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법의 페미니즘을 펼치는 화가 윤석남
가 윤석남을 만나고 온 후 컴퓨터 앞에서 한참이나 생각해야 했다. 그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어떻게 글로 풀어야 할지 쉽게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페미니스트 화가’라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녀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으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개념 자체보다 그런 말을 하고 이를 실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왠지 이름부터 ‘윤원석남’이라 해야 할 것 같고, 강하게 자기주장을 피력해야 할 것 같고, 남성적이고 거침없는 행동을 취해야 할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강한 기를 내뿜기보다 친근감이 들 정도로 인간적인 면모를 가졌고, 60대 후반의 유명 예술가임에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그렇지만 이러한 편안한 성격도 그녀의 삶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어느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에 꼬깃꼬깃 접혀 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분출한 것이다. 1939년 태어나 전쟁, 가난 등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는 포기를 더 많이 해야 했던 시절을 거쳤던 윤석남. 그러나 현실과 시대에 타협하기에는 ‘열정’이 너무 강했다. 급기야 1979년 4월 25일, 그날 오전 남편에게 받은 한 달 치 생활비를 들고 화방에 가서 화구를 ‘사버렸다’. 여자라면 전업주부를 천직으로 여겨야 하던 그 시대에, 여자가 운전대를 잡고 길을 나서도 손가락질을 받던 그 시대에, 더군다나 예술은 문화적 사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던 그 시대에 말이다.“스물여덟에 결혼했는데, 사는 것 자체가 존재감이 없더라고요. 일상에 안주할 수 없는 성격이었던 거지. 미술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릴 때마다, 뒤늦게 그림을 시작하면서 내 삶을 걸겠다고 결심을 한 후에도 스스로에게 ‘왜 그림인가?’라고 끊임없이 자문했어요. 그때는 예술이 요구되지 않는 시대였으니까.”‘왜 그림인가’와 더불어 ‘그림으로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1982년 첫 개인전의 주제가 ‘어머니’였던 것은 그녀의 머릿속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이 자연스레 표출된 것이다. 문필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9세의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하게 되면서 헤쳐 나간 삶의 방식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살림만 하고 호미를 어떻게 쥐는지도 몰랐던 사람이 6남매를 키우기 위해 흙벽돌로 살 집을 짓고 막노동을 불사했던 것이다.“호의호식한 것은 아니지만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지내던 분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가 위대하게 느껴졌어요. 한마디로 요약,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어머니는 ‘희생(물)’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강인한 삶의 태도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졌고, 우리 어머니의 역사를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당시에 손, 가슴, 얼굴 등을 모두 해체해서 그렸는데, 그럼으로써 어머니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말하자면 윤석남의 페미니즘은 연역법이 아니라 귀납법이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점진적으로 여성으로 옮겨간 것이다. 따라서 ‘여성주의’라는 대전제를 두고 그에 따른 작품을 만들고 전투적이거나 급진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편 것이 아니다. 어머니, 자신, 여성으로 확대하면서 작품을 통해 온화하지만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바로 윤석남의 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감을 주기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첫 번째 개인전 이후 ‘반에서 하나로’ ‘어머니의 눈’ ‘핑크 룸’ ‘늘어나다’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시를 살펴보면 대상의 확장을 느낄 수 있다. 나무판, 빨래판 등 위에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은 1950~60년대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연상케 한다. 쪽을 찐 머리, 무뚝뚝한 표정으로 굳게 다문 입,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의 소박한 한복 차림(화가 어머니의 외출복은 여름에 모시치마 저고리, 겨울에는 남색 벨벳치마에 황색 모본단 저고리 단 두벌이었다고 한다. 윤석남이 남색을 좋아하고 즐겨 쓴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 속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강한 아우라와 당당함이 느껴진다. 반면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핑크 룸’은 힘보다는 우왕좌왕 헤매는 불안함이 전달된다. 서양식 의자에 한복 천을 입히고, 뾰족한 쇠갈고리 모양의 다리를 달거나, 심지어 의자 위에 대못을 박아 놓기도 한 것들이다. 이는 부엌에도 방에도 있지 못하는 불안한 여성들,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늘어난다’에 이르러서는 여성들이 팔을 길게 늘이고 사회와 소통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슬프고 불안한 존재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내가 처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많이 통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알기 이전부터 남동생을 보라고 지어진 내 이름에서부터 여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죠. 그래서 남자 아이들처럼 놀았고, 그들과의 대결 의식이 어려서부터 잠재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얘기를 처음부터 할 수 없어서 어머니를 빗대어 시작했던 것이고 그것이 점차 확대돼 여성주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사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의 입지는 상당히 좁아요. 여성 얘기만 해야 하니까 위치가 작아지고 소외됩니다. 그렇더라도 지금의 불균형을 벗어나 균형을 맞춰가고 싶습니다. 언젠가 여자들의 힘이 커져서 ‘남성주의’에 해당하는 새로운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단 거기까지는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윤석남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늦깎이 화가지만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특별전에 참여하고, 1997년 여성 최초로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부산으로 피란 갔을 때에도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보러 갔을 정도로 학창 시절부터 전시회를 많아 찾아 다녔다. 특히 1983년 남편의 후원으로 1년간 프랫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에서 수학하며 뉴욕에서 지냈던 시간은 주옥같은 시간이었다고. “아침부터 2~3시간 드로잉과 회화 수업을 듣고, 30분 정도 걸어가서 판화 수업을 들었어요. 매일 그렇게 가니까 선생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는 1주일에 두 번 들을 권리밖에 없는데 왜 매일 오느냐’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매일 갔더니 나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고요. 당시 영어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실력이 전부였는데,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예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갤러리를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전시를 보고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도 많이 보았죠. 교통비 아껴서 1년 동안 오페라를 8편이나 관람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예술, 그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눈이 떠졌던 것 같습니다. 현대 회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그 당시 팝 아트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귀국 전 한 달 간 유럽 여행을 하고 돌아왔는데 가우디의 건축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지베르니 공원 등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요.”‘호기심 천국’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녀는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많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려 급히 가는 바람에 넘어지는 것이 다반사여서 무릎이 성한 날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시큰둥해질 나이임에도 그녀의 열정은 좀처럼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 이런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