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 4400만개 ‘발포성 와인’…그곳엔 소우주가 있다
폭이 좁아 섹시하게 긴 ‘플루트 잔’ 속에서 넘칠 듯 올라오는 기포를 내보여 마음을 더 들뜨게 만드는 샴페인.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샴페인 한 병 속에는 4400만개의 기포가 있다고 한다. 물론 일일이 세어보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샴페인병 속의 세계는 마치 우주와도 같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 샴페인도 와인의 한 종류다. 기포가 생기도록 더욱 세심하고 복잡한 숙성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발포성 와인’인 샴페인은 법률에 의해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생산되는 발포성 와인에만 붙일 수 있도록 정해져 있어 이탈리아의 발포성 와인은 ‘스푸만테(Spumante)’라고 부르며 스페인은 ‘까바(Cava)’, 독일은 ‘젝트(Sekt)’, 미국은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조차도 샹파뉴 지역 외에서 나오는 발포성 와인은 단순히 ‘무스’라고 부른다. 샴페인을 다르게 대접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프랑스 와인의 이름은 그들이 생산되는 지역의 이름이다. 보르도나 부르고뉴, 메독, 소테른 등은 그 와인이 나는 곳의 지명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샴페인이라는 이름도 생산 지역인 샹파뉴의 영어식 발음이다. 지명이 하나의 브랜드화해 법률로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흔히 좋은 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빈티지, 즉 생산연도인데 샴페인은 일반적으로 생산연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한다. 그렇게 특정 연도산 빈티지가 표기된 샴페인이 있는가 하면, ‘논빈티지(Non-Vintage)’ 혹은 ‘논밀레짐(Non-Millesme)’이라고 한 샴페인도 있다. 특정한 생산연도를 표기하는 빈티지 샴페인은 특별히 좋은 포도가 수확된 해에만 생산하는 샴페인으로, 매년 나오는 것이 아니라 10년에 평균 3~5차례 정도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반면 논빈티지는 여러 연도의 와인을 섞어서 블랜딩해 만드는 샴페인이다. 샹파뉴 지방은 꽤 추운 지역이기 때문에 해마다 질 좋은 포도를 수확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높은 품질의 포도로 빈티지 샴페인만을 생산해서는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논빈티지 샴페인이 빈티지 샴페인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유 블랜딩의 비밀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와인 메이커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포도는 한 발자국만 떨어진 밭에서 자라도 햇빛의 양과 토양의 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 맛이 차이난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 정도 작은 변화에도 다른 맛과 향을 나타내는데, 다른 해에 생산된 포도는 오죽할까. 각기 다른 햇빛과 기온, 강수량, 토양을 바탕으로 다른 해에 자란 포도를 블랜딩해 좋은 맛의 샴페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블랜딩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샴페인 회사들은 고유의 블랜딩 기술을 갖고 있고 이는 가장 중요한 비밀이다. 심지어 블랜딩 비밀이 와인 메이커의 머리 속에만 기억돼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런 경지이니, 논빈티지 샴페인이야말로 샴페인 고유의 특징과 장점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하여 논빈티지가 아니라 ‘멀티 빈티지(Multi-Vintage)’라고 부를 만도 하지 않을까.다양한 종류와 특성샴페인은 종류도 다양해 그 특성과 개성을 이해하면 더욱 더 즐겁게 마실 수 있다. 예를 들어 샴페인 ‘모엣 샹동’은 ‘글래머러스’하며 다른 그 어떤 샴페인보다 화려한 것이 마치 섹시한 여성들에게 어울린다. 그러나 샴페인 모엣 자체의 맛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그 브랜드 자체의 영욕적인 이미지보다는 매우 안정된 ‘균형미’가 월등히 돋보인다. 맛이 매우 고급스럽고 각기 다른 포도의 배합이 부드러워 10명 중 8명을 만족시킬 만한 포용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고나 할까. 샴페인의 꽃, ‘돔 페리뇽 (Dom perignon)’은 아트(art)를 브랜드 컨셉트로 하고 있어 언제나 완벽에 도전하는 사람들과 아티스트들을 초대해 성대한 갈라디너(문화행사와 결합된 와인 파티)를 연다. 샴페인 자체는 매우 섬세한 터치의 블랜딩이라서 각각의 빈티지 샴페인의 맛을 완벽하게 살릴 음식이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선택해야만 돔 페리뇽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샴페인 ‘뷔브 클리코 (Veuve Clicquot)’는 첫 맛은 피노 므늬의 맛이 탁 치고 올라오는 것과 같은 신맛이 매우 귀족적이다. 뒤에 따라오는 잔 향 또한 길지도 무겁지도 않아 필자에게는 부담스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식전주로 종종 클리코를 선택한다. 그뿐인가, 가격에 비해 훨씬 더 고급 빈티지 샴페인의 맛을 연상시킨다. 기품있는 맛의 조화다음은 일년 중 몇 번 없는 아주 특별한 순간에 샴페인의 지존인 ‘크뤼그(Krug)’. 작은 오크통에서 숙성되어 전통적이면서도 보수적이고 오랜 기간 최고의 상태로 숙성되어 잘 자란 집의 맏아들처럼 성숙한 느낌이다. 샴페인계의 신성으로 1970년 설립된 니콜라 페이아트, 그 중 최고의 포도가 수확될 때만 생산하는 퀴베 팔메 도르 (Cuve Palmes d’Or) 1995년산은 두 가지 포도의 만남이다. 피노 누아로부터 얻는 와인의 힘과 잘 짜인 구조, 그리고 샤도네이가 주는 기품 있는 맛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미세한 기포의 지속력은 옅은 노란빛 액체에 주술을 건 듯 끊임이 없으며 패스트리와 캐러멜의 부드러운 풍미와 레몬 향을 은은히 느끼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질 것이다. ‘니콜라 페이아트’에서는 결코 헤어날 수 없는 고급스러운 정열이 느껴진다.어느덧 8월에 접어들어 장마도 끝나고 무더위만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더울 때에는 와인을 마시고 싶다가도 웬일인지 무거운 느낌에 약간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더운 밤, 흥을 내고 싶은데 가볍고 경쾌한 느낌으로 마시고 싶다면 샴페인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원하게 올라오는 탄산이 목을 적셔주는 것뿐만 아니라 샴페인은 서먹한 사람과도 편하게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술을 마실 때보다 즐겁게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만들어 사람을 사교적이게 하는 샴페인. 식사에 들어가기 전 가벼운 식전주로도 좋고,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식후에도 좋다. 그저 샴페인만 마셔도 즐겁고 신이 난다. 나는 오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샴페인으로 기쁨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