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영영 이별 영 이별 ’공연
극배우 윤석화(49)는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다. 요즘은 극장 경영자(설치극장 정미소), 잡지 출판 편집인(월간 객석), 제작 연출가 등으로 활동영역이 넓어졌지만 배우로서 그녀의 인기는 여전히 연극계의 톱이다. 워낙 오지랖이 넓은 성품이요, 재주가 많은 팔방미인이다 보니 약간의 안티 세력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시샘에 근거한 오해의 성격이 짙다. 최근엔 아들을 입양한 부모로서의 역할이 추가돼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며 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올해 그녀는 변함없는 인기를 실증하는 연극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연극 ‘위트’였다. 경쾌한 제목과 달리 난소암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는 여교수의 이야기를 다룬 슬프면서 묵직한 작품이었다. 서울 강남·북의 극장을 오가며 공연, 많은 여성 팬들을 울렸다. 죽음을 다룬 이야기라 해서 다 감동적거나 눈물을 동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야기도 이야기거니와 이를 전달하는 배우의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관객도 감정이입한다. 그런 면에서 윤석화는 가히 천부적이다. 특히 슬픈 이야기에 몰입하는 그녀의 내공은 대단하다. 그녀의 연기에는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눈물 한 방울 보태지 않고서는 극장 문을 나서지 못하게 하는 신기가 있다. ‘위트’는 혼신의 열정이 묻어있는 ‘윤석화표 연극’의 진면목이었다.윤석화의 이런 태도는, 배우이기 이전에 그녀가 참으로 여린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지랖이 넓어 이런 저런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대의와 명분만 주어진다면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달려드는 여린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마음만 통하면 ‘계산’이 필요 없이 정을 주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이야기다.무계산의 관계에서 윤석화는 손해를 보는 듯하지만, 결국 그것이 부메랑이 돼 덕이 쌓인다. 그것을 감안한 고도의 계산이라면 깍쟁이일 터이지만 그것 또한 아니다. 이 때문에 때로는 ‘통 큰 윤석화’의 이미지가 실속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그것이 없으면 윤석화는 없다. “팬들의 사랑으로 보상받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게 욕심이면 욕심이다. 어느 해보다 바쁘게 보낸 2005년 말 윤석화는 조선시대 한 여인의 일생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위트’가 그랬듯이 이 연극 또한 한 여인의 삶을 다룬다. 주인공의 신분과 처지, 사회상에서 두 작품은 엄청난 편차가 있지만 공통분모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신작은 1인극이어서 윤석화의 카리스마가 기대된다.윤석화는 이미 우리 역사 속 여인을 연기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초연 타이틀 롤을 맡았었다. 이후 재공연이 이어지면서 윤석화는 그 역할을 후배들에게 내주었지만, 초창기 흥행을 통해 ‘명성황후’를 성공작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이 윤석화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연극으로는 ‘덕혜옹주’가 있는데, 이 또한 예술의전당 대극장 연극 중 최고 히트작으로 남아 있다. 세 타석 연속 홈런을 기대하며 그녀가 준비하는 역사 속 여성 이야기는 ‘영영이별 영이별’이다. 산울림 소극장 개관 20주년 기념 무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원로 연출가 임영웅씨가 연출한다. 김별아씨의 소설 원작을 연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영영이별 영이별’의 모티프는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50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영도교(永渡橋)다. 1457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운의 임금으로 불리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귀양 갈 때 정순왕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곳이다. 연극은 바로 이 정순왕후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담은 작품이다.한 나라의 국모에서 서인, 걸인, 날품팔이꾼,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면서도 정순왕후는 왜 자결하지 않고 욕된 목숨을 모질게 이어간 걸까. “내게 죽음을 요구하는 세상의 눈초리가 따가워질수록 나는 더욱 이 불가해한 삶을 끝까지 견디고 싶었습니다. 이상스러운 빛으로 번쩍이는 나의 생애에, 마지막 목격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1인칭으로 인생을 술회하는 이 연극을 통해 그 구차한 인생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가 드러난다.“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연극은 모노드라마다. 윤석화는 예의 그 불가해한 인생을 무려 6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연기해야 하는 ‘가혹한 책무’를 떠맡았다.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산화하는 부나방처럼 무모한 짓이지만 그게 그녀의 숙명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 더욱이 정순왕후는 그녀가 김별아씨의 소설로 되살아나기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문장이 너무 아름다웠고 자신의 불행했던 일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정순왕후의 내면을 배우로서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캐나다에 머무르고 있는 김별아씨와 주고받은 e메일에서 윤석화는 출연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윤석화의 연기로 더욱 빛나게 될 그 아름다운 문장의 속살 몇 대목을 열거하면 이렇다.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당신이 계신 그곳으로 갈 일밖에 없네요. 깊고 어두운 숲을 지나고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는 머나먼 길이라지만 흔연한 마음에 한달음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다만 심사에 깃드는 걱정은 헤어진 지 꼬박 예순다섯 해, 이제는 여든두 살의 백발노인이 되어버린 나를 행여 당신이 알아보지 못할까 하는 것뿐입니다.”윤석화는 한참 선배인 손숙, 박정자와 함께 연극계 ‘빅3’로 불린다. 인기를 반영한 편의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들을 능가하는 후세대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불행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공교롭게 올해 이 세 사람은 산울림 무대의 주역으로 재회했다. 윤석화가 마지막 무대의 주인공인 셈이다. 막내로서 늦은 감이 있는 등장을 윤석화가 지적하자 임씨는 “진짜 스타는 마지막에 나온다”는 말로 응수했다. 배우는 많아도 스타는 드문 연극계에서 윤석화라는 이름 석 자는 연극배우의 대명사로 깊게 각인돼 있다. 1975년 ‘꿀맛’으로 데뷔, ‘신의 아그네스’로 명성을 얻은 그녀는 88년 ‘하나를 위한 2중주’를 시작으로 ‘목소리(89년)’, ‘프쉬케, 그대의 거울(90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91년)’, ‘딸에게 보내는 편지(92년)’, ‘가시밭의 한 송이(99년)’로 계속해서 산울림 무대에 섰다. 특히 모노드라마 ‘목소리’와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각각 5개월, 9개월 간 장기공연을 했을 정도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 공연은 산울림 무대 6년 만의 귀향인 셈이다. 2006년 2월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