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우량기업 싸게 인수 50년 전 장부까지 꼼꼼히 보관
카를로스 슬림(67)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부자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 줄리안 슬림 하다드 아글라마즈(Julian Slim Haddad Aglamz)는 레바논 난민이었다. 오트만 왕국의 군대가 레바논 땅을 짓밟으면서 10대 때 이역만리 멕시코까지 이주하게 된 것이다. 낯선 땅에서 성실하게 돈을 모으며 살던 줄리안 슬림의 인생은 1910년 멕시코 혁명을 계기로 완전히 바뀐다. 당시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멕시코시티는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부자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볼 줄 알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용기도 갖췄다. 줄리안 슬림은 멕시코시티를 탈출했거나 해외로 빠져나갔던 일반인들과 달리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멕시코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헐값에 멕시코시티 중심부의 부동산을 과감하게 매입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결국 떼돈을 벌 수 있었다.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카를로스 슬림은 부동산이 아니라 기업 사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남들이 해외로 이주를 결심할 만큼 큰 변란이 발생했을 때 그는 기업을 헐값에 사들였다. 투자 대상만 달랐지 우량한 멕시코 기업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소신과 용기 있는 행동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슬림 회장은 특히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철저한 경제 교육을 받았다. 매주 일요일이면 슬림 회장은 아버지에게 5페소를 용돈으로 받았고 지출 내역을 반드시 장부에 기록해야 했다. 현재 슬림 회장의 집무실에는 50여 년 전 장부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70센타보(1센타보는 100분의 1페소)짜리 음료수를 산 기록 등이 선명하다. 어린 시절 몸에 익힌 꼼꼼함을 바탕으로 그는 26세에 이미 40만 달러를 모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돈을 토대로 자신이 투자해 거액으로 불린 것이다.슬림 회장은 이 종자돈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기업 인수를 시작했다. 그는 유리병 생산 공장을 사들였고 건설 회사를 창업했으며 부동산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들이 모태가 돼 그루포 카르소(Grupo Carso)란 지주회사로 커졌다. 카루소는 자신의 이름인 카를로스와 부인의 이름 소우마야 도미트(Soumaya Domit)를 합해 만든 것이다.또 카를로스는 1976년 담뱃갑에 라벨을 인쇄하던 ‘갈라스 데 멕시코’란 회사의 주식 60%를 100만 달러에 사들였다. 5년 후 슬림은 이 회사의 현금을 활용해 ‘시가탐’이란 담배 제조 회사를 사들이면서 사세를 키워나갔다.하지만 이 정도로 기업을 키운 사람은 당시에도 많았다. 슬림 회장이 세계 최고 거부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계기는 1982년 불어 닥친 멕시코 페소화 위기였다. 당시 멕시코 경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페소화 가치가 6개월 사이 50%나 하락하는 급격한 경제 혼란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물가와 이자율이 치솟고 곳곳에서 부도 사태가 이어졌다. 대범한 투자자들도 돈을 챙겨 외국으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던 시절이었다.하지만 슬림 회장은 남들과 달리 기업을 사들였다. 1984년 그는 1300만 달러를 들여 ‘세구로스 데 멕시코’란 보험사를 인수했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워낙 헐값에 사들였기 때문에 이 인수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 회사는 네 차례나 분사했지만 현재 자산은 15억 달러에 달한다. 분사한 자산을 제외하고도 원금 대비 100배가 넘는 이익을 얻은 셈이다. 또 1985년엔 ‘샌본스’란 소매 유통업체도 사들였다. 매입 가격은 3000만 달러였는데 현재 이 회사는 한 해 세전 이익만 5억 달러가 넘는다. 1986년엔 5000만 달러를 들여 ‘미네라 프리스코’란 광산회사를 샀고 이후에도 자동차 부품 회사인 ‘콘두멕스’, 광산회사인 ‘엠프레사스 나코브레’도 매입했다. 이들 회사는 모두 그루포 카르소의 자회사로 편입됐다. 현재 그루포 카루소의 가치는 80억 달러에 달한다. 여기까지 그는 조용히 일을 추진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는 조용히 지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사업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바로 공기업 민영화였다.1990년 멕시코 대통령 카를로스 살리나스는 우리나라의 KT격인 국영 통신회사 ‘텔멕스’ 주식을 팔아 민영화를 단행한다. 이 과정에서 슬림 회장은 텔멕스 입찰에 성공, 총 18억 달러를 들여 텔멕스 주식 51%를 매입할 수 있었다.워낙 큰 규모의 기업 인수였기 때문에 두고두고 무성한 소문이 이어졌다. 대통령궁의 친구를 이용해 슬림 회장이 부당하게 입찰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실제 슬림 회장은 살리나스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1993년 기금 모금 파티에서 그를 포함한 30명의 재계 리더들은 대통령이 속한 제도혁명당(PRI)에 1인당 평균 2500만 달러의 후원금을 내기도 했다.