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미쳤더니 돈이 굴러 오데요”

이재민 대표의 인생 이모작 성공 노하우

흔한 살. 임원 승진 레이스에 돌입한 대기업의 중간 관리자. 중1, 초등학교 4학년짜리 두 아이를 둔 가장.’ 업무의 양과 중압감, 심적 갈등이 극에 달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이재민 패션&라이프 대표(46)는 창업했다. 더 나이 들면 도전 한번 해보지 못하고 쇠잔할 것 같은 마지노선이자,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가정을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는 40대의 길목에서 말이다. 한술 더 떠 업종은 수입 속옷 유통업체. 과연 그는 현명했을까.“대기업 임원, 매력적이죠. 물론 힘든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한번도 안 했어요. 아무리 되짚어 봐도 결국은 창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대놓고 “돈 많이 벌었느냐”고 물었다. “월급이야 샐러리맨 시절보다 좀 낫죠. 하지만 아직도 투자 단계라 전체 사업으로 보면 돈을 벌었다고는 할 수 없어요. 속옷 사업은 다른 업종에 비해 뜸 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 깁니다. 대신 일단 뜸만 들이면 안정적이고 오랫동안 밥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게 특징입니다. 그런 점에선 순항 중입니다. 도달할 미래를 꿈꾸는 것도 벅차고, 지금의 과정도 즐겁습니다.” 지난해 매출은 20억원, 올해 목표는 40억원이다. 유통점 확장과 맞물려 있어 매출은 계단식으로 뛴단다. 2001년 11월 창업해 5년차다. 10만~20만원 대 중가 수입 속옷 편집매장 비바치타(vivacita)와 가격대가 30만원 이상인 명품 속옷 편집매장 프리즘(prism)에서 총 14개 이상의 외국 브랜드 속옷을 판다. 지난해 3곳을 추가해 매장은 9곳으로 늘었다. 위치도 압구정동, 청담동, 삼성동 코엑스, 신촌 등 하나같이 첨단 유행 1번지다. 그를 샐러리맨 안주 체질에서 벗어나 ‘오너 사장’으로 인도하기까지 4단계 ‘사장되기’ 기초체력 과정을 짚어보자. 이 대표는 그런 점에서 ‘이기는’ 일을 해 왔다.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86년 2월, 첫 직장으로 미도파백화점을 택했다. 일반 사무직보다는 역동적이며 창조적일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 막연한 선택은 축복이었다. ‘적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백화점 브랜드로 상품을 만들어 파는 ‘PB(Private Brand) 상품’이 백화점 전체 상품의 절반에 가까웠다. 그는 PB 상품을 기획하고 만들어 판매한 뒤 반응을 지켜보는 PB 기획을 담당하게 됐다. 이 일이 “미칠 만큼” 좋았다. 그는 2년간 남성복 바이어를 거쳐 여성 정장, 캐주얼 등 97년까지 11년 동안 ‘옷’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동안 옷 시장의 트렌드를 읽고 비어 있는 상품을 기획해 파는 더듬이를 전방위로 첨단화해 나갔다. 그가 경영진의 신임을 얻은 것도 ‘좋아서 미친’ 덕분이었다. 그는 운동을 몹시 싫어한다. 그런데 해외 출장만 가면 펄펄 난다. 새벽부터 시작해 백화점과 매장들을 강행군으로 훑는다. 일정이 끝났다고 쉬는 게 아니다. 패션과 백화점은 라이프 스타일이 기초 식량이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을 몰고 명소와 트렌드를 선도하는 인기 레스토랑, 카페 등을 구경하며 새벽까지 쏘다닌다. 경영진을 수행한 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힘든 강행군 출장’이었다는 경영진의 평가는 곧 그에 대한 신임으로 이어졌고, 그 후 그가 올리는 기획안에는 무게가 실렸다. 1994년, 그는 수입 브랜드 헌팅차 파리에 갔다가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백화점을 나서는데 앞에 미용실이 있더군요.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보통의 미용실 풍경을 배경으로 쇼윈도에 핑크색으로 단장한 독특한 TV, 가구 등이 진열돼 있는 겁니다. 한쪽 벽에는 옷들이 걸려 있고요. 그런데 그 모습이 조화롭게 어울려 보였습니다.” 이 대표는 ‘멀티 숍’에 즉각 매료됐다. 무조건 이것저것 모아놓은 게 아니라 하나의 컨셉트를 갖고 ‘재창조’한 매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대중적인 브랜드 옷이 대세를 이루면서 십인십색의 시대를 살고 있었죠. 그런데 일인십색의 시대가 온다는 미래를 봤던 겁니다.” 그는 한 브랜드를 정해 수입 판매하는 형태가 아니라 ‘편집매장’을 열겠다고 보고했다. 지금이야 신세계의 ‘분더샵’ 등 편집매장이 패션가의 트렌드가 됐지만 당시로선 낯설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갸우뚱하던 경영진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말은 “목표 매출을 약속하고 책임지겠다”는 이 대표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그렇게 국내 백화점 최초의 편집매장 ‘소르띠(Sortie)’가 탄생했다. 그리고 1997년 말 외환 위기로 회사가 어려워질 때까지 매장을 5개로 확대하는 기염을 토했다. 폴앤조(Paul&Joe), 이사벨 마랑(Isabel marant) 등 그때 발굴해 한국에 처음 소개했던 무명의 유럽 디자이너 브랜드는 이제 모두 명품 반열에 올라 갤러리아 등 유명 백화점에 단독 입점해 있다. 그 과정에서 브랜드, 옷을 보는 안목이 엄청나게 업그레이드 됐다. 이 대표는 “그 귀한 경험이 최대의 자산이 됐다”고 말한다. 백화점 바이어의 위력은 새삼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만큼 막강하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험난한 길만 디뎠다. ‘현장 감각’을 커리어의 최우선 순위에 뒀기 때문이다. 1995년 과장 시절, 미도파백화점에 매입부가 창설되면서 그에게 제의가 들어왔다. 