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함께 한 인생과 사업의 동반자

버핏과 멍거

난 5월 5일 오전 9시 30분. 오마하 컨벤션센터의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에 2명의 노인이 올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조명은 이후 6시간 동안 오로지 2명의 노인에게 맞춰졌다. 두 노인은 코카콜라와 물을 마시면서 점심시간 45분을 제외한 6시간 동안 2만7000여 명의 주주를 대상으로 ‘투맨 쇼’를 진행했다.주인공은 벅셔해서웨이의 워런 버핏(76) 회장과 찰리 멍거(83) 부회장. 바로 오늘의 벅셔해서웨이를 만든 주인공들이다. 주주들의 질의에 답하는 두 사람의 스타일은 대조적이다. 질문이 나오면 버핏이 먼저 답을 한다. 정곡을 찌르는 혜안과 기지 넘치는 언어로 주주를 사로잡는다. 말이 많은 편인 버핏은 자신의 발언이 끝나면 반드시 “찰리?”하고 마이크를 넘긴다. 멍거의 말은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할 말이 없다”거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식의 단 한마디의 말로 자신의 심경을 나타낸다.주주: “켄터키 주에서 온 열 살 된 소녀입니다. 돈을 꾸준히 버는 방법을 알고 싶은데요.”버핏: “지금은 어리지만…(중략)…나는 어릴 때…(중략)…어쨌든 빚지지 마십시오. 찰리?”멍거: “남들에게 자신을 믿게 하십시오. 모든 일이 이뤄질 겁니다.”두 사람의 차이는 이런식이다. 이 예에서 보듯 버핏은 달변이고 멍거는 눌변이다. 버핏은 사교적이지만 멍거는 우직하다. 정치적 성향도 버핏은 민주당 쪽이고 멍거는 공화당 쪽이다. 버핏은 투자보고서를 읽는 게 취미일 정도로 사업이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인 반면 멍거는 다른 일에도 관심이 많다.버핏은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경영 전문가인데 비해 멍거는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다. 나이로나, 성격으로나 버핏이 어머니 스타일이라면 멍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믿음을 주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이처럼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인생 동행은 지난 1959년 시작됐다. 1930년생인 버핏이 29세, 1924년생인 멍거가 35세 때였다. 당시 두 사람은 나이만큼이나 혈기가 왕성했다. 버핏은 ‘버핏 어소시에츠’란 투자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투자 활동에 나설 때였고, 멍거는 자신이 만든 ‘멍거 톨슨 앤드 올슨’이란 부동산 법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것일까. 제3자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고 결국 평생 한 배를 타게 됐다.버핏은 잘 알려졌다시피 어릴 때부터 돈에 관한 천재적 소양을 발휘했다. 증권 브로커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면서 불과 여덟 살 때 주식에 관한 책을 읽었다. 열한 살 때 ‘시티서비스’라는 주식을 샀으며 열세 살 때 소득세를 냈다.버핏은 “어릴 때 십수 가지의 돈벌이를 했다”고 회상하곤 한다. 그중 빼놓지 않는 게 시티서비스 주식 매입. 버핏은 당시 주당 35달러에 주식을 샀지만 주식은 27달러까지 떨어졌다. 가슴이 덜컹한 버핏은 노심초사하다가 주가가 40달러까지 회복하자 “이젠 됐다”고 주식을 팔아 버렸다. 그러나 웬걸. 주가는 200달러까지 치솟았고 버핏은 쓰린 가슴을 안고 그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저평가된 주식을 산 뒤 인내를 갖고 장기 보유해야 한다는 것을 이때 배웠다”는 게 버핏의 회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버핏은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에 들어갔으나 후에 고향인 네브래스카대학으로 전학해 거기서 졸업했다. 대학 졸업 즈음 그는 인생을 바꿔놓는 책을 접한다. 제목은 ‘현명한 투자자(The Intelligent Investor)’. ‘가치 투자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컬럼비아대의 벤저민 그레이엄 교수가 지은 책이었다.버핏은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그레이엄의 제자가 됐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그레이엄이 운영하는 회사의 애널리스트로 일하며 ‘그레이엄식 이론과 실전’을 체득했다.고향인 오마하로 돌아온 1956년 버핏은 ‘버핏 어소시에이츠’란 투자 펀드를 결성해 본격적인 자산 운용에 뛰어 들었다. 첫 펀드의 모금액은 10만5000달러. 