텔멕스는 슬림 회장 인수 후 7년간 독점적 지위를 누렸으며 이후 경쟁 체제가 도입됐지만 경쟁 회사로부터 높은 접속료를 받아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영업을 할 수 있었다. 텔멕스는 현재 멕시코 유선전화 시장의 90%를 장악했다. 물론 이런 독점적 지위 때문에 기업이 커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의 감각적 경영 전략도 성장에 한몫을 담당했다.일례로 텔멕스는 빈부 격차가 심한 멕시코 상황을 감안해 전화와 인터넷 접속, 컴퓨터를 패키지로 묶어 싼 값에 공급했다. 이런 저가 정책으로 가입자는 크게 늘어났다. 또 텔멕스의 무선 사업부가 분사해 설립된 이동통신업체 ‘아메리카 모빌’도 같은 전략으로 대성공을 이뤄냈다. 당시 업계 1위 업체는 ‘이우사셀’이란 회사였는데 아메리카 모빌은 이우사셀과 경쟁하기보다 기존 이동통신사의 ‘비(非)고객’이었던 저소득층을 공략했다.아메리카 모빌은 은행 계좌나 신용 카드가 없는 고객의 이동전화 가입을 받아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불카드 발행 등을 통해 가입자를 늘려나갔다. 이런 저소득층을 겨냥한 전략이 실효를 거두면서 2000년에 900만 명이던 아메리카 모빌의 가입자는 현재 3900만 명으로 급증했다.텔멕스와 아메리카 모빌은 통신 지주회사격인 ‘카르소 글로벌’에 편입돼 있다. 슬림 회장은 아메리카 모빌 주식 30%(약 250억 달러 상당)를 보유하고 있으며 카루소 글로벌 주식 80%(약 110억 달러 상당)도 보유하고 있다.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최근 추정한 그의 재산 총액은 약 531억 달러다. 특히 올 들어서만 그의 재산은 무려 40억 달러나 불어나 워런 버핏(524억 달러)을 제치고 세계 2위의 부자로 등극했다. 게다가 조만간 그가 세계 1위 부자로 올라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거액을 기부해 조만간 부자 순위에서 밀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기부에 대한 슬림의 생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최근 열린 기자회견이다. 슬림 회장은 멕시코시티의 건강연구재단에 4억5000만 달러를 기부하는 자리에서 “사업가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다”고 일갈했다. “우리 신조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산타클로스처럼 돌아다니며 기부하는 게 아니다. 가난은 기부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사업가는 기부 활동보다 기업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사회에 더 공헌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그의 생각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이런 생각을 갖고 있긴 하지만 슬림 회장도 최근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기부 활동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멕시코 내에서 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많다는 것을 의식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멕시코에서는 독점과 정경유착 때문에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에서 세계 1위를 위협하는 부자가 나온데 대한 반감이 있고, 이 때문에 슬림 회장은 현지 언론에 풍자만화 주인공으로 종종 등장하곤 한다.하지만 막상 슬림 회장 본인은 세계 2위의 거부이면서도 보통 사람들 못지않게 검약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그의 집무실과 본사는 21만8000명의 직원을 이끌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멕시코시티의 낡은 3층짜리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쿠바산 시가의 광적 팬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취미 활동도 없다.부인과 사별한 후 그는 요즘 아들을 경영자로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의 큰아들 카를로스(39)는 그루포 카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둘째 아들 마르코 안토니오(38)는 연매출 25억 달러의 금융회사 인버사를 경영하고 있다. 셋째 아들 패트릭(37)은 아메리카모빌의 회장이고, 양자인 다니엘 하즈 마보움라드는 이 회사 사장이다. 또 둘째 양자인 아르투로 엘리아스 아유브는 텔멕스 재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슬림의 대변인도 맡고 있다. 셋째 양자는 건축가로 슬림의 새 미술 박물관을 디자인하고 있다.슬림 회장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인해 엄청난 이익을 봤다. 하지만 지금은 민족주의자로 변했다. 미국 통신회사들이 경쟁 체제로 접어든 멕시코 시장을 호시탐탐 넘보자 멕시코 자국 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민족주의에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노조도 그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남들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상황에 따라 과감한 변신을 꾀하는 그는 두고두고 재계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길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