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찌그러진 냄비가 들려주는 사연이 들리나요
화가 고영훈은 인사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추워진 날씨 얘기부터 꺼냈다. 그림에 쓸 호박을 따야 하는데 지난 밤 사이에 모두 얼어 못 쓰게 됐다는 것이다. 호박 넝쿨을 그리려고 줄기와 잎을 따다 스케치해 놓았는데, 작품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보고 그려야 할 대상이 없으니 난감하다는 얘기였다.“물론 예전에 찍어 놓은 호박꽃 사진이나 지난봄에 그렸던 호박을 보고 그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 차이를 모르더라도 저는 압니다. 무엇이 잘한 것이고 잘못한 것인지, 무엇인 진짜고 가짜인지…. 대상을 보고 느끼고 접근해 가면서 알아가면서 그리는 것이 진짜입니다. 화가는 세상의 진리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지키고 싶은 도덕률이고, 그런 경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하면 그것은 작품이라기보다 공장에서 기계로 만들어 내는 공산품과 다를 바 없지요.”그는 극사실주의, 즉 사물을 실재와 똑같이 그려내는 작업을 한다. 이는 사진기가 발명되기 이전에 회화가 추구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후 그 역할을 훨씬 잘 해내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미술은 새로운 방향을 지향했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화단의 주류를 이뤘던 모노크롬 중심의 추상회화가 새로운 돌파구였다. 하지만 화가 고영훈은 새로운 시대의 화법을 따르지 않고 ‘구태의연하고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극사실주의를 고수하며 지금까지 자신만의 스타일로 풀어내고 있다.날것을 가공해 문화를 만든다그의 첫 작품 소재는 제주도 출신답게 돌이었다. 화면 한 가득 허공에 떠있는 돌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된 그의 작품 소재는 깃털, 찌그러진 냄비, 호박 넝쿨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 소재의 공통점은 모두 소박하다 못해 ‘하찮게’ 여겨지는 사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왜 깃털, 볼품없는 냄비, 못난이 꽃의 대명사 호박꽃을 그리는 것일까.“작가가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글로 표현하듯 화가는 이미지로 말을 합니다. 사회적 이슈가 되는 거창하고 대단한 소재들 못지않게 작은 것들도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가령 개인의 역사에서 궁핍한 시절 어머니가 라면을 끓여주었던 낡은 냄비에는 서글픔과 위대함 등의 뭔가가 담겨 있어요. 큰 역사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하찮은 소재지만 오히려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관념적인 꽃이 아니라 호박꽃을 옆에 놓고 며칠 동안 바라보고 얘기하면 그것을 알고 이해하게 됩니다. 어느 하나 발언 없는 놈, 사연 없는 놈이 없지요. 이런 소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그들의 입장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그림을 통해서 자연에 다가가다가 세상에 대한 접근으로 확장돼 갑니다.”사람들은 극사실주의 회화를 보면서 사물을 복제하는 기술적인 면에만 관심을 갖기 쉽다. 손으로 잡으면 잡힐 듯, 평면임에도 마치 입체적으로 보이는 실재감에 경이로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실물의 단순한 재현에 멈춰서 있지 않다. 만약 원재료 그 자체만 따진다면 호박의 특성은 그보다 농부가 더 잘 알고, 고등어는 어부가 더 잘 알 수밖에 없다. 그가 생각하는 화가의 역할은 이런 날것을 가공해 요리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문화라는 것.화가는 문화적인 무당이다책 모양을 그리고 그 안에 고서의 책장을 붙여 콜라주를 하고 그 위에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과정이 이어지는 그의 작업은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톡톡 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들에 비하면 그는 단순 업무를 반복하는 기능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고영훈은 노동 자체가 정신을 만들어 내는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손만 움직여 똑같은 물건을 찍어내는 공장의 로봇 팔과 달리 그의 노동은 생각이 담긴 노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면 위에 그려진 삽 깃털 시계 운동화 도자기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것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는 “작가는 신도 아니지만 일반인도 아니다. 작가는 일반인에게 신을 영접할 수 있도록 하는 무당이다”라고 말한다. 무당이란 신과 사람의 중간에서 전달자 역할을 해준다. 무당이 굿을 해서 액운을 사하고 행복을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듯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심리적으로 위안을 준다.그는 여섯 살 때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 50년간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잠시 미술 교사로 5년 정도 근무한 것이 직장 생활의 전부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화가의 삶을 포기하지 못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이었고, 결국 그만두었다. 이처럼 다른 어느 것에도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작업에만 집중해 온 그가 지난해부터 모교인 홍익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눠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학생들이 가장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그림만 그려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화가란 자기 자체의 모든 컨셉트가 화가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그림을 잘 그려서, 집이 부자라서 화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가가 되려면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죠. 조정 경기에서 선수가 노를 젓지 않으면 배가 앞으로 가지 않듯이 힘의 안배를 잘 하면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당할 자는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흔히 30세를 전후해서 가장 많이 갈등을 하게 됩니다.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할 나이인데, 그림만 그려서는 살기 어렵기 때문이죠. 이럴 때 평가 기준을 사회에 두지 않고 자기에게 두면 굉장히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일하면서 남는 시간 활용해 그림을 그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최근 그는 종로구 부암동에 새로 작업실을 만들어 옮겼다. 전시관을 갖고 싶다는 어릴 적 꿈에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그가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짝씩 전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작가로서의 도덕률을 확고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자기가 보고 그려야 할 호박이 사라지면 예술적 고민에 빠져버리고 마는, 고지식할 정도의 작가적 진정성이 고영훈을 고영훈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