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 for Everyone!

호주에서 7년간 유학한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가벼운 식사에서부터 연말 파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과 장소에서 와인을 쉽게 접해왔다. 호주사람들에게 와인이란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에 비싼 와인을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94년 귀국했을 때만 해도 한국에서 와인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포도주’라는 것도 마주앙이 대표적인 것이었고, 다른 와인들은 아주 비싸거나 싸구려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졌다. 백화점 식품 코너에는 와인 코너가 따로 마련돼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골라 살 수도 있으며 이곳 저곳에서 어렵지 않게 ‘와인 바’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서구에서는 와인만을 따로 마시기보다는 식사와 함께 와인을 마시기 때문에 와인 바라는 것이 없다. 그뿐인가. 수입 와인의 종류와 가격도 1만원대부터 수십만원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이렇게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공간과 즐기는 인구가 늘었다고 해서, 혹은 그 종류와 가격이 다양해졌다고 해서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의 와인에 대한 입맛까지도 정말로 다양해지고 대중화되었을까.와인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최근 서점에 들렀다 로알드 달(Roald Dahl)의 단편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로 대표작 중 하나인 ‘찰리와 초콜릿 공장(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이 최근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의 단편 소설 중에 ‘맛(Taste)’이 있다. 이야기에는 맛만 보고 그 와인의 포도 품종과 수확된 빈야드와 빈티지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짧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값 비싸고 구하기 힘든 와인을 자랑하려는 한 남자와 와인에 대한 넓은 식견과 자신의 미각의 절대성을 증명하려는 다른 남자가 하나의 와인을 놓고 대결을 벌인다. 그 간단한 이야기만으로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한편으로 필자는 그 속에 등장하는 허세 가득한 두 주인공의 모습이 한국의 와인 문화와 비슷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와인을 자주 마시지 않다가 처음으로 혹은 간혹 와인을 사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그 선택이 쉽지 않다. 일단 와인이라는 것이 레드와 화이트, 두 종류로 나뉘어져 있는 데다 품종만 해도 발음하기도 어려운 프랑스어나 다른 유럽 언어로 뭐라고 잔뜩 써 있고 그 다음엔 생산연도까지 나와 있으니 이건 산 넘어 산이라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누군가 레드 와인이 고기와 어울린다고 했던 것도 같고, 화이트 와인은 따뜻하게 마시는 게 아니라 차게 해서 마셔야 한다고도 했던 것 같고, 부르고뉴니 보르도니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들이 머리 속에 맴돌아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기죽지 않으려고 가격대가 높은 걸 보게 되고, 목으로 넘어가는 그 비싼 포도 액체가 기가 막히기만 하다.자, 이제 위의 모든 것은 잊어 버려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우선 레드와 화이트에 얽매이지 말자. 정 나누고 싶을 경우, 가볍고 시원하게 마시려면 화이트 쪽을 선택하는 정도의 기준만 있으면 된다. 7,8월에는 레드 와인을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와인은 대체로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린다. 따라서 그것이 육류든 생선이든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둘째, 와인을 10병 이상 사기 전까지 포도 품종과 생산 지역 같은 것은 한 번 읽어보고 잘 모르겠으면 살 때 직원에게 물어보고 살짝 메모를 하자. 외울 필요도 없고 모른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10병 정도 와인을 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힐 것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비싼 와인을 사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저렴한 가격의 와인을 자주 사서 쉽게 마시고 그 맛을 그저 있는 그대로 느껴보라. 질 좋고 저렴한 와인 고르는 법하지만 그렇다고 싸구려 아무 와인이나 마실 수는 없는 법. 때로는 연인에게 와인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기도 하고, 적은 돈으로 부모님께 와인을 선물해 사랑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를 위해 유명한 와이너리에서 나왔지만 가격은 매우 경제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이름 값 하는’ ‘착한 가격’의 와인을 세 가지 소개한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몽매상(Mommessin) 리저브 시덕션(Reserve Seduction). 버건디(Burgundy) 지방에 터를 잡고 와인을 생산한 지 140년 이상의 전통에 파격을 더하고 있는 몽매상 와이너리의 새로운 레드 와인이다. 쉬라즈(Shiraz)와 피노 누아(Pinot Noir)의 독특한 블렌딩(Blending)으로 쌉싸름한 뒷맛이 혀에 지나치게 오래 남지 않고 입 안에 향기로운 과일의 느낌을 남기는 풍부한 과즙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가격 또한 2만원에 못 미쳐 깊은 전통을 지니고 수많은 고가의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다음으로 베린저(Beringer)의 클래식 레드(Classic Red)와 클래식 화이트(Classic White)는 이름 그대로 클래식하지만 지겹지 않은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와인들이다. 베린저 빈야드는 125년의 세월을 통해 세계적 와인 산지인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와이너리로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명성을 지켜오고 있다. 클래식 레드는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만큼 깊고 고소한 맛을 지니고 있어 돼지고기 수육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며, 클래식 화이트는 새콤하면서도 부드러워 더운 여름 밤 얼음을 띄워 마시기에 딱 좋은 와인이다.마지막으로 돈나푸가타(Donnafugata)의 안실리아(Anthilia)라는 이름의 화이트 와인이다. 돈나푸가타 와이너리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최고의 와이너리로 평가받고 있다. 안실리아는 시칠리아 고유 품종으로 만들어진 화이트 와인으로, 2만원이 조금 넘는 저렴한 가격에 비해 놀랍도록 향이 풍부하고 맛이 좋다. 꼭 비싼 돈을 내고 와인 바에서 분위기를 내며 마셔야 좋은 와인을 잘 마시는 것은 아니다. 와인 바에서 마실 수 있는 가장 싼 와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값으로도 훨씬 좋은 와인을 사 마실 수 있다. 상황에 맞게 적당한 가격의 와인을 사서 일상에서 지인들과 부담 없이 마시는 게 진정 와인과 인생을 즐기는 법이 아닌가. 이제 나의 선택과 나의 입맛에 자신감을 갖고, 값이 싼 와인이라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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