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ng Cycle 니벨룽의 반지
‘한국 공연사를 새로 쓴다.’ 이처럼 대담한 카피를 내세운 공연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문화마케팅이다 해서 본래 가진 것보다 과장해 홍보하는 경향이 요즘 공연계의 추세인데, 이 정도면 정말 장난이 아니다.과연 그럴까. 그 내용을 보면 ‘애교 있는 과장’으로 충분히 웃어넘길 수 있는 공연인 것 같다. 규모나 의의, 역사성 등에서 공연사의 한 획쯤은 그을 만한 ‘사건’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공연은 오는 9월24~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선보이는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4부작 한국 초연이다. 흔히 ‘링 사이클’로 불리는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라인의 황금’(1869년 초연), ‘발퀴레’(1870년 초연), ‘지그프리트’(1876년 초연), ‘신들의 황혼’(1876년 초연)을 일컫는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 이야기를 1848년부터 쓰기 시작해 26년 만에 총 4부작을 완성했다. 문학과 음악, 연극 등이 어우러진 바그너 음악극의 최고 걸작으로 불린다. 바그너 신봉자였던 히틀러는 이 작품 배경을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로 재현하려 했던 ‘불온한’ 역사를 남겼다.워낙 방대한 작품이라 오페라 전통이 뿌리 깊은 서양에서도 4부작 릴레이 공연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187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초연 이래 시리즈보다는 각개격파식으로 많이 공연됐다. 이유는, 심오한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관객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공연시간도 문제였다. 서울 공연의 작품별 시간이 이를 입증한다. ‘라인의 황금’-24일 오후 7시30분 시작, 공연시간 2시간40분(휴식 없음). ‘발퀴레’-25일 오후 6시 시작, 공연시간 5시간(휴식 2회 포함). ‘지그프리트’-27일 오후 5시 시작, 공연시간 4시간45분(휴식 2회 포함). ‘신들의 황혼’-29일 오후 5시 시작, 공연시간 5시간30분(휴식 2회 포함). 총 16시간을 몰입해야 하는 공연이니 날짜를 바꿔가며 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니벨룽의 반지’는 독일 후기 낭만파의 거장인 바그너의 대표적인 서사 오페라다. 바그너는 평생 과작이었다. 그는 사소한 범작에 정력을 낭비하는 대신 음악과 문학, 뭇 예술을 통합한 음악극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니벨룽의 반지’는 이런 통합예술의 완결판으로 꼽힌다.이야기 또한 방대하고 심오하다. 새로운 화성과 선율을 개발한 음악적 실험 못지 않게 바그너의 오페라를 흔히 난공불락으로 여기는 것은 이야기의 난해성 때문이다. 신화와 전설, 종교, 문명 비판, 인간 정신의 문제 등 평범한 인간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이 작품에 응고시켰다. 신들의 우두머리인 보탄의 딸 브륀힐데와 세상의 영웅 지그프리트가 신들의 시기와 계략을 딛고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로 요약된다. ‘니벨룽의 반지’는 이들의 정표이기도 하다. 작품별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라인의 황금반지의 탄생 이야기. 라인강 밑과 난쟁이들이 사는 지하세계, 신들이 사는 발할라 궁전 등이 주무대다. 인간이 등장하기 전이다. 난쟁이 알베리히는 라인의 처녀들에게서 황금을 빼앗는다. 흔히 오딘으로 알려진 북구 신화의 주신 보탄은 어둠으로부터 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인들에게 발할라성을 짓게 한다. 