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巖寺, 서럽도록 아름다운 절집풍경

선암사

비가 내린다. 2월, 꽃샘추위가 남았지만 마음은 벌써 봄이다. 계절이 어찌나 빠른지 한 일 없이 2월도 휙 지나간다. 종로거리에서 비 맞고 서 있는 가로수 모습이 박수근의 그림 같다. 새벽 잠결에 문득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춘효(春曉)가 스친다. ‘봄 새벽 날 새는 줄 모르다가/여기저기 새 우는 소리 들리네/지난밤 비바람 소리 들렸는데/꽃잎은 얼마나 떨어졌는지(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일찍 깬 새벽 도심 한가운데 새벽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봄으로 치닫는 깊고 긴 밤에도 전남 승주 조계산 선암사(仙巖寺) 선방은 용맹정진 수행 납자들의 선열(禪悅)로 가득하다. 끝없이 달려드는 수마(睡魔)와 싸우고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화두(話頭)를 붙잡으며 흐트러진 마음을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달랜다. 수행정진(修行精進)은 본시 고행, 인생사가 모두 수행이 아니던가.선암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천년고찰의 역사를 인간과 자연의 조화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오늘도 조용히 그 자리에 있다. 가난하지만 서럽도록 아름다웠던 절집 풍경들이 사라진 이즘에도 선암사는 여전히 아름답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 도선이 재건했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진다. 지금도 대웅전 앞 신라 말기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말없이 창건 설화를 뒷받침한다. 고려에 들어서서 선암사는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의천(大覺義天,1055~1101)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11세에 영통사의 경덕국사에게 출가해 화엄교학을 수학하고 송나라로 건너가 송의 제학(諸學)을 섭렵한다. 귀국 후 선암사 서부암에서 오도(悟道)하신 후 중국의 천태종을 교종으로 천태종을 개조(開祖)했다. 당시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와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참고로 가사(袈裟)는 원래 바리때와 함께 불법을 전수하는 상징물로 대각국사 금란가사는 한국 선불교에서 주홍색이 가사의 원천색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그후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버리다시피 한 이후 부분적으로 조금씩 중수되다가 숙종 24년(1698) 호암약휴(護岩若休, 1664~1738)에 의해 크게 중건됐다. 당시 선암사는 ‘교학(敎學)의 연원’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했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에 나섰다. 영조 35년(1759)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 불사를 단행했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조계산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고 해석해 화재 예방을 위해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하고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스님이 주도해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했다. 그후 옛 모습을 되찾아 산과 절 이름을 다시 조계산과 선암사로 되돌렸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전각 곳곳에 물수(水)자와 바다 해(海)자를 각(刻)해 놓아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선암사 일주문을 나가면서 바라보면 ‘청량산 해천사’라고 전각한 현판이 걸려 있어 그 당시의 절박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선암사 대웅전은 단아하면서도 정중함이 절로 우러나오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찰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순조 25년(1825)에 중창됐다는 기록이 있다. 기단은 막돌을 자연스럽게 쌓아 올렸으며,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창호는 모두 꽃살 무늬로 장식했으나 마모가 심하고 빛바랜 단청으로 고색이 창연하다. 내부는 층 단을 이룬 우물 천장으로 장엄하게 단장됐으며 단청도 선명하다. 고색의 기품을 느끼게 한다. 선암사에는 1753년 제작돼 국내 최고로 꼽히는 괘불(6.82×12.15m)을 비롯해 영조 41년(1765) 제작된 대웅전 영산회상도 등 선암사 전각 곳곳에 아름다운 불화가 많다. 모두 금암천여(錦岩天如, 1794~1878) 같은 선암사 스님들의 그림 솜씨다. 선암사 가는 길은 푸근하다.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우거진 숲 사이로 맑은 계류가 흐르고 새들의 화음이 봄을 재촉한다. 길섶 부도 탑 자리를 지나면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스님들의 발자취를 느껴본다. 힘겹게 살아온 삶의 긴 자취가 한줄기 바람으로 흩어진다. 