버핏은 고작 100달러만 출자했다. 이 펀드는 1969년 해산할 때까지 연평균 30%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냈다. 버핏은 계속해서 투자 펀드를 만들었으며 이를 운용하는 회사로 ‘버핏 파트너십’을 설립했다.이 과정에서 눈에 띈 것이 대형 방직회사인 벅셔해서웨이다.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버핏은 1962년 처음 벅셔해서웨이 주식을 사기 시작했다. 1965년엔 사실상 대주주가 됐으며 1969년엔 버핏 파트너십을 해산하고 벅셔해서웨이 최고경영자로 취임한다. 오늘날의 벅셔해서웨이가 만들어진 과정이다.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멍거의 반대. 버핏이 모든 투자 펀드를 해산하고 벅셔해서웨이 경영에 직접 뛰어들 결심을 하자 절친한 친구인 멍거는 만류했다. 이유는 “방직업은 사양산업”이라는 것. 이에 버핏은 벅셔해서웨이를 투자 지주회사로 키우겠다는 자신의 청사진을 펼쳐 보인 뒤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버핏이 일찌감치 투자에 천재성을 발휘했다면 버핏과 같은 오마하 출신인 멍거는 공부 잘하는 천재로 유명했다. 미시간대에 입학한 뒤 졸업을 하지 않고 곧바로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엘리트였다. 이후 친구들과 부동산 관련 법률회사를 설립해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965년 법률회사를 접고 대신 투자 전문가로 나선다. 이때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버핏이다. 지난 1959년 처음 만나 친구로 지내던 버핏은 멍거의 투자 철학과 투자 원칙을 눈여겨보고 아예 투자 전문가로 변신토록 권유했다. 이 권유를 받아들인 멍거는 연평균 26%라는 놀라운 수익을 냈다.1969년 버핏이 벅셔해서웨이의 경영에 나선 몇 년 후 멍거는 벅셔해서웨이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두 사람이 공동운명체가 된 것.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성격은 버핏의 가치 투자의 빛을 더욱 발하게 했으며 오늘날의 벅셔해서웨이를 만드는 동력이 됐다. 멍거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벅셔해서웨이도 없었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미국의 경제지 포천의 칼럼니스트 앤디 서워는 “버핏이 세계적인 록그룹 롤링스톤스의 리더 ‘믹 재거’라면 멍거는 ‘쿨’한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일 뿐”이라고 비유했다. “키스 리처드가 있어 믹 재거의 가창력이 빛나는 것처럼 멍거가 있어 버핏의 존재가 더욱 두드러진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제 버핏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멍거가 자신의 권리를 찾을 때”라고 주장하는 등 멍거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실제 멍거는 버핏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다. 버핏이 투자 후보기업 7~8개를 갖고 조언을 구하면 멍거는 그중 2~3개에만 ‘OK’ 표시를 할 정도로 꽉 막힌 노인네다. 버핏이 망설일 때 멍거에게 자문하면 30초 만에 답이 돌아온다고 해서 버핏은 멍거를 “세계 최고의 30초 컨설턴트”라고 부르기도 한다.버핏이 한국 주식에 대한 투자를 망설일 때 강력히 추천한 것도 다름 아닌 멍거였다. 멍거는 만물박사다. 그가 투자를 결정할 때는 경제·경영학은 물론 심리학·생물학까지 총동원된다. 그러다보니 버핏이 부족했던 ‘미래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버핏의 ‘현재 가치’에 멍거의 ‘미래 가치’가 더해져 그만큼 빼어난 주식을 고르게 된다는 얘기다. 버핏은 멍거를 “평생의 파트너이자 벅셔해서웨이 절반은 그의 공로”라고 높이 평가한다. 멍거는 “우리는 결혼한 관계”라는 한마디로 둘 사이를 표현한다.멍거는 이번 주총 기간 중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기업은 신세계이며 가장 좋아하는 기업인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태산 같은 그의 존재가 버핏이라는 현인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버핏은 능력도 출중하지만 인복도 많은 사람이다.버핏이 한국 주식에 대한 투자를 망설일 때 강력히 추천한 것도 다름 아닌 멍거였다. 멍거는 만물박사다. 그가 투자를 결정할 때는 경제·경영학은 물론 심리학·생물학까지 총동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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