매입부 과장이면 백화점에선 최고의 알짜 자리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목이 꼿꼿해지는 만큼 현장 감각은 허약해질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상품개발팀’을 만들어 맡겠다고 회사 측에 제안했다. 상품개발팀에서 그가 한 대표적인 일은 편집매장 소르띠 오픈이었다. 그는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백화점 내부 여성복 바이어들에게조차 로비를 해야 했다. 그가 소르띠 입점 상담을 위해 대구백화점에 내려갔을 때는 대구백화점의 외국 바이어를 공항에 영접하러 나가기도 했다. 모자라는 현지 일손을 자청해 도와주는 ‘설거지 영업’으로 담당자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오랜 정성 끝에 1년 후 대구백화점 입점은 성사됐다. 공들였던 신촌 그레이스백화점(현재 현대백화점) 입점이 좌절되자 그는 그 백화점 사장의 유럽 출장 일정을 알아냈다. 이 대표는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비행기를 예매했다. 물론 그는 이코노미, 사장은 1등석이었다. 그는 첫 기내식을 먹고 무작정 1등석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사장 앞에 가서 “사장님, 이런 무례를 양해해주시고”로 시작해 유럽 디자이너 편집매장을 그레이스백화점에 입점하게 하면 어떤 점이 좋은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당황하던 사장은 점차 부드러워지더니, “돌아가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그 사장은 실제로 돌아와 “그 정도로 적극적인데 한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결국 입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이 대표는 보통 샐러리맨들이 갖지 못하는 ‘적극성의 DNA’를 체질화했다. 이 대표는 “창업하면 을의 생활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런 훈련은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계기로 LG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긴 이 대표는 거기서도 승승장구했다. 주요 팀장 및 점장, 전략기획팀과 임원진 등 총 10명으로만 구성돼 회사의 모든 현안을 토의하는 직할팀 회의 멤버에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품과 현장에선 멀어졌다. 소위 ‘출세’가도였지만, 이 대표의 기준으로는 ‘현장’에서 멀어지는 아쉬운 길이었다. 그는 한 달간 고민 끝에 2001년 11월 사표를 냈다. ‘무엇을 할까’의 기준은 3가지였다. 첫째 ‘수입업’이었다. 수출은 미덕이요, 수입은 악덕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오히려 호재라고 판단했다. 소득 수준 향상에 따른 자연스러운 수입품 수요마저 인위적으로 억눌러왔지만, 누른 만큼 튀어 오르면서 수입의 황금기가 올 것이란 게 그의 전망이었다. 둘째 ‘편집매장’이었다. ‘나만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한 브랜드만으로 고객들의 입맛을 채워주기는 힘들게 됐다. 셋째 ‘속옷’이었다. 일단 속옷은 선진국형 패션이다. 돈도 있어야 하지만, 남들이 잘 안보는 부분까지 투자할 만큼 패션에 있어서의 자의식이 강해야 꽃피는 산업이다. 아직 저평가된 속옷 시장이 머지않아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더욱이 속옷 시장은 독과점 시장이었다. 비비안, 비너스 등 소수 업체가 10년 이상 권세를 누렸다. 새로운 장르 개척에만 성공한다면 그 동안 선택권을 제한당했던 고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3가지 키워드 중 편집과 수입은 이 대표의 특기였다. 하지만 속옷에 있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일본의 내로라는 백화점들이 줄줄이 사양길에 접어들 때 ‘노하우 부도’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노하우가 너무 많다 보면 ‘확실한 성공사례’ 때문에 오히려 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장애가 된다는 것이죠.” 그는 화장품 업계를 예로 들었다. “90년대 초 샤넬, 크리스찬 디올 등 수입 화장품이 들어올 때 국내 화장품 업계는 아모레, 쥬단학 등 몇 개 업체의 과점 상태였죠. 그때는 수입 화장품이 지금처럼 득세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화점 화장품 코너의 가장 좋은 자리를 외제 화장품에 내주는데 3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큰 변화는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지만,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기업들은 눈치 채지 못하죠.” 그래서 그는 잘 모르지만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속옷을 아이템으로 잡아 자신의 노하우가 딱 20% 부족한 ‘수입 속옷 편집매장’을 차린 것이다. 부족한 20%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지만, 동시에 그 부족함이 창조적인 돌파구의 원동력인 셈이다. 그것을 힘으로 그는 ‘국내 속옷시장 점유율 10%, 수입 란제리 1위, 비바치타와 프리즘의 해외 진출’이라는 3대 목표를 향해 5단계 체력 다지기를 지금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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