엄숙한 마음으로 산길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림처럼 펼쳐진 두 개의 홍교(虹橋)를 만나면서 눈이 환해진다.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다. 보물 제400호로 지정된 승선교는 금강산 장안사 입구 비홍교(飛虹橋)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아름다운 무지개 돌다리다. 승선교는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축조하고 순조 25년(1825) 해붕스님에 의해 중수됐다. 계곡을 끼고 그대로 걸어 올라가면 강선루라는 작은 계류를 건너 선암사 경내로 진입할 수 있는데, 굳이 두 개의 홍교를 두어 계곡을 건너고 또 다시 건너게 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극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현세와 선계를 구분하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이 아름다운 다리 하나로 구분해 놓았으니 옛 선인들의 조형 의식과 심미안에 놀랄 뿐이다.강선루를 지나 길 모롱이를 돌면 오른쪽 길섶으로 비껴나 있는 연못을 만난다. 이 연못이 삼인당(三印塘)이다. 삼인당은 불교의 삼인을 상징적으로 구현해 놓은 것으로 기다란 타원형의 못 가운데 알 모양의 섬이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精印)을 뜻하는 말이다.연못은 최근에 단장됐지만 연못 터는 오래 전부터 축조된 듯 수십 척의 삼나무와 아름드리 활엽수들이 도열해 있다.선암사의 밀도 있는 가람 배치는 독특한 사찰건축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지리산 화엄사 일주문과 더불어 작지만 단아한 한국미의 전형을 보여 주는 선암사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 아래 대웅전 영역에 진입하면 육조고사(六朝古寺)라 써진 강당을 마주한다.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주축 이외에 여러 개의 축을 두어 각 영역 군을 형성했다. 중심 영역인 대웅전 뒤쪽으로 원통전과 응진전 각황전 영역이 있으며, 요사채와 부속 건물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지붕과 지붕이 줄지어 연결돼 있어 장관을 이룬다. 선암사의 또 다른 아름다움은 꽃나무다. 사시사철 철따라 피고 지는 매화 동백 철쭉 산수유 영산홍 수국 물푸레나무 등 수많은 화목들을 바라보면 과연 이곳이 사찰인지 수목원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선암사 매화’라 불리는 고목 매화 등걸이다. 3월 하순 칠전선원과 무우전 사이 길 손지(孫枝) 끝에 매화꽃이 한두 송이 필 때면 벌들의 잉잉거림으로 조용한 산중이 야단법석이다.매화의 덕목으로는 둥치가 어린 나무보다 고목이 더 귀하고, 꽃망울이 많은 것보다 드문드문 매달린 게 좋고, 활짝 핀 것보다 필 듯 말 듯 하는 게 좋으며. 꽃잎은 겹꽃보다는 홑꽃이 더 상품으로 치고, 홍매보다 청매를 더 높은 격으로 놓으니 선인의 호사 취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 황동규는 ‘풍장’에서 선암사 매화에 마음을 빼앗겨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피부로 마시고…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매화의 내장으로 피어…”라고 읊었다.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 황홀한 경험을 한다. 겨울이 아직 떠나지 않아 매화꽃을 보지는 못했지만 선암사 경내의 매화 천지를 그려보며 마음을 달랜다. 매화의 본성이 고운 꽃이라기보다 맑은 꽃이요, 달기보다 매운 꽃이니 날이 추워야 제 맛이다. 춘설이 분분히 날리는 가눈데 피어난 설중매(雪中梅)가 그것이요, 평생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鶴)을 자식으로 삼으며 고고한 학문의 길을 걸었던 송나라 화정(和靖)선생의 탐매정취(探梅情趣) 또한 이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리라.선암사는 차로도 유명하다. 매화 향기에 취해 우주 끝까지 마음 날아가는 황홀함은 느껴보지 못했지만, 오랜 인연으로 뵙고 지낸 선암사 지허스님을 만나 차담(茶談)을 나눈 것은 오랜만의 즐거움이었다. 차의 깊고 맑은 맛이 정신을 새롭게 한다. 5월 봄 햇살이 넉넉할 때 선암사 후원 야생차 밭에서 나온 신선한 찻잎으로 덖은 선암사 차는 한국 차 문화의 원천이다. 구증구포로 덖고 비비고 건조해 만든 선암사 차를 스님이 직접 칠전선원 후원 감로수 수각에서 길어온 물로 달인 차 맛은 일품이다. ‘다반향초(茶半香初)’ 추사의 글씨 편액이 걸린 햇살이 잘 드는 작은 방에서 앞산 산 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 맛은 참 좋다. 추사가 언급했던 당대 최고의 차인 몽정로아(蒙頂露芽)의 그 맛과 비견해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 본다. 입 안 가득 향기가 넘치고 정신이 맑아진다. 잠시나마 세속의 찌든 심신에 정신이 번쩍 든다. 스님과 나눈 차담에 또 시간이 가고 아쉬운 작별을 하니 2월 짧은 하루 해가 또 그렇게 지나간다. 당나라 이섭(李涉)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종일토록 술에 취한 듯 정신없이 잠만 자다가홀연히 봄이 다 갔단 말 듣고 억지로 산에 올랐네대숲을 지나다가 스님 만나 얘기 나누니뜬구름 인생 반나절이 또 지나가네終日昏昏醉夢間忽聞春盡强登山竹院因過逢僧話那得浮生半日閑요즘의 내 모습이 꼭 이러하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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