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놀부를 위한 변명

제부터인가 우리의 관념 속에 놀부는 ‘못된 사람’, 흥부는 ‘착한 사람’의 대명사로 박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확대돼 부자는 놀부처럼, 가난한 사람은 흥부처럼 인식돼 마침내는 가진 자를 적대시하고 미워하는 풍조를 낳게 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판소리 ‘흥보가’를 자세히 들어보면, 놀부와 흥부에 대해 우리가 오해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정숙은 스승 동초 김연수로부터 소리를 이어 받은 명창이다. 최동현이 주해를 붙인 ‘동초 김연수 바디, 오정숙의 창(唱) 오가전집’ 중에서 ‘흥보가’의 몇 대목을 검토해 보자.판소리 흥보가는 놀부의 고약한 심보를 험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아니리)“(전략)…사람마다 오장 육보로되 놀보는 오장이 칠보던 것이었다. 어찌하여 칠보인고 허니, 심술보 하나가 외약 갈비 밑에 장기 궁짝만허게 병부줌치 찬 듯이 딱 붙어가지고, 이놈의 심술이 사철을 가리지 않고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디…”놀부의 심보가 고약하고, 흥부의 심성은 착한 것을 숨 막히게 주어 섬기지만, 놀부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놀부가 흥부를 쫓아내면서 말하는 장면이다.(자진모리)“네 이놈아! 말 들어라. 부모 양친 생존시엔, 너와 나와 형제라도 등분 있게 기르던 일을 너도 응당 알 터이라. 우리부모 야속허여, 나는 집안 장손이라 선영을 맡기면서 글도 한 자 안 갈키고, 주야로 일만 시켜 소 부리듯 부려먹고, 네 몸은 차손이라 내리사랑 더 허다고, 당초 일은 안 시키고 주야로 글만 읽혀 호의호식하던 일을 내 오늘 생각허니, 원통허기 짝이 없다. 네놈은 부모 때에 세도를 허였으니, 나도 이제는 기를 펴고 세도 좀 해 볼란다. 또 이 집안 살림살이 내가 말끔 장만했고, 논과 밭과 수만 두락 내 혼자 장만하여 네 놈 좋은 일 못 허겄다. 네놈의 권속들이 여태까지 먹은 것을 값을 쳐 받을 테나, 그는 다 못할망정 더 먹이든 않을 테니, 오늘은 너의 처자를 모도 다 앞세우고, 당장 집에서 떠나거라.”이 소리 대목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첫째, 놀부의 아버지는 동생 흥부를 편애해 더 귀여워했고 둘째, 맏이인 놀부에게는 교육도 시키지 않았으며 셋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살림을 일군 것은 모두 형 놀부의 노력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동생 흥부는 부모의 사랑을 혼자 받으며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면서도 놀고 먹는 게으른 백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흥부는 대책 없이 자식만 많이 낳아 놓고도(모두 29명이었다) 돈 벌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허구한 날 술이나 마시고 노름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태평한 실업자였던 것이 다음 대목에서 확연하게 들어난다.(아니리)(전략)“아이고 형님! 부모님 생전 허신 일은 제가 철을 몰랐으니, 어찌 허신 줄 모르오나, 제가 죄가 있사오면, 형님 분이 풀리시도록 종아리를 치옵던지, 둔장을 치시던지, 죄를 주고 이르시지, 이 말씀이 웬 일이시오.”“이놈아! 위선 네 식구를 생각해봐, 이놈아! 자식새끼만 돼지 새끼처럼 줄줄이 퍼 낳으니 더 먹일 수도 없으려니와, 이놈 밥만 먹고 나면, 구렁이 돌 듯 슬슬 돌아다니다가, 주막에 나가 외상술이나 먹고, 넉동사니 윷이나 놀고, 골패나 허고 다니는 꼴 보기 싫으니, 잔소리 말고 썩 나가거라.”흥부는 유식한 실업자였지만 백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일할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술이나 마시고 노름이나 하고 돌아다니니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마음씨 좋은 형이라도 화가 날만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좀 심하기는 했지만.갑자기 쫓겨나게 된 흥부는 형에게 갈 길을 물으니 놀부는 시니컬하게 일러준다.(아니리)“일 원산 이 강경 삼 포조 사 법성 오 개주 육 도둔의 파시평을 찾아가서…”파시평이란 바다 위에 일시적으로 서는 생선 시장이다. 이곳은 치열한 생활 현장이니 거기 가서 수많은 자식들에게는 ‘생선 엮기’를 가르치고, 흥부 부인은 얼굴이 고우니 술집을 차리면 이삼 년 안에 거부가 될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흥부는 이런 적극적인 경제활동은 하지 않고 이리저리 동냥을 다니다가 기껏 얻은 일거리가 죄인의 매를 대신 맞는 ‘매품 파는 일’이었으니 지극히 비생산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데다 어렵게 얻은 그 일자리마저도 늑장부리다가 새치기를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매번 구박 받으면서도 다시 형에게 가서 애원하다가 매만 맞고 형수에게도 봉변을 당하고서 말한다.