여행 역시 그렇다. 한 걸음 뒤에 서서 전체를 볼 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여러 가지 디테일들이 보인다. 페트라에서 나는 돌들에 새겨진 무늬와 바람에 희미하게 닳은 조각의 흔적을 보았다. 그리고 베두인족의 텐트에서 하룻밤 지새울 기회를 가졌는데, 그때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던 수천, 수만의 별들. 역시 여행은 좋은 일이며 나이를 먹는 일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곳 페트라는 홍콩에서 9시간 대기해가면서도 충분히 와볼 만한 곳이다.


와디 럼의 붉은 바위를 돌아보는 관광객들.

와디 럼, 붉은 사막을 달리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 영국 군인이던 그는 연고도 없는 아랍 지역의 독립을 위해 1917년 와디 럼(Wadi Rum) 사막을 가로질렀다. 아랍의 적인 터키군의 요새가 있는 홍해 연안의 항구도시 아카바(Aquaba)를 함락하기 위해서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그의 영웅담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낙타를 타고 붉은 와디 럼을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아직도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원형경기장.

와디 럼은 암만에서 남쪽으로 320km 떨어져 있다. 면적이 720㎢ 달하는 광활한 사막이다. 언뜻 평지처럼 보이지만 가장 낮은 곳도 해발 1000m인 고지대다. 달리다 보면 수백 미터씩 솟은 바위산들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와디 럼에는 아직도 낙타를 몰고 살아가는 베두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 여행자들도 찾아든다. 지프를 개조한 트럭을 타고 사막을 여행한다. 열기구와 경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이들도 있다. 사막에는 여행자를 위한 베두인족 텐트도 마련돼 있다. 사막 한가운데 마련된 터라 전기도 없고 2인용 텐트에는 자물쇠도 없다.


홍해에 면한 휴양도시 아카바.

와디 럼에서 딱히 하는 일은 없다. 그냥 달릴 뿐이다. 울퉁불퉁한 사막을 시속 80km로 달린다. 얼굴에는 모래가 날아와 박힌다. 바위산을 만나면 바위산을 감상하며 잠시 쉰다. 때로는 바위산에 오르기도 한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다. 해질 무렵이면 사막은 황금빛, 아니 붉은색으로 물들고 베두인들은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기도를 올린다. 모래사막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마침내 지평선에 닿고 어느 순간 사라질 때쯤이면 텐트로 돌아간다.


요르단은 모래공예로 유명하다.

밤의 사막.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쌀알을 뿌려놓은 것 같다. 별빛 아래에서 베두인족이 만들어주는 ‘아라빅 커피’를 마시며 화덕에 양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리고는 밤새 노래를 부르다가 돌아간다.

그렇게 하룻밤 있어 보았다. 해가 뜨는 아침 무렵, 사막이 점점 장밋빛으로 변해갈 때, 로렌스를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로렌스는 와디 럼이 “신의 모습과도 같다”고 했다. 그가 와디 럼을 가로질렀던 까닭은 아랍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사막에서 신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와디 럼을 나와 아카바로 향했다. 자동차로 1시간 안팎의 거리. 홍해에 면한 휴양 도시다. 해변에는 고급 리조트들이 늘어서 있고 수영장마다, 백사장마다 비키니 차림의 여성이 가득했다. 아카바 만에는 140여 종의 산호림이 울창해 1년 내내 다이버들로 붐빈다. 유리로 된 바닥을 통해 해저를 관람하는 요트도 있다.


요르단 전통춤을 추는 남자들.

배를 타고 홍해로 나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은 후 한적한 근해에 정박해 스노클링을 즐겼다. 투명한 물 아래로 새하얀 산호초가 너울댔고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코앞까지 다가와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생각지 못한 요르단에서의 휴식. 방콕과 홍콩을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내일 따위는 잊고 선탠 베드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해변은 고뇌하는 인간을 싫어하지. 홍해의 눈부신 햇살이 바늘처럼 따가웠다.



Plus Info.



한국~요르단은 직항 항공편이 없다. 요르단항공, 에티하드항공, 대한항공 등으로 방콕, 두바이 등을 경유해야 한다. 입국 시 암만 국제공항에서 20요르단 디나르(JOD)를 내면 바로 발권해준다. 유효기간 1개월. 1JOD는 약 1600원이다. 페트라는 암만에서 약 3시간 거리. 페트라 국립공원 하루 관람료는 50JOD. 페트라~와디 럼~아카바 코스가 요르단을 여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루트다. 요르단 관광청 홈페이지(www.visitjordan.com) 참조.

암만은 요르단의 수도다. 해발 850m에 위치한다. 암만의 옛 이름은 ‘필라델피아’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정복자 필라델푸스(기원전 285~246년 재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옛 성터 ‘자벨 알 칼라’에 오르면 황토색으로 칠한 직사각형의 집들이 레고 블록처럼 들어선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인 사해는 요르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보통 바다 염도의 약 5~6배인 사해는 피부병이나 류머티즘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해에서 동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한 마인 온천은 ‘폭포 온천’이다. 낮은 산에서 섭씨 55도의 폭포가 떨어지면서 알맞게 식어, 폭포 아래에 고인 물로 천연 스파를 즐길 수 있다. 2000년 전 헤롯왕이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제라시는 요르단 북부에 자리한 도시다. 암만에서 약 50km 떨어져 있다. 요르단에서 가장 큰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기독교인들과 이슬람인들이 이 도시를 두고 뺏고 뺏기는 역사를 되풀이했다. 700년경에 있었던 지진으로 도시의 대부분이 흙더미 아래 묻혔는데, 일부를 발굴해 놓았다. 제우스 신전을 비롯해 광장, 극장, 문 등 고대 로마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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