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owe Music all I have”
되게 표현하면 김지연은 우선 ‘얼굴이 되는’ 연주가다. 특히 국내에서는 유명 샴푸의 TV 광고에 모델로 출연한 덕분에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바이올린을 켜는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꽤 많다. 혹자는 그녀에게 따라붙는 ‘미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연주가로서는 마이너스가 된다고 염려하기도 한다.그녀와의 인터뷰 일정은 이른 아침에 잡혔다. 바로 전날 입국해 피로가 쌓였을 법하지만 워낙 타이트한 일정 때문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완벽한 메이크업과 우아한 드레스로 단장하고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서는 세계적 연주자로서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느껴졌다.“주로 뉴욕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한국에 자주 오지는 못해요. 1년에 두 번 정도 오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에도 공연을 앞두고 며칠 밖에 시간이 나지 않아 어제야 입국했어요. 아직 시차 적응이 안됐지만 워낙 전 세계를 다니며 연주를 하다 보니 이 생활에 익숙해졌어요. 피로를 쉽게 푸는 방법도 혼자서 터득했지요. 연주가는 팔이나 어깨 다리 등에 통증을 달고 살기 쉬운데 요가를 하고부터 없어지더군요. 그 후 요가 마니아가 됐죠.”한국과 미국 유럽 일본 등을 오가며 바쁜 연주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독주회와 대관령국제음악제 참석차 1년에 두세 번 정도 한국을 찾는다. 특히 그녀의 스승인 강효 교수와의 인연으로 참가하기 시작한 대관령국제음악제는 바쁜 일정 중에도 해마다 빠지지 않는다.몇 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자주 그녀의 연주 모습을 국내에서 볼 수 있었다.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컨트리 가수 존 덴버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년에는 국내에서 그녀의 음악활동이 뜸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 클래식 애호가의 보수적인 취향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그녀의 적극적이고 화사한 무대 매너가 그 이유였을 수도 있다.하지만 김지연은 지금 한국 음악계에 매우 필요하고 소중한 연주자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영국의 권위 있는 클래식 잡지 ‘클래식 CD’는 그녀를 장영주, 미도리와 함께 21세기를 이끌어갈 바이올리니스트로 꼽기도 했다.여섯 살 꼬마, 바이올린을 잡다1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난 김지연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코리아타임스 주최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여섯 살 때 바이올린을 처음 손에 잡았어요. 처음에는 어머니도 바이올린이 저에게 맞는 악기인지 반신반의하셨대요. 그래서 레슨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당시 가장 큰 콩쿠르였던 코리아타임스 경연대회에 저를 내보냈죠. 입상하지 못하면 포기시키려고 생각하셨다더군요. 그런데 제가 예상 밖으로 대상인 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된 거죠. 그 후로는 저도 자신감이 붙어 더욱 바이올린에 열심히 매달리게 됐어요.”그녀는 선화예중 1학년 때인 열세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김남윤 교수에게 레슨을 받고 줄리아드에서 도로시 딜레이, 강효, 펠릭스 갈리머 등을 사사한 김지연은 차세대 바이올린 주자로 떠오르면서 많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1984년 뉴욕 필 오디션에서 우승한 후, 뉴욕 필하모니 연주회에 초청돼 주빈 메타 지휘로 뷔탕의 콘체르토 5번을 연주했다. 1985년에는 솔리스트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카네기홀과 케네디 센터에서 슈나이더의 지휘로 뉴욕 현악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어 1989년 영 아티스트 콘서트 1위 입상, 1990년 미국 최고의 영예를 자랑하는 에이브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상 수상, 1994년 프랑스 미뎀 국제음반박람회 ‘올해 최고의 데뷔 음반상’ 수상 등 그는 지금까지 슬럼프 한 번 없이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하고 있다.그녀는 “노력도 많이 했지만 행운도 많이 따랐다”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행운이란 1989년 영 아티스트 콘서트에서 1위를 차지한 후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선 아들러 카젠더 여사를 만난 ‘사건’이다. 뉴욕타임스 가문의 일원이면서 세계 음악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카젠더 여사는 피아노를 좋아하고 바이올린 소리는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나 영 아티스트 콘서트에서 김지연의 연주를 듣고 바이올린에 반해 버린 것이다. 이후 카젠더 여사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김지연을 후원하고 있다.뜻하지 않은 행운과 함께한 시간김지연의 두 번째 행운은 서인도제도에 있는 카젠더 여사의 버진군도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1992년 찾아왔다. 이웃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영국 선데이타임스 주필 앤드루 닐이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게 된 것이다. 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 줄 알았던 앤드루 닐은 나중에 김지연의 연주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영국 데뷔 공연을 주선했고, 김지연을 선데이타임스 표지에까지 등장시켰다. 그녀의 영국 데뷔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뉴욕 필·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를 갖게 됐다.탄탄대로를 걷게 된 그녀는 본격적으로 국내외에서 크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3년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난파상을 수상했다. 미국에서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초대로 백악관에서 열린 ‘국립 예술훈장 수여식’에서 기념 연주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단계를 거치며 김지연은 세계적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탄탄하게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제 2의 김지연을 위해김지연은 연주 활동과 함께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신시내티 음대 부교수, 인디애나 음대 초빙 교수를 역임했으며 2005년 봄에는 미네소타에서 열리는 슈베르트 클럽 콩쿠르에 심사위원을 맡았다.“이번 가을 시즌부터는 뉴욕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어요. 또한 리사이틀 중간에 틈틈이 마스터 클래스도 열고 있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제 음악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학생들과 함께 하면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느끼고 흡수할 수 있죠. 하나하나 가르치다 보면 신비로움까지 느낄 정도예요. 학생들의 순수와 열정, 호기심 등을 보면서 저도 학생다운 태도를 항상 간직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항상 그들에게 강조해요. 음악을 함에 있어 처음에는 재능이 중요하지만, 나중엔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정직하고 깊이 있는 열정을 간직하는 게 필요하다고요.”그녀는 1993년 데뷔 앨범 발매 이후 레코딩 아티스트로서도 인정받고 있다. 첫 앨범은 일본 메이저 음반사인 덴온에서 냈는데 당시 이례적으로 음반 녹음과 동시에 재계약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거장들의 앙코르 작품으로 데뷔한 첫 앨범에 이어 두 번째로는 드뷔시, 생상,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 들을 담은 앨범을 냈다. 세 번째 앨범은 멘델스존의 마단조 바이올린 콘체르토와 뷔탕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5번을 담아 발매했다.“바이올린의 매력은 무엇보다 사람이 흐느끼듯 노래하는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데 있어요. 색깔이 풍부하고 화려한 점이 저와 잘 맞죠. 악기의 특성을 잘 활용해 미묘하고 귀를 자극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한 음 한 음에 목적을 담아 깊이 연구하는 음악인이 될 거예요. 동시에 클래식의 발전을 위한 메신저 노릇도 하고 싶습니다. 곧 중국으로도 진출할 계획이에요. 잘되겠죠. 무대에서든, 삶에서든 항상 긍정적이려고 노력해요.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위해 살고 싶어요. 음악을 통해 얻고, 받고, 느낀 것을 제 일생을 통해 갚고 싶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