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도세면제 시점서 집팔아 수익 극대화

김필호 팀장의 住테크 성공노하우

융회사 팀장 김필호 씨(45·가명)를 만난 곳은 강남의 한 커피숍이었다. 프로젝트 팀장 발령을 받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무척 바쁘다고 했다. 감청색 양복에다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슴에 꽂혀 있는 회사 배지가 유난히 반짝였다.김 씨는 대학 졸업 후 한번도 직장을 옮기지 않고 같은 곳에서만 성실하게 근무해온 사람이었다. 지난 1980년대 중반 1000여 만 원짜리 전셋집으로 출발, 현재 강남의 번듯한 대형 평형 아파트 주인이 됐다. 결혼 후 지금까지 20년 동안 총 7번의 이사를 다닌 끝에 강남 입성에 성공했다. 재테크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특이한 점은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세금혜택을 적절하게 활용했다는 것이다. 3~5년간 아파트를 실소유할 경우 양도세가 면제된다는 점을 감안, 이사 시기를 이에 맞춤으로써 투자 차익을 극대화했다. 요즘처럼 다주택자에 대한 세금부담이 폭등한 상황에선 유용한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겠다.김 씨는 86년 결혼했다. 부친이 건축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부동산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을 때였다. 잠실 시영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던 김 씨는 수 개월 만에 서초동 반 지하 연립주택으로 옮겼다. 결혼자금 용도로 은행에서 빌린 대출 이자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자 부담을 덜기 위해서였다. 여유자금을 탈탈 터니 현금 1250만 원이 남았다. 김 씨는 서초동 반 지하주택에서 본격적인 종자돈 마련에 나섰다. 맞벌이였던 데다 아끼고 또 아꼈기 때문에 3년여 만에 1000만 원을 추가로 모을 수 있었다.하지만 생활은 무척 고달팠다. 집주인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빨래를 널 데가 없었는 데도 옥상 출입을 금지당한 상태였다. 내 집을 장만해야겠다는 의욕이 강하게 생겼다. 이때부터 출퇴근하거나 이동할 때 웬만해선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 눈으로 주변 입지를 확인하고 중개업소에 들러 집값을 체크했다. 특히 투자보다 거주 목적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회사까지의 출퇴근 거리 등을 감안하고 따져보는 게 습관이 됐다. 당시엔 소위 ‘빌라’로 통칭되던 연립주택이 큰 인기였다. 우연한 기회에 홍은동에 괜찮은 빌라가 분양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씨가 막 홍은동 근처로 지점 발령을 받았던 때여서 큰 관심을 가졌다. 분양가는 4500만 원.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대출을 끼고 빌라 1층을 매입했다. 당시 이 주택에는 지하층이 대피소로 꾸며져 있었다. 쓸모없는 빈 공간이었던 셈이다. 주택보급률이 턱없이 낮았던 때여서 지하에라도 거주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위층 입주민들과 협의해 지하 대피소에 난방설비를 넣고 벽지를 발랐다. 손색없는 집 한 채가 뚝딱 생겼다. 이 집을 전세 놓아 대출이자 부담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양도세를 면제받기 위해선 당시엔 5년간 보유하고 3년간 거주해야 했다. 3년 거주 후 김 씨는 도봉구 창동의 32평형 조합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당시 분양가는 7400만 원이었다. 자금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가격이 어느 정도 오른 홍은동 빌라를 전세로 돌렸다. 김 씨 부부는 대신 상수동의 방 1칸짜리 월셋집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자녀가 두 명이어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숨쉬기도 어려웠을 정도였지만 아파트에 거주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홍은동 전세금과 그동안 모은 돈으로 창동 아파트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치렀다. 잔금을 내야 하는 시기에 맞춰 홍은동 빌라를 팔았다. 양도세를 모두 면제 받았기 때문에 투자 차익이 적지 않았다. 창동 아파트에 사는 동안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면제규정이 ‘5년 보유’에서 ‘3년 보유’로 완화됐다. 김 씨는 3년 정도 거주한 후 또다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선 아무래도 학군이 나은 곳으로 이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중개업소에서 귀가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서초동에선 1000여 가구 재건축이 추진되고 있는데, 매우 유망하다는 것이다. 곧바로 서초동으로 향했다. 서초동 아파트는 너무 낡아 살기 불편할 게 뻔해 보였다. 