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한 명품 ‘차이나 쇼윈도’

하이의 초여름은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더 많다. 잔뜩 찌푸린 하늘, 구름이 빌딩 숲으로 내려앉다가 이내 가랑비로 변하곤 한다. 상하이 사람들은 이 비를 ‘메이위(梅雨)’라고 한다. 매화가 곱게 필 때 내리는 비라는 뜻이다. ‘밀리어네어 페어 상하이 2007(이하 상하이 밀리어네어 페어)’이 열린 지난 6월 1일 역시 그랬다. 전시회장인 상하이전람관은 부슬부슬 내리는 메이위를 맞으며 황금빛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산을 접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다.전시장 내부는 온통 검정색이었다. 생각과는 달리 전시장은 한산했다. 정장 차림의 관람객들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속삭인다. 전혀 중국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시장에서 대놓고 하품하고, 전시품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던 중국인 아니던가…. 안내를 맡은 주최측 관계자에게 ‘왜 이리 사람이 적으냐’고 물으니 ‘워낙 입장료가 비싸 꼭 올 사람만 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입장료가 어지간한 중국 대학의 대졸 초임 월급인 1800위안(약 22만 원)에 달한다. ‘내가 온 곳이 최고 럭셔리 제품만 전시되는 전시회였지…’라고 새삼 깨닫게 된다. 주최측은 정장 수준의 옷차림을 하지 않은 관람객은 입장시키지 않았다. 5촉짜리 전구 아래에서 빛나는 화려한 보석이 여기가 럭셔리 제품 전시회임을 다시금 확인해 준다.핸드폰이 전시돼 있다. ‘베르투(VERTU)’라는 브랜드가 붙어 있다. 기능상으로는 일반 핸드폰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숫자 버튼이 있고, 액정 화면이 있고, 필자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옆에 보라색 코브라 뱀 한 마리가 핸드폰을 감싸고 있다. 코브라는 48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졌단다. 전시장 도우미에게 얼마냐고 물으니 ‘28만 위안’이라고 답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3500만 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가격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그렇게 비싸냐’고 물었다. 그는 ‘전 세계에서 8개밖에 없는 제품’이라고 답했다.뒤쪽에 신사가 다가왔다. 자신을 베르투의 중국 사업 총괄이라고 소개한 정젠펑(鄭劍風) 선생은 한마디 더 거든다. 그가 웃으며 던진 한마디.‘춘짜이더, 주스허리더(存在的, 就是合理的)!’ 우리말로 옮기면 ‘존재한다, 고로 합리적이다’라는 정도로 해석되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가 살 사람이 있기에 상품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억 원이 넘는 핸드폰을 살 수 있는 소비자가 이곳 상하이 어딘가에 있기에 베르투의 코브라는 멀리 영국에서 이곳으로 날아왔을 터다.6월 1일부터 3일까지 열린 상하이 밀리어네어 페어(중국명 ‘富世生活中國峰會’)는 그런 전시회였다. 불과 몇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최고급 럭셔리 제품 150여 점이 이번 행사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자동차 보석 시계 골동품 위스키 그림 등이 전시됐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금융사인 ABN암로가 자산 관리 상담 부스를 차리기도 했다. 지중해 크루즈 여행 상품을 파는 부스도 있었다. 이번 행사를 총 지휘한 데이비드 종 상하이 밀리어네어 페어 대표는 “출품한 보석류 총 가격만 약 3억 달러에 달한다”며 “부쉐론 초파드 가산다이아몬드 등 내로라하는 호화 보석상이 다 모였다”고 말했다.럭셔리 제품 전시회인 밀리어네어 페어가 상하이에서 열리기는 작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올해는 작년보다 참여 기업 수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만큼 상하이 전시회의 재미가 좋았다는 얘기다.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만한 몇 안 되는 럭셔리 제품 고객을 찾아내는 데 상하이가 적격인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생겼다. 