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月光족’이 명품시장 이끈다

하이는 100년 전만 하더라도 아시아 최고의 패션 도시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빨리 개방된 도시였기에 서구 패션에도 일찍 눈을 떴다. 상하이 황푸(黃浦)강 서쪽의 프랑스, 영국 조계(租界)에는 일찌감치 패션 상가가 들어서기도 했다. ‘십리양장적미인(十里洋場的美人: 십리에 걸친 서양 상점의 미인)’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한 세기를 뛰어넘은 지금 상하이의 패션 감각이 다시 분출하고 있다. 개방 성향이 강한 상하이 사람들이 최신 패션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면서 상하이가 중국 최고의 럭셔리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상하이 패션 1번지’로 통하는 난징루(南京路)는 예나 지금이나 첨단 패션이 살아 넘치는 곳이다.난징루의 럭셔리 상가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곳에서 만난 29세 직장 여성 황리눠(黃莉娜) 씨를 통해 그 답을 찾게 된다. 황 씨는 정보기술(IT) 관련 외국 기업에 다니고 있는 ‘골드미스’다. 그가 갖고 있거나 걸치고 있는 것은 대부분 명품 브랜드다. 옷은 베르사체, 핸드백은 구찌, 시계는 까르띠에다. 구두는 무슨 브랜드냐고 물었더니 ‘페라가모’란다. 그렇다고 황 씨가 부잣집 딸은 아니다. 약 7000위안(약 84만 원)의 월급이 수익의 전부다. 그는 저축보다는 쓰기를 즐긴다. 특히 명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이 달에도 그는 1만2000위안짜리 구찌 핸드백을 샀다. 주말 난징루에 들르는 게 가장 큰 낙이란다.황 씨는 중국의 소비 시장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웨광(月光)족’의 전형이다. ‘광(光)’은 중국어로 ‘돈을 모두 써버린다’는 뜻. 웨광족은 결국 ‘월(月)급을 모두 써버리는(光) 족속’을 뜻한다. 이들 위웨광족 수입은 5000∼1만 위안(약 60만∼120만 원) 수준으로 고소득 화이트칼라 계층이다.대부분 외자 기업이나 IT 업체에 근무하고 자유직업 종사자들도 적지 않다. 중국 정부의 1자녀 갖기 운동으로 독생자로 태어난 이들은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소비에서도 거침이 없다. 30세 안팎 나이의 이들이 중국의 소비문화를 이끌고 있다. 그들의 소비 행태를 이해하지 않고는 중국 내수 시장을 공략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상하이 럭셔리 명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이들 30대 ‘웨광족’이다. 당연히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외국 명품 시장과는 성격이 다르다. 중국브랜드전략연구회의 양칭산(楊淸山) 회장은 “상하이의 럭셔리 명품 시장은 고전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선진국 시장과는 달리 발랄하고 화려하면서도 보다 스타일리시한 제품이 환영을 받는다”며 “이들은 해외 유명 패션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다”고 말했다.세계적 시장 조사기관인 TNS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작년 10월 중국 주요 도시의 20∼45세의 고급 소비자 830명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시도했다. ‘럭셔리 제품에 대한 인식’이 앙케트의 주제였다. ‘럭셔리 명품이 성공을 뜻한다고 보느냐’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60%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다. ‘좋은 취미’라는 응답도 절반을 넘었다. 반면 ‘럭셔리 명품은 허영심의 발로’, ‘낭비’라는 데 동의한 응답자는 약 20%에 불과했다. 또 ‘럭셔리 명품을 가진 사람이 보기 싫다’라는 항목에 동의한 응답자는 2%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럭셔리 제품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것이다.상하이 럭셔리 시장의 정확한 규모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를 참조할 뿐이다. 중국은 이미 세계 3대 럭셔리 제품 시장으로 성장했다는 게 전문기관의 추산이다.골드만삭스 최신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럭셔리 제품 시장 규모는 약 60억 달러로 세계 전체 수요의 약 12%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초 중국의 비중이 1%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골드만삭스는 중국 럭셔리 시장이 연평균 20%씩 꾸준히 성장, 오는 2015년에는 11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그 때면 세계 전체 시장의 약 29%를 차지, 미국에 이은 제2위 시장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게 골드만삭스의 분석이다.갤럽은 럭셔리 명품 소비층 분석을 시도했다. 현재 약 5억 명에 이르는 도시 지역 거주자 중 연간 가처분소득 510만 위안(약 650만 원) 이상의 중산층은 1억4000만 명. 이 중에서 6700만 명 정도가 해외 명품 브랜드를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게 갤럽의 추산이다. 대략 한국 인구만한 명품 소비자가 중국에 존재하는 것이다.전문가들은 상하이 럭셔리 시장 규모가 중국 전체 시장의 약 30%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브랜드전략연구회의 양 회장은 “중국 전체 소비 매출에서 차지하는 상하이의 비중을 고려할 때 상하이의 연간 럭셔리 시장 규모는 최고 2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며 “최근 상하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주가가 급등하면서 럭셔리 시장은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명품 브랜드 업체가 이를 보고만 있을 리 없다. 상하이 럭셔리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내로라하는 업체가 상하이로 몰려들고 있다. 난징루에는 최근 파리와 도쿄에 이어 세계에서 단 3개뿐인 디오르의 고급 제품 전용 매장이 문을 열기도 했다. 고급 브랜드의 대명사인 프랑스의 루이비통은 1992년 상하이에 진출한 뒤 지금은 중국 내에 20여 개 전문 매장을 두고 있다. 상하이에는 최근 세 번째 매장이 들어섰다. 프라다는 향후 2년 동안 중국에 4000만 달러를 투자해 중국 내 매장 수를 현재의 2배인 15개로 늘릴 계획이다. 상하이가 중국 럭셔리 시장 공략의 전초기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의 패션 기업인 포츠 인터내셔널(Ports International)은 아예 상하이에 아시아본부를 설립했다. 아시아 소비자에 맞는 디지인으로 시장을 공략하자는 차원이다.요즘 상하이 패션 시장에 나타나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중국의 로컬 브랜드가 급성장한다는 점이다. 상하이 와이탄(外灘)에 본부를 두고 있는 라비(LaVie)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이 브랜드의 설립자는 이탈리아 밀란의 패션스쿨인 마로고니 출신인 지청. 그는 서양의 감각과 동양의 미를 결합한 디자인으로 세계 패션 업계의 거물로 주목 받고 있다. 라비 브랜드 제품의 60%가 해외에서 판매되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또 다른 상하이 브랜드인 ‘상하이 탕(Shanghai Tang)’ 역시 중국의 전통미를 가미한 디자인으로 세계 시장을 넘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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