보탄은 알베리히로부터 반지를 빼앗아 거인들에게 준다. 젊음과 미의 여신 프레야는 발할라를 지어준 거인들의 볼모가 되고, 거인 형제 파프너와 파졸트는 발할라에 대한 대가로 프레야 대신 반지를 선택한다. 반지를 놓고 겨루는 거인 형제. 결국 파프너는 파졸트를 죽인다.# 발퀴레발퀴레는 보탄이 내연 관계인 지혜의 여신 에르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홉 명의 여신. 하늘을 나는 말을 타고 죽은 영웅의 혼을 하늘로 인도한다. 지그린데는 보탄이 인간과의 사이에서 낳은 벨중족의 여인. 지그문트는 지그린데의 쌍둥이 오빠로 어려서 헤어졌다. 두 사람은 남매임을 망각한 채 사랑에 빠져 근친상간을 저지른다. 지그린데의 남편 훈딩은 결혼의 여신 프리카(보탄의 아내)에게 부정한 남매를 심판해 달라고 청하고, 프리카는 보탄에게 두 사람을 벌할 것을 요구한다. 보탄은 고민 끝에 발퀴레의 맏이 브륀힐데에게 지그문트를 죽이라고 명한다. 하지만 브륀힐데는 지그린데에 대한 오빠의 지극한 사랑을 보고 감명받아 두 사람을 돕기로 한다. 이를 안 보탄은 직접 지그문트를 살해하고 브륀힐데에게서 신의 지위를 박탈한다. 브륀힐데는 오빠이자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지그린데에게 앞으로 영웅이 될 아이를 가졌음을 알린다.# 지그프리트지그문트와 지그린데의 아들. 알베리히의 동생인 미메는 죽은 지그린데로부터 지그프리트를 맡아 키운다. 미메는 지그린데가 남긴 지그문트의 신검 노퉁을 손보지만, 청년 지그프리트는 이 칼을 두 동강낸다. 지그프리트는 미메를 통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한편 나그네 차림의 보탄은 미메 앞에 나타나 목숨을 건 수수께끼를 제안한다. 미메는 이상한 힘에 끌려 이를 수락한다. 이 와중에서 미메는 지그문트가 남긴 칼 노퉁에 대한 이야기를 보탄에게 털어놓는다. 바로 그 칼이야말로 뱀으로 변신한 거인족 파프너를 쓰러뜨릴 무기라는 말과 함께. 이때 숲에서 돌아온 지그프리트는 미메의 흉계에 따라 파프너와 일전을 벌여 그를 살해한다. 그의 피를 맛본 뒤 자연의 소리를 듣게 된 지그프리트는 새로부터 미메의 간계를 들고 그를 처형한다. 새는 불기둥에 갇힌 브륀힐데의 이야기도 그에게 전해준다. 분노에 찬 지그프리트는 보탄을 찾아가 노퉁으로 그의 창을 잘라버리고, 불기둥 속 브륀힐데를 구출한다. 지그프리트는 그녀를 통해 사랑에 눈을 뜬다.# 신들의 황혼운명의 여신인 세 명의 노른이 실을 자르며 곧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사라진다. 브륀힐데와 지그프리트가 나타나 니벨룽의 반지와 천마 그라네를 서로 교환하며 사랑을 맹세한다. 지그프리트는 라인강을 따라 여행을 떠난다. 기비히가에 도착한 그는 자기를 쿠르네와 맺어주고 브륀힐데를 빼앗으려는 하겐과 군터의 음모에 휘말려 기억을 잊는 약을 받아 마신다. 이들의 계략대로 지그프리트는 황금투구를 쓰고 변신한 채 브륀힐데에게 자신이 군터라 속이면서 결혼하자고 몰아세우며 그 징표로 반지를 빼앗는다. 음모와 배신 속에서 브륀힐데는 갈피를 못 잡고, 결국 지그프리트도 하겐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하겐이 지그프리트 손에서 반지를 빼앗으려 하자 시신이 손을 들어 이를 저지한다. 모든 것이 하겐의 모략임을 안 브륀힐데는 시신 주위에 장작불을 놓게 하고 반지와 함께 불길로 뛰어든다. 반지는 다시 라인의 처녀 손으로 들어가고, 불길은 발할라까지 미쳐 지상과 천상을 태운다. 결국 라인강이 넘쳐 이를 잠재운다.이번 ‘니벨룽의 반지’ 4부작 국내 초연은 러시아 출신 세계적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러시아판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 오페라와 오케스트라가 중심을 이룬다. 총감독 겸 지휘는 게르기예프, 오페라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무대 디자인은 세계 공연계의 ‘무서운 아이’ 조지 티시핀이 맡았다. 2003년 독일 바덴바덴 축제극장이 제작한 것으로, 역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극찬을 받았다. 문의 (02)518-7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