스위스 제네바의 유명 보석 세공 업체인 골드비시가 사파이어 보석으로 장식한 핸드폰 4대를 이번 전시회에 전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제품은 전시회에 나오지 못했다. 이미 어느 중국인이 사갔기 때문이다. 핸드폰 가격이 얼마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행사장 주변에서 ‘500만 위안(약 6억 원)은 족히 넘을 것’이라는 얘기만 흘러 다닐 뿐이다.다시 전시장.코브라 핸드폰 옆에 유럽에서 날아온 또 다른 럭셔리 제품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코냑인 루이 13세. 전 세계적으로 786병밖에 없는 블랙 크리스털 제품이 전시되고 있다. 레미 마탱 중국법인 영업담당인 판자오후이(潘昭暉)는 “각 병에는 1번부터 786번까지 일련번호가 붙어있다”며 “전시된 제품은 403번”이라고 말한다. 이 제품은 중국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되는 것일 뿐, 중국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당초 이 제품 중 100병이 중국(홍콩 포함) 지역에 배정됐고 모두 팔렸다는 게 판자오후이의 설명이다.조용한 전시장 분위기가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럭셔리 자동차 재규어 부스였다. 행사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인물은 이안 칼럼. 자동차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콘셉트카 디자이너로 이름 높다. 그가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재규어는 C-XF모델의 4도어 콘셉트카였다. 올 초 디트로이트에서 처음 선보인 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공개됐다.칼럼이 자동차를 둘러싸고 있는 관객들에게 “자동차 앞모양이 무엇을 닮은 것 같으냐”고 묻는다. 한 중국 기자가 ‘재규어’라고 답했다. ‘노(NO)’, 칼럼이 고개를 저었다. 한 여성이 ‘라이언’이라고 답했다. 칼럼의 입에서 ‘YES’라는 대답이 나왔다. 자동차의 콘셉트를 기존 재규어 자동차의 고양이 콘셉트에서 보다 힘 있고, 매력적인 사자로 바꿨다는 게 이안 칼럼의 설명이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자동차 앞모습에 사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칼럼은 “C-XF는 재규어 자동차의 설계 기술의 결정체”라며 “자동차의 곡선미를 살리면서도 강인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재규어의 C-XF모델 자동차는 올 초 자동차 분야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플릿월드 상을 받을 만큼 업계에 화제가 되고 있다.여성 관람객의 마음을 끄는 것은 역시 보석이다. 다이아몬드 백금 사파이어 등 호화 반지와 귀고리, 목걸이 등이 상하이의 여심을 잡는다. 가산 부쉐론 래리 로렌조 등의 보석류 전시관은 언제나 만원이다.그중에서도 150년 전통의 보석 세공 역사를 자랑하는 부쉐론의 부스가 돋보였다. 유리상자 안에 놓여 있는 보석들은 빛을 반짝이며 여심을 끌어당기고 있다. 은은한 황금빛을 띠는 다이아몬드, 보라색 사파이어, 흰색 광채를 내뿜는 백금 등이 여성의 발길을 잡는다. 검정색 천을 바탕으로 실에 매달려 전시된 반지는 무한한 허공을 날고 있는 듯하다. 전시장을 지키고 있는 디미트리 카츠로우스키 중국 본부장은 반지 가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왜 하필 가격을 묻느냐’고 되받아친다. 그는 “제품의 품격과 멋에 관심을 가져달라”며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부쉐론이 중국에 진출한 것은 2년 전이다. 상하이 황푸(黃浦)강이 내려다보이는 와이탄(外灘)가 18번지에 매장을 마련했다. 카츠로우스키 본부장은 판매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매장 매출이 연간 100%씩 성장하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 상하이 여성들의 멋 감각이 갈수록 세련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싱가포르의 보석 패션 업체인 로앙&노이 전시장.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러운 품격이 풍기는 액세서리가 수줍은 듯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상하이 직장 여성인 톈린(田琳) 씨는 “로앙&노이 제품은 서구 제품과는 달리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는 듯해서 좋다”며 “동양 여성들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평가했다.