하지만 단칸방에서 가족 네 명이 2년간 버티기도 했던 김 씨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많이 낡은 만큼 재건축 추진이 수월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김 씨가 바라던 강남 8학군인 점도 마음에 쏙 들었다.김 씨는 창동 아파트를 1억2000만 원에 매도하고 서초동의 낡은 재건축 추진단지를 1억7000만 원에 매입했다. 일부 모자라는 돈은 대출로 충당했다. 서초동 아파트에 네 식구가 직접 입주했다. 32평형에 살다 20평형짜리로 옮기다 보니 살림살이가 다 들어갈 수 없었다. 소파를 버렸고, 장롱이 맞지 않아 톱으로 귀퉁이를 썰어내기도 했다. 수돗물에서는 가끔 녹물이 쏟아졌다. 마룻바닥을 손수 뜯어고쳤다.김 씨는 재건축 공사로 인해 주변 아파트로 이주할 때까지 비좁고 낡은 이 아파트에서 4년간 거주했다. 재건축 후 대형 평형 입주 부담금은 2억 원가량이었다. 김 씨 회사에서 때마침 퇴직금을 중간정산했다. 이 퇴직금으로 재건축 자기부담금을 여유있게 댈 수 있었다. 재건축 공사로 주변 다른 단지로 이사 갈 때 가족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내 집을 마련했는 데도 왜 세입자처럼 이사 다니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던 것. 이사 다니는 생활에 이력이 난 데다 강남 대형 평형 입주에 대한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고 김 씨는 설명했다.김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일요일마다 집 주변 교회에 다녔다. 오가는 길에는 항상 부동산을 눈여겨보곤 했다. 이 과정에서 강남 사람들은 항상 ‘최고’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파트도 입지 좋은 곳의 로열층을, 과일도 최상급 품질을 찾기 때문에 ‘좋은 상품’이 비싸더라도 값이 더 뛰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바로 ‘개인플레이’였다. 강북에 살 땐 주말마다 이웃들과 어울려 나들이를 다녔는데, 강남으로 이사 오고 나선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 강남 사람들은 대신 투자정보에는 누구보다 밝다. 김 씨는 서초동 재건축 추진단지에 살면서 몇 번의 아쉬운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한번은 도곡동 주공아파트(현 도곡렉슬)로 갈아탈까 고민하다 그만 놓쳐버렸다. 당시 3000만~4000만 원을 더 보태야 했는데, 그게 부담이었다.반포 주공 3단지 재건축단지로 옮길까 심각하게 갈등했던 적도 있다. 김 씨는 아쉽지만 후회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샐러리맨으로서 지금도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자평하고 있어서다. 김 씨는 향후 더 큰 평형 주택으로 이사 갈 생각이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살면서 기회를 엿볼 참이다. 그래서 관심사를 임대수익을 낼 수 있는 상가주택으로 옮겼다.아는 사람 소개로 삼성전자 공장 이전 호재가 있는 충남 아산지역의 상가주택 1개 동을 최근 매입했다. 안정적인 임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아산신도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투자금액은 총 8억 원. 이중 절반가량이 은행 대출이지만, 매달 임대수익에서 대출이자를 갚고 나더라도 월 200만 원 이상의 순수입을 얻고 있다. 김 씨는 상가주택 가격이 13억 원 정도까지 오르면 팔아 치울 계획이다.김 씨의 부동산투자 원칙은 여느 재테크 고수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첫째는 관심이다. 부동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기회가 생기고, 기회가 다가왔을 때 ‘올인’할 수 있는 용기가 나온다. 둘째는 노력이다. 남들이 야구경기를 보러갈 때 전원주택이라도 구경하러 가는 노력이 재테크 필수원칙이란 얘기다. 셋째는 실행력이다. 김 씨가 강북에 살 때 대지 84평짜리 노후주택이 매물로 나온 적이 있다. 부친처럼 이곳에 빌라를 짓고 싶었지만, 계약금이 부담이었다. 당시 무슨 수를 쓰든 계약금을 구해 빌라 신축을 추진했다면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김 씨는 생각하고 있다. 사실 김 씨가 이만큼 성공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실행력이 남다른 덕분일 텐데 말이다. 넷째는 금융지식이다. 대출을 끼지 않고선 부동산 투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금융회사 직원인 김 씨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던 셈이다.마지막으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녹물이 나오거나 비좁은 단칸방 살림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 씨는 이를 통해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부자’ 대열에 낄 수 있었다. 젊을 때 다소 불편한 곳에 산 덕분에 노후 걱정을 덜었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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