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월드컵 축구공 ‘팀가이스트’만든 이해성 덕성 대표
세계 축구팬들을 설레게 했던 2006 독일월드컵의 최고 악동은 누굴까. 웨인 루니도 아니고 훌리건도 아니다. 많은 축구 전문가들이 꼽는 이번 대회의 최대 악동은 공인구인 ‘팀가이스트(Team Geist)’다. 경기당 득점 면에선 역대 최저 수준이었지만 이는 전방위 압박으로 대표되는 현대 축구의 트렌드 때문이지 공격수들의 능력이 예전만 못해서가 아니다. 그나마 팀가이스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경기당 2골씩 기록했지 만약 이마저 없었다면 공방전만 계속되는 ‘지루한 월드컵’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컸다.역사상 가장 과학적 축구공이라는 팀가이스트는 공격수들에겐 최고의 보배지만 골키퍼들에겐 저주의 대상이다. 원정 첫 승의 기쁨을 안겨준 대한민국 대 토고전을 살펴보자. 전반까지 1 대 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이천수가 찬 프리킥은 20m를 날아가 왼쪽 모서리로 빨려 들어갔다. 경기 직후 이천수는 인터뷰에서 “생각했던 방향으로 공을 찼다”면서 팀가이스트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했다. 이번 대회의 성공작 중 하나인 팀가이스트에 대해 영국의 스포츠 과학자 켄 브레이는 “축구공이 마치 야구공처럼 꿈틀댄다”고 극찬했고 골키퍼 이운재도 “팀가이스트는 정말 잡기 어려운 공이다. 잡으려고 하면 튀어나가 저 멀리 가버린다”라고 말했다. ‘팀 정신’이란 뜻을 가진 팀가이스트가 한국의 앞선 피혁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팀가이스트를 만든 주인공은 수원의 피혁 제조업체인 덕성.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는 덕성은 국내에는 잘 알려진 기업이 아니다. 하지만 덕성은 ‘피혁 업계의 삼성전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세계 최고의 피혁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덕성은 국내 피혁 산업의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지난 67년 국내 최초로 ‘레더’로 불리는 인조피혁을 생산했고 70년대 들어서는 가발, 80년대에는 신발에 쓰이는 피혁을 제작해 해외에 내다팔았다. 그러다보니 업계에서는 덕성을 가리켜 ‘블루오션을 찾아다니는 다윗’이라고 치켜세운다. 덕성은 현재 광저우를 비롯한 중국 5곳과 베트남, 인도네시아에 현지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수원 인천 오산 평택 등지에 공장을 가동 중이다.수원시 삼성SDI 공장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덕성 본사에서 만난 이 회사 이해성 대표는 덕성의 성공 비결을 ‘기술력’으로 요약했다. “첫째도 기술이요, 둘째도 기술이라는 생각에 임직원 모두가 기술력 확보에 매달렸습니다. 중소기업이 살아남는 방법은 결국 기술밖에 없기 때문이죠. 동시에 덕성은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했습니다. 가발, 신발 등은 당시만 해도 신산업으로 분류됐으니까요.”이 대표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말단 사원으로 덕성과 인연을 맺었으나 17년째 대표이사로 재직하면서 ‘작지만 강한’ 기업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그 자신이 오너가에 이어 3대주주다. 오너 같은 전문경영인인 그는 효율성에 경영의 포커스를 맞췄다. ‘방만한 운영’은 덕성에선 통하지 않는다. 만 원짜리 한 장 헛되게 쓰는 법이 없다. 몇 년 전 해외 발주처에서 바이어가 방한해 2주간 워크숍을 열었을 때도 그 흔한 호프집 한번 가본 적이 없었고 점심은 언제나 1만 원짜리 정도로 해결해야 했다. 처음엔 소홀한 대접 탓에 발주처 관계자들이 인상을 붉혔지만 깔끔한 일처리와 높은 기술력을 보고 크게 만족하고 돌아갔다는 후문이다. ‘자린고비’같은 이 대표도 ‘연구’와 ‘해외 연수’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지원한다. 지난 87년에 이미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직원들의 해외 연수도 적극 지원해 주고 있다. 그도 북한과 러시아 등 10여 개 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를 다녀봤다. “해외를 다니다 보면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많이 생각납니다. 지금까지 덕성은 해외 현지 시찰을 통해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습니다. 덕성이 스포츠 용품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대표의 일본 연수에서 비롯됐다. “일본의 한 피혁 업체를 방문해 보니 고급 축구공 외피를 제작하고 있더군요. 