(진양조)“아이고 형님 듣조시오. 형님이 저를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그는 한이 없사오나, 형수씨가 시아재 뺨치는 법 고금천지 어디서 보았소? (중략) 지리산 호랑아, 박흥보 물어가거라! 굶주리기도 나는 싫고, 세상 살기도 궈찮허다.”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가난에 시달리며 형으로부터 박대 받고 돌아와 식구가 함께 울 때 지나가던 스님이 이를 가엽게 여기고 “복이라 허는 것은 임자가 없는 법이오”라고 말하며 좋은 집터를 하나 잡아주어 그곳으로 옮기니 차츰 형편이 나아졌다는 것이다.그러던 어느 해 제비 한 쌍이 처마 안에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를 쳤는데 뜻밖에 큰 구렁이가 제비 새끼를 다 잡아먹고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다리를 다친 것을 본 흥부는 측은한 마음에 명태 껍질과 실로 친친 동여매 살려 주었더니, 그 제비가 이듬해 강남 갔다가 돌아오면서 ‘보은표 박씨’를 물어다 주었다. 박을 탈 때만 해도 흥부 처는 신세타령만 하고 열일곱째 아들은 송편 얻어 먹으려고 동네 아이들 가랑이 사이를 기다가 유혈이 낭자해 들어오는가 하면, 흥부는 친구 덕에 술이 얼큰히 취해 돌아와 우는 아내를 달래며 박을 탔는데 여기서 드디어는 대박을 터뜨린다.(아니리)박을 딱 타노니, 박속이 비었거던. 흥보 기가 맥혀, “허, 복 없는 놈은 계란에도 유골이라더니, 어떤 놈이 박속은 쏵 긁어다 먹고, 아 여, 남의 조상궤 훔쳐다 넣어놨구나, 여”…(중략)…흥보가 한 궤를 가만히 열고 보니, 아, 쌀이 하나 수북이 들고, 또 한 궤를 딱 열고 본깨, 거그는 그냥 돈이 하나 가뜩 들었는디, 궤 뚜껑 속에다가, 쌀은 평생을 두고 퍼내 먹어도 줄지 않는‘취지무궁지미’라 씌었으며, 또 돈궤에도, 이 돈은 평생을 두고 꺼내서 써도 굴지 않는‘용지불갈지전’이라 허였거늘, 흥보가 좋아라고 궤 두 짝을 떨어 붓기 시작허는디…(하략).흥부가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근면이나 성실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흥부는 요즘 말로 하면 소위 보은표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다름없이 돈벼락을 맞았다. 사람이야 무골호인으로 좋다고 하더라도 근면한 노력 하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복권에 당첨돼 부자가 된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좋아하는 것은 온갖 고생을 하면서 푼푼이 재산을 모으는 성실한 시민과 건전한 부자들을 모독하는 일이다.판소리 흥보가는 물론 형제간의 우애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 흥부전의 설화적 구조를 분석한 글을 보면, ‘선악형제담(善惡兄弟譚)’, ‘동물보은담(動物報恩譚)’, ‘무한재보담(無限財寶譚)’의 세 유형으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놀부가 탄 마지막 박에서는 삼국지의 도원결의한 형제 중 막내인 장비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꾸짖는 것을 보아도 우애가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자진모리)“(전략)…네 이놈, 놀보야! 천하에 중헌 것이 형제밖에 또 없거늘, 네놈은 웬 놈으로 친 골육인 제 동생을 구박축출 허였으며, 평생에 행헌 일이 남에게 못 헐 일만 가려가며 허여 왔고, 더구나 비금중에 백곡에 해가 없고, 사람을 별로 따라 죄 없는 제비여든, 무리헌 욕심으로 생다리를 꺾어 놓고, 공 받고져 원했으니, 그 죄 어찌 용납허랴!”이 흥보가의 근원설화에 대해서는 신라시대의 ‘방이설화’라는 설과 몽골의 ‘박 타는 처녀 설화’라는 주장이 있다. 신라설화인 방이설화는 형이 가난했고 동생이 부자였다. 형 방이는 동생에게 어렵게 누에와 좁쌀을 얻어 키웠는데 새가 와서 물어가자 그 새를 쫓아 바위 틈새로 들어가 금방망이를 발견하고 크게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방이설화와 흥부전의 형제가 이렇게 바뀐 것은 조선조 말기에 와서 장자 상속이 심해져 가난한 차자 이하가 터뜨리는 불만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선 중기까지는 요즘과 같이 남녀 구분 없이 유산을 ‘N분의 1’로 나누었고, 다만 맏이는 제사 몫으로 한 몫을 더 받았을 뿐이었는데 조선 말기로 갈수록 장자가 유산을 거의 다 차지하게 됐다.농토를 상실하고 그냥 착하기만 하던 차자 이하의 많은 서민들은 다른 돈 버는 재주가 전혀 없으니 동물(제비)이라도 알아주어 무궁무진한 재화(박 속의 보물)를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가난한 민중의 꿈을 노래한 것이 흥부가라 할 수 있다. 판소리 흥보가는 놀부가 개과천선하여 형제가 우애를 나누는 해피 엔드로 마무리된다. 부자 놀부가 ‘못된 사람’의 대표가 되기에는 아무리 봐도 억울한 구석이 있는 듯해 약간 변명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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