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삼무역으로 떼돈 번 조선의 巨商

임상옥

선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부유한 상인이나 큰 장사치는 앉아서 재화를 움직여 남쪽으로는 일본과 통하며 북쪽으로는 연경(燕京)과 통한다.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끌어들여 더러는 수 백만금의 재물을 모은 자들도 있다. 이런 자는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이며, 또 다음은 평양과 안주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국내 상업과 해외무역을 연결하는 거상(巨商)의 존재가 서울 평양 의주 개성 동래에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한국 상업사의 전통을 간직한 5대 상단(商團)으로 불러도 좋으리라.혹자는 조선 최대의 갑부는 역관이라고 한다. 역관은 오랫동안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통역관으로서, 공무역과 사무역을 통솔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상인들은 무역의 기회를 얻기 위해 역관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상인은 역관과 밀착된 조선 최대의 상단이었다. 하지만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고 이를 해외로 연결해 국내 경제의 혈관을 통하게 했던 거상의 존재는 개성 의주 동래 등지에서 찾아진다. 개성상인과 의주상인은 중국으로 연결되는 도로상에 자리하면서, 무역의 이익을 나눈 절묘한 파트너였다. 임상옥(林尙沃,1779~1855)은 역사의 뒷면에 숨겨져 있던 조선 상인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던 대표적 인물이다. 아쉽게도 그의 활약상을 정사(正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그의 무역 활동과 그 흐름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해외무역은 임진왜란으로 붕괴된 조선 사회를 빠르게 회복시키고,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와 문화 부흥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은 정약용의 설계 지침서와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지휘로 정조 20년(1796)에 완공됐다. 국력을 쏟은 거대한 공사였음에도 정부의 재정 압박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 고종 때 대원군은 경복궁 복원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당오전을 발행하고 원납전을 징수하며, 심지어는 도성 출입세까지 거두어야 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답은 정조의 개방적 무역정책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조는 무역을 활성화하고 무역세를 거두는 정책을 펼쳤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첫 해에(1777) 곧바로 당시 최대의 이익을 남기던 중국산 양털 모자의 수입권과 판매권을 개성상인과 의주상인에게 넘겨주었다. 그 대신 수입되는 모자에 대해 세금을 거두도록 했는데, 이것이 세모법(稅帽法)이다. 고위 관료와 부유층이 쓰던 양털 모자는 한 시대를 풍미한 겨울 패션으로, 영조 때에는 역관이 독점 무역하던 물품이었다. 무역을 재원(財源)으로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정조 21년(1797)에는 홍삼 무역을 허용하는 대신 삼세(蔘稅)를 거두는 포삼제(包蔘制)를 실시했다. 경쟁력을 갖춘 전근대 우리나라의 수출품은 자연산 인삼이었다. 그러나 자연산 인삼이 절종되자 재배 인삼이 생산됐다. 이것을 쪄서 만든 홍삼(紅蔘)은 조선시대판 ‘반도체칩’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수출 효자 상품이었다. 땅에서 생산돼 온갖 이익을 창출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홍삼 무역의 성패는 중국 무역의 성패와 직결됐다. 조선 후기 상업 문화를 전해 주는 이학규(李學逵)의 시구에서도 이러한 사정이 잘 나타난다.홍삼 무역에서 얻는 조선 중앙 정부의 수입은 어림잡아 20만 냥. 경기 충청 전라도에서 중앙으로 들어오는 전세(田稅) 수입보다도 많았다. 당연히 홍삼 무역은 장사치들에겐 꿈의 사업이었다. 홍삼을 중국으로 가져가 팔면 3배에서 7배의 이익을 봤고, 그 돈으로 중국 물건을 다시 수입해 팔면 적어도 2배에서 3배는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삼 가격이 1근에 은화 100냥씩 하는 고가품이었으므로, 홍삼 무역은 거상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 속에 임상옥이 있었다. 그는 의주상인으로서 홍삼 무역의 권리를 획득한 19명의 포삼별장(包蔘別將) 중 가장 세력 있는 상단의 우두머리였다. 포삼별장은 인삼의 생산지 개성의 삼포(蔘圃)를 지정해 홍삼을 제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개성상인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면서, 중앙 권력의 비호를 받는 역관과 서울상인과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임상옥의 상인 기질이 발휘된 곳은 중국에서였다. 임상옥은 의주의 웬만한 상인처럼 만주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알았다. 임상옥의 문집인 ‘가포집(稼圃集)’에 따르면 18세부터 연경에 드나들었다 하니, 중국 상인들의 상술에도 익숙했을 터였다. 홍삼은 순조, 헌종, 철종 때 중국에서 인기 절정의 상품으로 떠올랐다. 따라서 조선 홍삼을 싸게 구입하려는 중국 상인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 정부의 공식 기록인 ‘승정원일기’는 조선 상인과 중국 상인과의 치열한 협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요즈음 중국 상인들은 이전에 무역했던 홍삼을 내놓고 보여주면서 ‘이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상인들은 결국 돌아가야 할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끝에 가서야 어쩔 수 없이 교역하게 됩니다. 이에 마침내 무역하기는 하나 온갖 이유로 싼 가격에 하게 됩니다. 교묘하게 속이는 청나라의 인심이 이와 같습니다.” 임상옥이 가격을 담합한 청나라 상인들과 맞서 헐값으로 홍삼을 넘길 수 없다고 버티다가, 사행이 떠나는 날 홍삼을 숙소 마당에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오히려 비싼 가격에 팔아넘겨 청나라 상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그의 집에는 서사(書師)만 70명이 있었고,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행 700명이 들이닥쳤지만, 일시에 개인 밥상을 차려서 대접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상인의 세계에서, 격동하는 근대화의 물결을 넘어 현대까지 그 맥을 잇는 상인의 기록은 더 이상 찾아지지 않는다. 한국의 5대 상단은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변모했을까. 자본의 향방은, 그리고 자본의 성격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들의 인적 계보는 계승되고 있는가. 상업의 역사는 권력의 역사보다 기복과 부침이 훨씬 많다. 그러나 조선 상인이 이루어낸 상업 문화와 정신 세계는 오늘날의 한국 기업 활동의 내면에서 연결되고 있을 것이다. 잊고 있었으나 중요한 것이라면 되찾아야 할 것이요, 지금껏 이어지되 고쳐야 할 것이라면 당연히 바꿔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 기업과 상인의 역사적 모습은 곧 가까운 미래에 반추될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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