처음에는 ‘별 것 아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지켜보니 엄청난 기술을 요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귀국해 축구공 외피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덕성 신화로 이어졌습니다.”덕성이 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의 공인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부터다. 한·일월드컵 1년을 앞두고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 스폰서인 아디다스는 일본 대만 태국 업체들을 대상으로 입찰을 받고 있었다. 당초 2002년 월드컵 공인구는 오스트리아 업체가 제작해 납품할 계획이었지만 반발력 등 기술력이 기준치에 미치지 못하자 재발주에 들어갔다. 해외 지사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덕성은 즉시 독일 현지에 기술 인력을 파견해 아디다스사에 입찰에 참여하고 싶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 대표가 강조한 기술 제일주의는 이때 빛을 발했다. 원래 월드컵 공인구 계약은 행사가 열리기 3년 전 체결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중도에 계약이 파기되면서 아디다스사로서는 조기에 계약을 마무리하고 빨리 용품을 생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력 있는 하청업체를 빨리 찾아 제때 생산에 돌입하는 것이다. 최종 입찰 결과 덕성은 단 한번의 심사로 일본 태국 대만 업체들을 따돌리고 독점 계약권을 체결했다. 아디다스사와의 인연은 이후 계속돼 덕성은 2002년 한·일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 외에도 유로2004 공인구 ‘로테이로’, 그리스올림픽 공인구 ‘펠리아스’의 외피를 독점 공급했으며 팀가이스트도 독일 업체와 경쟁 끝에 독점 계약을 얻어냈다.신화는 계속된다. 덕성은 2008년 스위스,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되는 유럽챔피언리그 공인구의 외피도 독점 공급하기로 돼 있으며 내년에 결정되는 2010년 남아프리카 월드컵 공인구 외피 제작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축구공 외피를 만드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팀가이스트는 반발력을 높이기 위해 수백만 개의 미세한 공기방울을 가죽 표면에 입혔고 마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표면을 이중으로 코팅했다. 또 완벽하게 방수될 수 있게 표면층을 일정하게 가공했으며 공을 구성하는 가죽 조각을 기존 32개에서 14개로 대폭 줄여 꼭짓점이나 모서리가 없는 가장 완벽한 동그라미 공을 구현해 냈다. 이와 함께 조각과 조각을 바늘로 꿰매지 않고 접착제로 붙여 회전력을 높였다. 실로 조각을 연결하면 틈새로 물이 스며들어 날씨에 따라 공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지만 팀가이스트는 접착제로 붙인 데다 100% 방수 처리됐기 때문에 공의 무게가 일정하다. 팀가이스트는 마찰력이 적어 공격수는 원하는 곳으로 정확하게 찰 수 있고 골키퍼는 회전력이 커 잡기가 어렵다. 공이 날아가면서 휘는 정도인 ‘마그누스’ 효과도 일반 공에 비해 5배 이상 높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웬만한 기술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아디다스의 입찰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137cm씩 잘라낸 가죽의 두께는 3.0mm여야 합니다. ±0.5mm의 오차만 허용하는데 우리는 모든 제품을 3.0mm로 맞췄습니다. 아디다스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죠.”덕성 직원들은 연구 직원과 영업 직원이 2인 1조를 이뤄 해외 현장을 자주 돌아다닌다. 이 대표의 숨은 뜻이 있다. “어찌 보면 영업하고 연구직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어야만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분야를 알게 되면서 얻게 되는 경험도 서로에게 유익하죠.”덕성이 피버노바 계약을 따낸 데는 이 대표의 선견지명이 큰 역할을 했다. 이 대표는 피혁 산업에도 기술력을 요구하는 시대가 올 것을 예상했고 고급 특수 피혁만이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그는 2000년 생산 설비를 일부 교체했다. 당시 주변에서는 ‘애써 잘 돌아가고 있는 설비를 왜 바꾸느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그는 채산성이 떨어지고 있는 중·저가 피혁 생산으로는 더 이상 승부를 낼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결과적으로 생산 설비를 제때 교체한 것이 공인구 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87년 상장한 덕성의 지난해 매출액은 833억8200만 원으로 전년도 매출액(866억2100만 원) 대비 3.7%가량 떨어졌다. 