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는 보석에 대해 꽤 조예가 있어 보였다.피아노 제작 업체인 스타이웨이&선스는 중앙 홀에 큼지막하게 부스를 차렸다. 상하이 부자들에게 무엇인가 할 얘기가 많다는 몸짓이었다. 125년 역사의 역사를 갖고 있는 스타인웨이&선스는 2년 전 중국에 진출, 상하이 푸둥(浦東)의 보세구에 매장을 두고 있다. 이 회사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리강(李剛) 씨는 “요즘 한 달에 1∼2대쯤 팔리고 있다”며 “특별한 광고를 한 것도 아닌데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중국 마케팅에 본격 나설 계획이란다.이번 전시회에는 중국 기업도 참가했다. 이 중 혼례복 전문 업체인 NE타이거는 현지 관객들로부터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다. 붉은 색 계통의 옷을 디자인, 현장에서 패션쇼를 연출하기도 했다. NE타이거 사장이자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장즈펑(張志峰)은 기자들을 몰고 다녔다.“중국은 곧 세계 제2위 럭셔리 제품 시장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현재 이 시장은 외국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각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 브랜드를 창출해 내야 합니다. 이는 일반 소비자와 기업, 정부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장 사장의 이날 발언은 CCTV, 상하이패션TV 등의 주요 뉴스 시간에 여러 차례 방영됐다.이번 전시회 출품작 중 가장 고가는 어떤 것일까. 답은 엉뚱하게도 그림이었다. 중국의 저명 화가인 류링화(劉令華)가 지난 2001년 상하이에서 열렸던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 회담을 위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최근 열렸던 경매에서 3000만 위안이 넘는 가격에 팔린 것으로 알려지면서 더 유명해졌다. 우리 돈 36억 원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주최측은 이 작품의 가치를 고려, 전시 시간을 엄격히 통제하고 촬영을 금지하는 등의 철통 보안을 하기도 했다.이번 전시회의 또 다른 멋은 밤이었다. 전시회 첫날 밤. 상하이 주재 프랑스 총영사관이 주재한 ‘프랑스의 잠 못 이루는 밤(Nuit Blanche)’ 파티가 열렸다. ‘프랑스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럭셔리 전시품이었다. 이 행사가 고안된 것은 지난 2002년. 당시 파리 시정부의 크리스토프 지라르 문화부장의 제안으로 이뤄졌단다. 이 축제가 파리에서 열리는 매년 10월 첫 번째 주말에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축제 장소에 모여 밤새 마시고, 먹고, 떠들고, 놀고, 노래하는 시간을 보낸다.상하이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 부부, 상하이 TV에 자주 등장한 앵커, 연예인,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이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프랑스의 코냑과 와인에 젖어들었다. 파티장 정면에는 프랑스의 문화를 소개하는 영상물이 방영되기도 했다. 프랑스 문화는 그렇게 상하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전시회의 마지막 행사는 ‘자선의 밤’이었다. 단순한 불우이웃 돕기 행사와는 달랐다. 전시회에 참가한 업체들은 고가 제품을 경매에 내놓았고 그 수익은 모두 자선기금으로 모아졌다. 서너 시간 만에 모아진 모금액은 100만 위안(약 1억2000만 원). 이 돈은 모두 장애인 올림픽을 위해 쓰인다.“우리가 이번 행사를 연 것은 럭셔리 제품으로 몸을 치장하고, 사치품으로 위세를 떨치기 위함은 결코 아닙니다. ‘부(富)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라는 메시지를 주자는 데 이번 전시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전시한 럭셔리 제품들은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닌 고품격의 삶을 유지하는 데 쓰일 것입니다.” 데이비드 종 대표의 연설로 상하이 밀리어네어 페어는 끝났다. 참석자들은 상하이의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이번 전시회의 마지막 ‘전시품’이 된 한 구절을 되새길 것이다.‘부(富)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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