올해는 1분기에만 222억9700만 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독일월드컵 효과가 나타나면서 매출이 1000억 원으로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팀가이스트 덕분에 축구공 관련 피혁 생산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덕성이 판매한 피혁 생산량은 축구공 600만 개를 제작할 분량이었으나 올해는 2000만 개의 축구공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의 가죽을 수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국내 피혁 업계는 값싼 노동력으로 무장한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기술력을 갖춘 고급 피혁으로 승부를 건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낙관할 수 없는 상태다. 덕성의 매출이 800억 원 대인데 비해 당기순이익이 20억~10억 원인 것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외형만 클 뿐 ‘큰돈이 남지 않는 장사’라는 뜻이다.“이러한 고민은 비단 덕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국 등 개발도상국가들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중소기업 모두의 고민거리죠. 그래서 우리는 신규 사업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계획입니다. 기술집약적 고급 피혁을 생산해 효율성을 높일 계획이며 동시에 초전도 마그네트 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현재 덕성은 사내 초전도사업부를 신설해 국책 사업 중 하나인 초전도 마그네트 개발 사업에 참여했으며 지난 2000년 8월부터는 3년간 산업자원부에서 주도하는 부품, 소재기술개발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덕성이 개발하고 있는 초전도 마그네트 시스템은 반도체용 실리콘 웨이퍼를 늘리는데 필수적인 장비로 세계적 반도체 기업들마다 반도체 소자의 품질 향상과 생산 원가 절감을 위해 앞 다퉈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기간산업이다. 이 밖에도 덕성은 반도체,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재료 제조를 위해 전자재료사업부를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매출액에 비해 낮았던 당기순이익도 올해부터는 조금씩 향상될 전망이다. 지난 5년간 투입된 연구개발비 때문에 순이익이 낮았지만 지난해부터 이 부문 매출이 100억 원으로 뛰었다. 가구 소파와 야구, 골프, 농구 용품 등을 생산하고 있는 피혁 사업은 차량용 합성피혁제품 생산 쪽으로 판로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미국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모터스(GM)에서 생산되는 기어 박스에 피혁을 제공하고 있는 덕성은 올해부터 자동차 대시보드와 카시트 용품도 생산할 계획이다. 중국, 동남아시아 등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저가 피혁 시장을 다시 공략하기 위해 중국 광저우에 생산 공장을 세워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덕성은 월드컵 스타 박지성 선수의 부친인 박성종 씨가 10년간 근무한 기업으로, 월드컵과 유난히 인연이 깊다. 경기도가 지난해 이름 붙인 ‘박지성길’도 덕성 본사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인지 이 대표는 지난 프랑스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뒤지고 있다가 박 선수가 감각적으로 툭 찬 공이 골키퍼의 키를 살짝 넘어 골대 안으로 들어갈 때 너무 기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제 머릿속에 ‘회전력이 높은 팀가이스트니까 저런 멋진 골이 나오는 것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공은 둥글다’라는 말은 ‘스포츠 경기엔 늘 이변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물론 공은 둥글기 때문에 어디로 갈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 축구는 이변보다는 개개인의 역량과 경험을 더 중시한다.“팀가이스트와 덕성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회사는 공인구 이름처럼 팀의 정신과 화합을 강조합니다. 팀워크를 잘 발휘하고 기량을 연마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팀가이스트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덕성이 추구하는 모습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